드라마 <라이브>의 ‘이화여대 시위’ 장면. tvN 제공
‘이대 시위’ 왜곡 논란에 사과 드라마는 ‘이화여대 시위’ 장면을 재현했다가 격한 항의에 부딪혔고, 결국 사과했다. 2016년 7월 이대생 200명이 학내 문제에 항의하며 총장실 앞을 점거하자, 경찰 1600명이 투입됐다. 이대 시위는 박근혜 국정 농단 사건의 실마리가 되었고, ‘나라를 구한 사건’으로 회자됐다. 하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학생들은 이대 시위를 자랑스러움이 아닌 트라우마로 기억한다. 사건 초기부터 여성 혐오로 인한 차별적 시선과 대상화에 시달려온 이화인들이 극심한 심리적 외상을 겪었기 때문이다. 시위 참가 학생들은 끝내 익명을 고집했고, 86일간의 점거 기록은 자진 폐기하기로 합의했다. 사태가 종결된 뒤에도 이화인들은 이대 시위를 외부 행사에서 발제하거나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드라마가 이 사건을 재현하는 일은 극도의 신중을 요하는 일이었으나, 그렇지 못했다. 현실에서는 시위에 익숙지 않았던 여학생들이 해머와 스패너를 든 경찰들에게 둘러싸이자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어린 시절 애창곡이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상>을 불렀다. 그러나 화면 속에는 붉은 머리띠를 두른 남녀 학생들이 모인 것으로 재현됐다. 그 결과 이대의 상징성은 지워지고, 압도적인 물리력 차이도 희석됐다. 심지어 진압에 투입된 한정오의 얼굴이 시위 학생의 손톱에 긁히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폭력의 방향을 역전시켰다. 물론 드라마가 사건을 폄하하거나 폭력 진압을 미화할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에도 학내 문제에 웬 경찰 투입이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담겼다. 하지만 시위 장면을 경찰의 시선으로 재현하는 순간, 시위 주체의 맥락은 소거된다. 즉 ‘그만둘 것 아니면 징징거리지 말자’며 절박하게 버티는 경찰의 태도가 강조되면서, 시위대는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인식된다. 그 결과 수뇌부의 잘못된 결정으로 현장에 투입된 경찰들도 피해자가 되었다는 작가의 논리는 재현 과정을 거치면서 ‘경찰이 피해자’라는 논리로 단순 축소된다. 가해자는 보이지 않고, 피해자들 간의 싸움이 가시화할 때, 흔히 빠질 수 있는 오류다.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은 경찰의 입장에서 사건을 재구성하면서도 시위대와 경찰의 싸움으로 몰고 가는 논리의 허구성을 헤집으면서 진짜 가해자는 현장에 경찰특공대를 투입한 자들임을 깨닫게 하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라이브>의 시위 장면은 이런 성찰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경찰 시선으로 바라본 시위대 드라마는 경찰이라는 공권력을 개개인의 인간으로 환원했을 때, 공권력과 시민 사이에 존재하는 헌법적 긴장관계가 소거된다는 문제를 간과한다. 시민에게 공권력을 사용하는 경찰의 절박하고 위태로운 감정을 강조함으로써, 시민 대 경찰의 관계를 개인 대 개인의 관계로 치환한다. 한정오가 임신부에게 테이저건을 쏜 사건도 비슷한 문제를 지닌다. 다만 이때 벌어지는 껄끄러운 문제를 봉합하기 위해 드라마는, 고뇌하는 한정오와 임신부와 태아가 무사하다는 사실과 임신부도 나중에 자신이 폭력을 쓰지 못하도록 테이저건을 쏘아준 한정오에게 고마워했다는 후기로 마무리한다. 하지만 공권력과 시민의 관계는 경찰-개인 대 시민-개인의 관계로 환원할 수 없다. 특히 경찰이 쏜 물대포에 사람이 죽은 사건이 불과 얼마 전에 일어났던 사회에서, 경찰의 관점으로 시위대를 바라보는 것이 어떤 위험을 내포하는지 찬찬히 숙고할 일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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