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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깨달음에 이르는 ‘역설적 익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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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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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철학카페 10|선화(禪畵)의 의미

선의 예술은 열린 세계로 가는 우회로… 불이에 다가서는 형태 저편을 추구

사진/ 셋슈 도요(1420~1506)는 1476년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을 공부하고 여행을 하며 송대희 회화를 배웠다. 그는 중국 산수화들을 바탕으로 일본 산수화 특유의 양식을 창안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천태종, 화엄종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로 화려하게 꽃핀다. 그러나 인도적인 사변은 이내 중국적인 직관으로 바뀌며, 당(唐)에 이르러 선불교가 도래한다. 육조(六祖)의 깨달음을 통해 선(禪)은 본격적으로 동북아 사유로 자리잡게 되고, 그뒤 조계종(曹溪宗), 조동종(曹洞宗), 임제종(臨濟宗) 등은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된다. 선불교는 인도의 형이상학적 불교와는 달리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원리에 따라 깊은 깨달음의 길을 걷게 된다.

일상적 삶에서 순간적 깨달음 얻어


불교는 자연주의와는 달리 본래부터 세계를 탈물질화시켜 사유한다. 나(我)는 식(識)의 총체이다. 이 식을 실체화하는 것이 아집(我執)이며, 이 아집을 해체해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해탈(解脫)이다. 여기에서 불교가 가는 한 길은 이 식의 구조를 비롯해 수많은 이론적 문제들을 파헤치는 교종(敎宗)의 길이다. 그러나 선불교는 언어를 사용한 무수히 번쇄한 논리들을 (칡넝쿨을 뜻하는) 갈등(葛藤)으로 보며, 이 말은 곧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들이 칡넝쿨처럼 사유를 얽히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선불교는 언어를 버리고 자잘한 일상적 삶에서 순간적인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불교는 철학에서 시로, 분석에서 직관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화두, 공안, 선문답, 선시, 선화 등이 등장하게 된다.

선의 세계는 익살의 세계이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자연주의 또는 유물론은 망치로 대지를 파 내려간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자(子)들’을 발견해내고 우리 삶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들을 그것들로 환원시킨다. 이와 대비적으로 날개를 단 형이상학(니체 이전의 형이상학)은 탈물질적인 세계로 현실 세계를 환원한다. 즉, 현실 세계를 초월 세계의 타락한 형태로 본다. 그러나 선불교는 삶의 표면에서 깨달음을 추구한다. 때문에 선은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보다 스토아적 익살에 더 가깝다.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가 ‘무지의 지’를 토대로 본질 세계로 상승해가는 기법이라면, 스토아적 익살은 현실 세계에서의 깨달음을 추구한다. 그래서 스토아 학파와 선불교는 공히 방망이를 사용하는 것이다.

13세기 전반부에 이르러 일본에 전래된 선불교는 일본 전역에 퍼져나갔으며(때때로 신도(神道)와 뒤섞였다), 선에 기반한 일본 특유의 문화들- 다도(茶道), 정원 조성, 서도, 무사도, 바둑 등등- 이 형성되었다. 선의 세계는 ‘고독한 빛’의 세계이다. 그것은 무한히 열린 세계에의 동경을 담고 있다. 선이 추구하는 무(無)와 공(空)은 수묵화의 여백을 통해 표현되었고, 순간적인 깨달음은 (그림과 글 모두에 있어) 해학적으로 그려진 선승들의 얼굴로 표현되었으며 굵고 강렬한 붓질로 그려졌다. 또 가녀린 붓질은 형이상학적 사유 특유의 정취를 담곤 했다.

고독한 빛은 열린 세계에 대한 동경

사진/ 물을 사용하지 않는 정원 가레산스이는 하얀 모래 공간을 조성해놓은 사원의 정원을 말한다. 모래만 깔린 이 공간은 선승으로 하여금 명상을 하고 마음을 비우는 경지로 나아가게 한다.
셋슈 도요(雪舟等楊, 1420∼1506)는 상국사(相國寺) 출신으로서, 나이 50이 되어 명(明)에 건너가는 예술적 집념을 보였다. 견실한 구도와 풍부한 현실감, 독특한 정취가 어우러진 그의 그림은 고독한 깨달음의 세계를 아스라이 드러낸다(그림). 화면을 가득 채운 안개는 삶의 신비를 말해주는 듯이 보이며, 먼 곳에서 그 꼭대기만 드러내고 있는 산들은 멀고도 먼 깨달음의 세계를 전달해준다. 두 인물은 서로 화두를 주고받는 듯이 이야기에 열중해 있고, 한 노인은 다리를 건너고 있다. 다리를 건너는 노인은 앙상한 나뭇가지들과 함께 깨달음의 길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를 드러내는 것 같다. 셋슈의 선화는 일본 수묵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으며 가노 모토노부(1476∼1559)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때때로 수묵화는 공안을 연상시키는 매우 짧은 시구들과 더불어 제작되었다. 압축적이고 암시적인 하이쿠(俳句)는 수묵화와 매우 잘 어울렸다. 승려이자 시인인 마쓰오 바쇼(1644∼94)는 공안이자 시인 그의 하이쿠를 수묵화와 함께 그림으로써 선적(禪的) 분위기를 특히 잘 연출하곤 했다.

오래된 연못이여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수묵화와 더불어 정원 조성은 일본 선불교 문화의 또다른 축을 이루었다. 가레산스이(枯山水)는 일본문화의 가장 독창적인 산물들 중 하나이다. 료안지, 다이토쿠지 등 여러 절들에서 볼 수 있는 가레산스이는 물과 나무가 없는 정원이다. 가레산스이는 모래로 구성된다. 승려들은 갈퀴로 늘 모래 바닥을 쓸어놓는다. 그 모래 위에 몇개의 작은 바위들은 놓인다. 하얀 모래의 펼쳐짐과 그 위에 섬처럼 떠 있는 작은 바위들은 마치 그 자체가 우주의 축소판인 것 같다(그림). 규모가 작은데도 가레산스이의 바닥을 보고 있으면 마치 우주의 적막 속에 홀로 떠 있는 느낌을 받으며, 공(空)을 직접 대하게 된다. 가끔씩 떠 있는 바위섬들은 깨달음의 나라인 듯이 느껴진다. 그러나 정원의 그 어디에 선다 해도 돌들을 한꺼번에 볼 수는 없다. 선의 세계는 열린 무한의 세계이며, 유한한 인간이 우주 전체를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본래 일본 정원에서 돌의 위치와 모양새는 극히 중요한 의미를 띤다. 자연적이기보다는 극단적으로 인공적인 일본문화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돌을 세우거나 눕히는 것, 돌을 세울 때의 방향, 돌들의 거리를 비롯한 모든 사항들이 모두 정교한 계산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부정하고 싶은, 부정할 수 없는

선은 형태의 저편을 추구한다. 가시적 형태의 세계는 분별지(分別智)의 세계이다. 선은 분별지의 세계를 넘어, 개체화된 세계를 넘어 불이(不二)의 차원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선의 세계를 그림으로, 건축으로, 조각으로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역설적인 측면을 띤다. 이 점에서 선의 예술은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우회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선승들을 종종 익살스럽게 현실적인 형태들을 무너뜨리곤 했으며, 항구불변의 것이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형태들을 지워버리곤 했다. 선화의 세계는 형태를 부정하면서도 형태로 그것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역설의 세계이다.

철학아카데미 원장 elandamour@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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