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철학카페 14 |렘브란트와 17세기
상업자본주의 시대의 빛과 어두움 그리고 인간 추구하며 고통과 희망 담아
화이트헤드는 17세기를 ‘천재들의 시대’로 규정했고 이 시대를 장식한 열두명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을 열거했다. 그러나 그는 마땅히 렘브란트의 이름도 넣어야 했을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들은 17세기의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며 오늘날의 감상자들에게도 강렬한 힘으로 다가온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스피노자, 호이헨스, 그리고 렘브란트를 낳았다. 이 세 사람의 공동점은? 바로 빛이다. 이들은 17세기의 한가운데를 살면서 빛이 주는 강렬한 꿈과 희망에 매료되었다. 스피노자는 빛을 통해 위대한 합리주의 철학을 세웠고, 호이헨스는 빛을 지배하는 물리법칙을 발견했다. 그리고 렘브란트는 빛 속에 세계와 인간의 모든 것을 담으려 했다.
네덜란드는 새로운 시대의 초상화 17세기 네덜란드는 ‘새로운 시대’의 초상화 자체였다. 17세기는 르네상스를 통해 서서히 저물어가던 중세로부터 계몽사상으로부터 본격적인 근대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 정확히 과도기에 위치하는 시대이다. 한편에서는 아직도 마녀사냥이 벌어지고 있었고, 구교와 신교의 30년 전쟁은 유럽을 황폐하게 했다. 범죄자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처참하고 잔인하게 고문당하면서 죽어갔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갈릴레오와 뉴턴의 새로운 과학이,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새로운 철학이 활짝 꽃피고 있었다. 이 어두움과 빛, 끝나지 않는 고통과 새로운 희망이 렘브란트의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17세기에 들어와 상업자본주의는 뚜렷한 형태로 정립되었다. 네덜란드는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네덜란드 문화는 두축을 통해서 지탱되었다. 여전히 대중을 지배했던 기독교(특히 칼뱅주의) 그리고 해외무역.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를 논했을 때 그는 틀림없이 네덜란드를 생각했을 것이다. 네덜란드에는 온갖 진기한 물품들이 드나들었다. 자유롭게 사유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정착했던 데카르트는 한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곳에는 유럽에서 보기 드문 인도산 희귀품으로 가득 찬 배들이 들어오곤 하오.” 낭비벽이 심했던 렘브란트가 온갖 물품들을 사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통해서 새 시대의 희망을 들이마셨지만 또 그 때문에 힘겨운 노년을 보내야 했다(칼뱅주의로 무장한 암스테르담이 어떻게 그를 용인할 수 있었겠는가). 상업자본주의의 발달은 ‘제3신분’을 탄생시켰으며 네덜란드 미술의 경제적 원동력은 이들이었다. 이전에 미술을 뒷받침했던 교회나 정부보다는 오히려 일정한 재산을 갖춘 시민들(최초의 부르주아 계급)이 그림을 주문했다. 그래서 그림의 소재도 성서나 고대신화에서 점차 일상적인 생활 모습으로 변모해갔다. 그러나 시대는 아직도 기독교에 의해 지배되었다. 렘브란트 역시 많은 종교화를 그렸다. 그럼에도 새로운 학문의 기운은 도처에서 폭발했다. 렘브란트의 고향 레이덴에도 해부학, 식물학 등 근세적 학문들이 개설되었으며, 망원경 같은 과학 기구들이 도처에서 발견되곤 했다. 렘브란트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를 그릴 수 있었다. 렘브란트가 평생 추구한 주제는 빛과 어두움 그리고 인간이었다. 그림에 나타난 다채로운 표정들은 새로운 지식에 눈뜨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신지식에 눈뜨는 다채로운 표정들
렘브란트가 삶에서 느꼈던 빛과 어두움은 그의 그림을 특징짓는 뚜렷한 특성으로 자리잡았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고독, 아내와 자식들의 죽음, 사회의 몰인정(표면적인 인정은 대단했지만, 누가 그의 예술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했겠는가), 전쟁의 공포 등이 가져온 어두움, 그리고 활기찬 새로운 시대와 예술 자체가 가져다준 빛. 렘브란트의 빛과 어두움은 곧 17세기의 빛과 어두움이기도 했다. 이 빛과 어두움은 흔히 ‘야경’으로 알려져 있는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부대>에서 두드러지게 뛰어나게 표현되었다. 명암(明暗)을 비길 데 없이 현묘하게 표현한 걸작이다.
그러나 렘브란트 회화에 있어 빛보다 더 근본적인 주제,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렘브란트는 평생 인물화를 그렸다. 그것은 당시 새롭게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을 과시하기 위해 다량의 초상화를 주문한 때문이기도 하다. 렘브란트는 평생 주문을 받아서 초상화를 제작했지만, 그의 그림들은 늘 주문자들을 실망케 했다. 아니 분노케 했다. 그의 그림은 결코 그들이 요청한 그런 식- 부와 권력의 과시!- 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기에 말이다. 렘브란트는 먹고살기 위해 초상화를 그렸지만, 그가 초상화를 통해 그렸던 것은 어떤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체, 인간이라는 이 오묘한 존재 자체였기 때문이다.
렘브란트 회화의 깊이는 무엇보다 그것이 인간의 집요한 자기 탐구라는 주제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인간의 정체성을 누구보다도 깊게 성찰했고 때문에 그의 그림은 단지 외부적인 어떤 광경을 그린 여타의 그림과는 뚜렷하게 차별된다. 렘브란트의 인간은 끝없이 방황하고 변하고 고뇌하는 인간이다. 렘브란트가 자신의 자화상을 숱하게 그린 것, 그리고 그 자화상들의 느낌이 매번 달라지는 것은 렘브란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성찰했음을 나타낸다.
이보다 감동적인 사유가 있을까!
이 점에서 <철학자>(또는 <나선형 계단이 있는 방의 학자>)만큼 렘브란트의 내면세계를 뚜렷이 드러내는 그림도 드물 것이다. 한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할 감동을 받게 되는 이 그림은 빛과 어두움, 고독과 자기 성찰을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있다. 나선형 계단은 세계의 무한한 신비와 모든 인식을 거부하는 존재의 깊이를 나타내는 듯하다. 끝나지 않는 계단, 그리고 그 아래에서 두손을 낀 채 조용히 명상하는 철학자. 그 철학자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아마도 인간의 운명을 성찰하고 있으리라. 그 철학자의 사유는 곧 렘브란트 자신의 사유이기도 할 것이다.
반대편에서는 부인(아니면 하녀?)이 화덕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다시 불쏘시개로 땔감들을 뒤집고 있다. 창문으로 환하게 들어와 어두운 방에서 사유하는 철학자의 얼굴을 비추는 빛과 화덕의 아늑한 불이 형언할 길 없는 빛의 향연을 만들어낸다. 화가들은 무수한 주제를 그려왔지만, 사유(思惟)를 그린 그림은 드물다. 그러나 이 그림은 바로 사유를 그리고 있다! 사유한다는 것을 이토록 감동적으로 그린 그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

네덜란드는 새로운 시대의 초상화 17세기 네덜란드는 ‘새로운 시대’의 초상화 자체였다. 17세기는 르네상스를 통해 서서히 저물어가던 중세로부터 계몽사상으로부터 본격적인 근대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 정확히 과도기에 위치하는 시대이다. 한편에서는 아직도 마녀사냥이 벌어지고 있었고, 구교와 신교의 30년 전쟁은 유럽을 황폐하게 했다. 범죄자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처참하고 잔인하게 고문당하면서 죽어갔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갈릴레오와 뉴턴의 새로운 과학이,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새로운 철학이 활짝 꽃피고 있었다. 이 어두움과 빛, 끝나지 않는 고통과 새로운 희망이 렘브란트의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17세기에 들어와 상업자본주의는 뚜렷한 형태로 정립되었다. 네덜란드는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네덜란드 문화는 두축을 통해서 지탱되었다. 여전히 대중을 지배했던 기독교(특히 칼뱅주의) 그리고 해외무역.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를 논했을 때 그는 틀림없이 네덜란드를 생각했을 것이다. 네덜란드에는 온갖 진기한 물품들이 드나들었다. 자유롭게 사유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정착했던 데카르트는 한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곳에는 유럽에서 보기 드문 인도산 희귀품으로 가득 찬 배들이 들어오곤 하오.” 낭비벽이 심했던 렘브란트가 온갖 물품들을 사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통해서 새 시대의 희망을 들이마셨지만 또 그 때문에 힘겨운 노년을 보내야 했다(칼뱅주의로 무장한 암스테르담이 어떻게 그를 용인할 수 있었겠는가). 상업자본주의의 발달은 ‘제3신분’을 탄생시켰으며 네덜란드 미술의 경제적 원동력은 이들이었다. 이전에 미술을 뒷받침했던 교회나 정부보다는 오히려 일정한 재산을 갖춘 시민들(최초의 부르주아 계급)이 그림을 주문했다. 그래서 그림의 소재도 성서나 고대신화에서 점차 일상적인 생활 모습으로 변모해갔다. 그러나 시대는 아직도 기독교에 의해 지배되었다. 렘브란트 역시 많은 종교화를 그렸다. 그럼에도 새로운 학문의 기운은 도처에서 폭발했다. 렘브란트의 고향 레이덴에도 해부학, 식물학 등 근세적 학문들이 개설되었으며, 망원경 같은 과학 기구들이 도처에서 발견되곤 했다. 렘브란트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를 그릴 수 있었다. 렘브란트가 평생 추구한 주제는 빛과 어두움 그리고 인간이었다. 그림에 나타난 다채로운 표정들은 새로운 지식에 눈뜨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신지식에 눈뜨는 다채로운 표정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