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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정욕이 흐르는 감각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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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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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철학카페 12 |욕망의 파노라마(Ⅱ)-춘화의 탄생

허무를 떨치려는 쾌락적인 몸부림… 궁정에서 태어나 대중 속으로 들어가

사진/ 에도의 요시와리는 교토의 시마바라지역과 마찬가지로 음악과 웃음소리와 화제로 가득 찬 곳이었다. 유곽의 주인들에게 팔려 예절과 예능교육을 받은 유녀들 주위에는 예술가들이 경쟁적인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대중의 탄생은 궁정과 사찰이라는 두 문화적 축을 벗어나는 새로운 문화의 축을 탄생시켰다. 조인(町人)이라는 말 자체가 나타내듯이 에도시대는 ‘거리’ 즉 강호(江湖)의 문화가 활짝 꽃핀 시기이다. 이러한 문화는 물론 경제적 배경을 가진다. 상업자본주의의 발달이 그것이다. 상업자본주의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많은 도시(都市)들을 만들어냈고, 이제 도시인들이 빚어내는 현대인들의 삶이 시작된다. 동북아의 경우 산업자본주의의 발달은 서구의 영향으로 뒤늦게 발생했지만, 상업자본주의는 서구와 마찬가지로 17, 18세기가 되면 점차 발전한다. 뜬구름 같은 세상을 그린 그림, 우키요에(浮世畵)는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

현대 대중문화의 씨앗 ‘우키요에’


1661년에 그 명칭이 처음 사용되기 사작한 우키요에를 비롯한 근대의 대중문화가 (시골의 농민/민중과 대비되는) 대중/도시인의 삶을 반영한다면, 그것은 곧 현대 대중문화의 씨앗이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대중문화’란 언제 어디에서나 공통의 주제를 띤다. 대중문화란 바로 가장 일상적이고 평균적인 인간(하이데거의 ‘das man’)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전(前)형이상학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특징지어진다. 형이상학이 없는 세계관은 곧 허무, 죽음에의 공포/불안, 무의미 등을 핵심으로 한다. ‘뜬구름 같은 세상.’ 그리고 그러한 세계관에 대응하는 가치관은 그런 허무를 잊게 해줄 수 있는 갖가지 종류의 쾌락이다. 전형이상학적인 모든 쾌락은 몸을 둘러싸고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 쾌락들 중에서 가장 강렬하고 유혹적인 쾌락이 섹스라는 것은 당연하다. 욕정(欲情)이야말로 쾌락들 중의 쾌락인 것이다. 때문에 모든 대중문화는 기본적으로 성(性)을 둘러싸고 이루어진다. TV, 영화, 유행가…. 모든 대중문화는 결국 성적욕망의 형상화인 것이다.

일본이라는 문화가 몸의 문화라면(그래서 종교적인 성스러움조차도 몸을 통해서 표현된다), 사물들에 대한 감각적 감수성(모노노아하레=物の情)이 일본문화의 핵심이라면(바르트가 말하는 ‘기호의 제국’), 미국과 더불어 대중문화의 양대 메카를 형성한 것이 일본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미국의 대중문화가 ‘산업’의 형태를 띤다면, 일본의 대중문화는 거의 본능적인 것이리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하야시 라잔(林羅山) 등의 학자들을 통해 유교문화를 도입하고자 한 것에 아랑곳 없이, 에도시대는 바로 일본 대중문화가 화려하게 탄생한 감각의 도가니였다. 이제는 민중의 순박함이 아니라 대중의 욕망이 흘러 넘치는 시대였다.

대중의 핵심적 욕망이 정욕에 있다면, 우키요에의 중요한 한 흐름이 춘화(春畵)에 있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춘화는 웃음의 그림(笑い繪), 침대의 그림(枕繪), 또는 염본(艶本), 색본(色本)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춘화의 유래는 궁정에 있다. 대중은 한편으로 권력자들과 대립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권력자들을 흉내낸다. 욕하면서도 흉내내는 기묘한 아니러니.

‘춘화’라는 말은 원래 ‘춘궁화’(春宮畵)로 불렸으며 각종 성교 자세를 묘사한 그림이었다. 그것은 제왕의 침대를 장식했던 것들 중 하나로 춘소궁위(春宵宮想)- 봄 밤의 궁전의 휘장- 저편에서 벌어지는 일과 관련된다(류다린, <중국고대성문화>, 1993). 더 정확히는, 춘궁이란 황태자를 뜻한다. 바로 이 황태자의 성교육을 위해 그려졌던 그림이 춘궁화였을 것이다.

춘궁화로 성교육 받은 왕족의 특권

사진/ '우카요에'에 등장하는 쾌락주의 사회의 자유분방한 풍속은 춘화의 묘사를 정당화했는데, 이들 그림은 역시 에로틱한 장면들을 그린 니시카와의 <여인 1백명의 생활 해설>과 같은 책으로 출판되었다.
<한서>(漢書)에는 서한의 선제(宣帝)시대(기원전 73∼49)에 해양(海陽)이라는 왕족의 한 사람이 집에 춘화를 걸어놓고서 주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아가 성제(成帝)에 이르러서는 황제 자신이 직접 춘화의 제작을 명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는 은의 폭군(이라고 하는) 주(紂)가 그의 총비인 달기(*게집녀 변 옆에 날일 쪽자할 것* 己)와 에로틱하게 즐기는(淫樂) 장면을 병풍에 묘사하게 했던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왕/황제란 다분히 생물학적 의미를 띤다. 물론 강력한 왕/황제들(한문제, 당태종, 강희제, 조선의 태종 등등)은 신하들을 견제하면서 직접 국정을 운영했지만, 상당수의 왕/황제들은 권력의 상징으로서, 생물학적 보존물로서 존재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그들은 국가의 동일성을 보존하기 위해서(왕과 국가의 몸은 동일시되었으므로) 배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수많은 후궁을 거느린 것이나 춘궁화 등을 통한 성교육은 단지 왕/황제들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사였던 것이다.

중국에서 형성된 춘화의 전통은 이후 다른 문화들에로 이식되었으며, 근대 대중문화가 탄생했을 때 그 속으로 스며들었다. 특히 요시와라(吉原)는 향락적 대중문화의 전형적인 지역이었다. 여기에 이미 시들어버린 오이랑(花魁)과 어린 꽃봉오리 마이코(舞子) 그리고 활짝 핀 꽃인 게이샤(藝子) 등이 득실댔으며, 이들을 찾아서 장사꾼들, 연예인들,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이 ‘감각의 제국’에서 춘화들이 양산되었다. 또 유곽과 더불어 극장이야말로 대중문화의 산실이었다. 사람들은 밤마다 극장에 모여들어 화려한 불빛과 아름다운 미희들, 춤과 노래를 즐겼다. 삶의 허무를 채워주는 가장 화려한 불꽃놀이, 그것은 바로 극장에서의 춤과 노래이다.

대중문화가 극장과 유곽(오늘날에는 TV)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면, 화가들의 눈은 당연히 유녀(遊女)들이나 미희(美姬)들에 쏠릴 것이다. 당대 가부키(歌舞伎)에 출현했던 미희들을 그린 그림들은 이런 관심을 반영한다. 마타베에(又兵衛)는 매혹적인 미희들을 원색들을 사용해 그렸으며, 이 미희들의 유연한 ‘S자형’ 몸매는 19세기 말 유럽의 나비파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부채를 든 모네 부인>은 이 일본 미인도의 구성을 거의 그대로 본뜨고 있다. 스기무라 시헤이(衫村師平), 기요마스(淸倍) 등은 특히 극장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연기하는 미희들에게 주목했으며, 그들을 그린 다수의 그림을 남겼다. 또 판화 제작으로 유명했던 우타가와 도요쿠니(歌川豊國)나 가쓰가와 순쇼(勝川春章) 등도 미희들을 잘 그렸다. 이들의 그림은 이후 미인을 그리는 그림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러한 전통은 오늘날의 재패니메이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살아 있는 전통… 쇼군들의 이중적 태도

사진/ 이 판화에서 주로 사용된 화려한 색들의 조화와 강도에 힘입어 남녀가 기모노 안에 누워 있는 장면은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미인도보다 더 에로틱한 그림들, 즉 남녀의 정사를 노골적으로 묘사한 그림들도 많이 그려졌다. 니시카와 시게노부(西川祐信)는 여인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묘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에로틱한 장면들을 묘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의 에로틱한 그림들은 때때로 ‘쇼군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으며, 쇼군들은 이들에게 간간이 철퇴를 들곤 했다. 이런 모습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재현되고 있지 않은가.

철학아카데미 원장 elandamour@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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