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철학카페 13 |조선의 풍속화
서민의 일상을 묘사한 김홍도와 신윤복… 누가 세상살이의 참모습을 화폭에 담았나
근대적 대중의 탄생은 대개 도시의 발달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조선사회에서의 근대적 대중의 도래는 일본에 비해 늦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조선사회만큼 유교적 질서가 사회 저변에까지 스며든 곳은 없었다는 점, 그리고 그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외부적 충격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도 일본에서와 같은 본격적인 우키요에나 풍속화, 춘화 등은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시대의 그림은 이전의 그림과 분명 여러 면에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향락에 물들지 않은 시골 서민들
전통적인 문인화는 아(雅)의 세계를 찬양하고 속(俗)의 세계를 멸시해왔다. 아의 세계를 추구한 사인화(士人畵)와 속의 세계를 묘사한 화공화(畵工畵)를 구분한 소동파의 회화론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회화사에서의 근대성의 도래를 풍속화가 새롭게 평가되고 또 풍요롭게 실천된 시대로 잡아도 무방하다. 이제 (풍)속화는 평가적 의미보다는 분류적 의미로서 이해되기 시작하며, 김홍도 같은 풍속화가가 ‘파천황’으로 묘사되었던 것에서, 그리고 이덕무(1741∼93) 같은 사대부가 “문인은 아취있는 것은 물론 통속적인 것에까지 능해야 한다”고 했던 말에서 시대의 변화를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중국적 아취로부터 토속적 풍속에로 관심을 옮긴 당대 문화 전반의 경향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일본의 우키요에와 달리 도시 대중의 향락보다는 시골 서민들의 생활상을 즐겨 묘사했다. 조선사회의 향락문화는 서민들의 세계로까지 내려오지 않았으며, 주로 양반과 기생들을 중심으로 한 문화에 집중되었다. 민중이 아닌, 근대적 의미에서의 대중의 탄생은 일제시대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변화의 이런 완만함은 조선사회의 경직성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홍도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묘사한 인물로서 발군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유명한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畵帖)에 수록되어 있는 주제들(기와이기, 빨래터, 벼타작, 대장간, 논갈이, 무동, 고두놀이, 씨름, 길쌈, 담배썰기, 편자박기, 우물가, 행상 등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그림에는 당시 서민들의 노동과 놀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김홍도는 서민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눈길을 주면서 생활의 미세한 역동성들을 잡아낸 흔치 않은 화혼(畵魂)을 보여준다. 김홍도의 그림은 무척 사실적이며, 이것은 그가 실제 바깥에 나가 자신이 관찰하고 사생한 장면들을 그렸음을 함축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는 일정 정도의 사회풍자가 깃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벼타작>에는 힘들게 일하는 농부들과 팔을 괸 채 담배를 피우는 양반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풍경은 <기와이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40대부터의 김홍도는 서민생활을 그리기보다 사대부의 분위기를 많이 그리기 시작한다. 그가 단원(檀園)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김홍도는 정조 어용의 초본을 그렸으며 종6품인 안기찰방이라는 직책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그의 신분 상승이 그의 그림의 성격을 바꿔놓았으리라. 한 인간의 신분 변화가 그림의 내용도 바뀌게 만들었다. 김홍도 개인으로서는 편안한 생활로 들어선 것을 뜻하지만, 미술사적으로는 아쉬운 대목이다. 신분 상승한 김홍도, 문인화로 전환
김홍도가 서민들의 생활을 그린 풍속화와 후기의 문인화의 세계를 펼쳤다면, 신윤복은 여성과 유흥문화, 그리고 남녀의 성정(性情)을 즐겨 다루었다는 점에서 유니크하다. 에도의 우키요에가 활짝 꽃핀 조닌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다면, 신윤복의 그림 역시 당대에 형성된 도시의 유흥문화를 배경으로 한다. 그의 그림에는 기녀들과 양반들의 애정행각, 또 당시 새롭게 형성되었던 중인 계층의 문화, 부녀자와 승려의 탈선, 화류(花柳)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에로틱한 풍경 등이 등장한다. 그러나 일본처럼 가부키 등 좀더 거대하고 공개적인 공연문화가 성립하지 않았던 조선에서, 신윤복은 주로 기방이나 주목, 거리, 그리고 물놀이 광경 등을 묘사했다.
조선 후기의 유흥문화 역시 도가 지나칠 정도로 발달해 있었다. 당시 거리 여기저기에는 색주가(色酒家)가 널려 있었으며(오늘날의 룸살롱을 연상하면 될 것 같다), 투전을 하는 젊은이, 늙은이들 또한 사방에 깔려 있었다. <뱃놀이>는 기생들과 물놀이하는 양반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외에도 <후원 놀이> <화류 놀이> 등과 같은 그림들에서 당시의 놀이문화를 엿볼 수 있다. 신윤복의 이런 그림에도 일정한 정치적 맥락이 개입해 있다. 기생이야말로 하류 계층과 상류 계층 사이에 존재하는 여인들이며, 이들과 양반의 사랑은(??) 바로 흔들리는 신분 구조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그림에서뿐만 아니라 문학 등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런 분위기에 일본 우키요에와의 접촉 또한 일정한 영향을 끼친다. 1791년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일행 중 한 사람인 신유한은 당시의 일본인들이 모두 춘화들을 지니고 있었으며, 거리마다 온통 창가(娼家)가 널려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볼 때 이때의 춘화들이 한국에도 일정 정도 흘러들어왔을 것이다. 일본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조선도 서서히 현대적인 성문화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키요에 영향받은 신윤복의 그림
일본의 우키요에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윤복 역시 여인들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의미있는 것은 여인들 자체를 묘사한 데 있다기보다 여성과 남성의 정욕을 묘사한 데 있다 할 것이다. <밀회> 같은 그림은 남녀 사이의 복잡하고 미묘한 애정관계를 밀도있게 묘사하고 있다. 두 남녀가 몰래 만나는 광경을 다른 한 여인이 몰래 지켜보고 있다. <달빛여인> 역시 남녀의 밀회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광경을 묘사한 것 자체가 파격이거니와 그 그림의 수준 또한 뛰어나다. ‘대중’과 ‘민중/인민’은 외연은 같지만 내포는 다르다. 김홍도의 전기 그림이 민중/인민을 묘사하고 있다면, 신윤복의 그림이나 우키요에는 대중을 묘사하고 있다. 1980년대에 사람들은 민중이라는 말을 많이 썼고 민중예술을 논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대중이라는 말을 주로 하며 대중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민중과 대중, 어느 것이 사람들의 참모습일까.
이정우/ 학아카데미 원장 elandamour@yahoo.co.kr

전통적인 문인화는 아(雅)의 세계를 찬양하고 속(俗)의 세계를 멸시해왔다. 아의 세계를 추구한 사인화(士人畵)와 속의 세계를 묘사한 화공화(畵工畵)를 구분한 소동파의 회화론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회화사에서의 근대성의 도래를 풍속화가 새롭게 평가되고 또 풍요롭게 실천된 시대로 잡아도 무방하다. 이제 (풍)속화는 평가적 의미보다는 분류적 의미로서 이해되기 시작하며, 김홍도 같은 풍속화가가 ‘파천황’으로 묘사되었던 것에서, 그리고 이덕무(1741∼93) 같은 사대부가 “문인은 아취있는 것은 물론 통속적인 것에까지 능해야 한다”고 했던 말에서 시대의 변화를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중국적 아취로부터 토속적 풍속에로 관심을 옮긴 당대 문화 전반의 경향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일본의 우키요에와 달리 도시 대중의 향락보다는 시골 서민들의 생활상을 즐겨 묘사했다. 조선사회의 향락문화는 서민들의 세계로까지 내려오지 않았으며, 주로 양반과 기생들을 중심으로 한 문화에 집중되었다. 민중이 아닌, 근대적 의미에서의 대중의 탄생은 일제시대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변화의 이런 완만함은 조선사회의 경직성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홍도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묘사한 인물로서 발군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유명한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畵帖)에 수록되어 있는 주제들(기와이기, 빨래터, 벼타작, 대장간, 논갈이, 무동, 고두놀이, 씨름, 길쌈, 담배썰기, 편자박기, 우물가, 행상 등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그림에는 당시 서민들의 노동과 놀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김홍도는 서민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눈길을 주면서 생활의 미세한 역동성들을 잡아낸 흔치 않은 화혼(畵魂)을 보여준다. 김홍도의 그림은 무척 사실적이며, 이것은 그가 실제 바깥에 나가 자신이 관찰하고 사생한 장면들을 그렸음을 함축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는 일정 정도의 사회풍자가 깃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벼타작>에는 힘들게 일하는 농부들과 팔을 괸 채 담배를 피우는 양반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풍경은 <기와이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40대부터의 김홍도는 서민생활을 그리기보다 사대부의 분위기를 많이 그리기 시작한다. 그가 단원(檀園)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김홍도는 정조 어용의 초본을 그렸으며 종6품인 안기찰방이라는 직책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그의 신분 상승이 그의 그림의 성격을 바꿔놓았으리라. 한 인간의 신분 변화가 그림의 내용도 바뀌게 만들었다. 김홍도 개인으로서는 편안한 생활로 들어선 것을 뜻하지만, 미술사적으로는 아쉬운 대목이다. 신분 상승한 김홍도, 문인화로 전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