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운명을 관장하는 치밀한 군사전략…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의 승리
손무는 적이 나를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는 나의 방비태세에 달려 있고,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는 적에게 달려 있다고 했다. 문제는 아군만 쌍방의 역량을 파악하려 드는 게 아니라, 적군 또한 아군의 역량을 파악하려 들 것이라는 데 있다. 거꾸로 생각하면, 적군이 아군의 역량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건, 아군이 지극히 위태로운 처지에 빠졌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손자는 적군의 역량 파악 이상으로 아군의 역량을 철저히 감출 것을 요구한다.
“뛰어난 공격자는 적이 어느 곳을 방어해야 할지 알 수 없게 하고, 뛰어난 수비자는 적이 공격할 곳을 알지 못하게 한다. 은밀하고 은밀하여 마치 군사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지경에 이르도록 하고, 귀신같고도 귀신같아서 군사가 이동하더라도 바스락 소리 하나 없는 지경에 이르도록 하라. 그럼으로써 능히 적의 운명을 관장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善攻者, 敵不知其所守; 善守者, 敵不知其所攻. 微乎! 微乎! 至於無形, 神乎! 神乎! 至於無聲. 故能爲敵之司命. <虛實>)
이로운 환경에서 해로움을 생각하라
‘적의 운명을 관장하는 자’(敵之司命)가 되라는 손무의 요구는 사실 매우 섬뜩한 말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아군이 주도면밀하지 못해 군사 역량과 병력배치 상황 따위를 노출했을 때, 적군이 바로 우리의 사형집행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잘 싸우는 사람은 적을 부리지 적으로부터 부림을 당하지 아니한다.”(善戰者, 致人而不致於人. <虛實>) 결국 적의 역량을 파악하는 것 이상으로 나의 역량을 드러내지 않는 게 중요하다. 손무는 말한다. “적군의 배치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아군의 배치상황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 아군의 병력은 집중시킬 수 있지만 (아군이 어디에 군사를 배치했는지 모르는) 적군은 병력을 이곳저곳에 분산 배치하지 않을 수 없다. 아군의 병력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고 적군의 병력을 열곳으로 분산 배치하도록 하면, 이는 열배의 병력으로 분산된 적의 병력 하나를 치는 결과가 되어, 아군이 우위에 서고 적군이 열세에 빠지게 된다.”(故形人而我無形, 則我專而敵分; 我專爲一, 敵分爲十, 是以十攻其一也, 則我衆而敵寡. <虛實>) ‘적의 운명을 관장하는 자’가 되려면, 적의 병력규모, 배치상황과 더불어 전술까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거꾸로 아군의 병력규모와 배치상황은 물론 전술 또한 적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기밀을 유지해야 함은 물론이다. 손무는 전술에 관해 논한 장에서 “멀리 우회하는 길을 질러가는 길로 만들고, 어려운 환경을 유리한 조건으로 활용하는”(以迂爲直, 以患爲利. <軍爭>) 전술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선제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질러가는 길을 이용하는 건 적군도 뻔히 안다. 그렇다면 오히려 적이 예상치 못한 우회로를 이용하는 게 질러가는 길이 될 수도 있다. 또, 유리한 고지를 먼저 장악하려는 건 쌍방의 생각이 같을 수 있다. 그럴 때 불리한 지형을 유리한 조건으로 만들어 싸울 줄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손무는 말한다. “지혜로운 이의 사고는 반드시 이로움과 해로움의 양 측면을 함께 볼 줄 알아야 안다. 불리한 상황에 처해서는 동시에 그 안에 잠재해 있는 유리한 조건을 보아 승리할 가능성을 높일 것이며, 유리한 상황에 처해서는 동시에 그 안에 잠재해 있는 불리한 조건을 보아 위태로움을 피해가야 할 것이다.”(是故智者之慮, 必雜於利害. 雜於利, 而務可信也; 雜於害, 而患可解也. <九變>) 이 구절에 대해선 <손자>에 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석인 위무제 조조의 주석이 명쾌하다. 그는 단 여덟자의 주석을 달아놓았다. “이로운 환경에서는 해로움을 생각하고, 해로운 환경에서는 이로움을 생각하라.”(在利思害, 在害思利.) 여기서 상세히 논하지는 않겠지만, <논어>와 <노자>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손무의 사고가 공자·노자와 함께 상반상성(相反相成)의 논리를 공유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정공법과 변칙을 배합해 이기는 싸움을 사고가 여기까지 이르면 전쟁은 이제 고수들의 치밀한 전략 게임으로 변한다. 아군이 역량과 배치상황과 전술을 숨기려 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로 적군 또한 거짓 행동과 계략으로 역량과 배치상황과 전술을 숨기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적의 상황을 거꾸로 해석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손무는 말한다. “(적군이 보낸 사신이) 말은 공손히 하면서 군비를 더해가는 것은 곧 쳐들어오겠다는 뜻이요, 말을 함부로 하면서 병력을 전진배치하는 것은 후퇴하겠다는 뜻이요, 장비가 가벼운 기동부대가 앞서 나오고 주력부대가 양 측면에 포진하고 있는 것은 진지를 구축하겠다는 뜻이요, 아무 약정없이 강화를 청하는 것은 다른 모략을 쓰려는 것이요, 병졸들이 바삐 달리며 공격무기를 벌여놓는 것은 공격에 대비하는 것이요, 반쯤 앞으로 나왔다가 반쯤 물러나길 되풀이하는 것은 아군을 유인하는 것이다.”(辭卑而益備者, 進也; 辭强而進驅者, 退也; 輕車先出居其側者, 陳也; 無約而請和者, 謀也; 奔走而陳兵者, 期也; 半進半退者, 誘也. <行軍>) 적군 또한 아군의 행동을 거꾸로 해석할 수 있으므로, 뻔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위장행동은 도리어 내심을 드러내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 본래 의도와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여기까지 이르면 게임은 이제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손무는 상황에 따라 정공법과 변칙을 섞어 쓸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무릇 작전이란 정공법으로써 대처하고 변칙전술로써 승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칙을 잘 구사하는 사람은 그 계략이 하늘과 땅의 변화만큼 다함이 없으며 장강의 강물처럼 마르지 않는다. (…) 작전의 형식은 정공법과 변칙공격의 두 가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공법과 변칙공격의 변화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변칙공격과 정공법이 서로를 낳는 것은 꼬리를 맞물고 도는 고리처럼 끝이 없으니 누가 능히 그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凡戰者, 以正合, 以奇勝. 故善出奇者, 無窮如天地, 不渴如江河. … 戰勢不過奇正, 奇正之變, 不可勝窮也. 奇正相生, 如循環之無端, 孰能窮之? <勢>) 군사투쟁에서 참모의 사유 수준이 이 정도에 이르렀을 때, 쌍방간의 전투가 쉽게 벌어질 리 없다.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기 전에는 선제공격을 감행하는 게 유리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둑을 잘 두는 고수들의 대국에서, 대마의 생사를 건 싸움이 쉽게 벌어지지 않는 것과 사정이 거의 같다. 바둑을 둘 때, 자신과 상대방의 역량을 가늠하지 않고 적진에 뛰어들거나 함부로 싸움을 거는 건 하수들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대륙 학자들은 이를 이른바 ‘군사변증법 사상’이라 부르는데, 이 또한 여기서 검토할 겨를은 없으므로 넘어가기로 하자. 이처럼 전쟁이 고수들의 고차원적인 두뇌 게임으로 전화할 즈음, 손무는 더 놀라운 주장을 내놓았다. 그것은, 피 흘리는 유혈투쟁 대신 싸우지 않고 전쟁의 승패를 결판 짓는 게 최선이라는 주장이었다. 손무의 말을 들어보자. “무릇 군사를 쓰는 법에서 나라를 온전하게 두고 삼키는 것이 최선이며, 나라를 깨부수는 것은 그 다음이다. 군단을 온전하게 삼키는 것이 최선이며, 군단을 깨부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여단을 온전하게 삼키는 것이 최선이며, 여단을 깨부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일개 중대를 온전하게 삼키는 것이 최선이며, 중대를 깨부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일개 소대를 온전하게 삼키는 것이 최선이며, 소대를 깨부수는 것은 그 다음이다.”(凡用兵之法, 全國爲上, 破國次之; 全軍爲上, 破軍次之; 全旅爲上, 破旅次之; 全卒爲上, 破卒次之; 全伍爲上, 破伍次之. <謀攻>) 백번 싸워 백번 이겨도 최선 아니다 손무의 군사사상은 결국 이처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런 결론은 사실은 중국 사상사에서 그렇게 낯선 건 아니다. 가령 <갈관자>란 책에는 중국의 전설적인 명의 편작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느날 그는 괵나라의 공자가 가사상태에 빠졌을 때 그를 살려냈다. 괵나라 사람들이 그를 명의라고 떠받들자 그는 자신보다 자신의 형들이 훨씬 명의라고 말한다. 첫째 형은 병이 아예 발생하기 전에 예방을 한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로부터 뛰어나다는 얘기를 듣는 법이 없다. 둘째 형은 병이 드러나기 시작할 즈음 근본적인 치료를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가 뛰어난 명의인지 모른다. 셋째인 편작은 병이 사람들에게 인식될 때 비로소 치료를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편작이 세상에서 최고의 명의인 줄 안다. 전쟁에 관한 손무의 사상은 <갈관자>에 나오는 명의에 관한 사고와 완전히 일치한다. 이는 중국적 사유의 한 가지 특질을 이루는 부분이다. 평화연구자 요한 갈퉁이 손무를 인류 최초의 평화주의자라고 지목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손무는 심지어 백전백승이 최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은 최선이 아니요, 싸우지 않고 적을 굽히는 것이 좋은 것 가운데 좋은 것이다.”(<謀攻>) xuande@hanmail.net

일러스트레인션/ 김성희
‘적의 운명을 관장하는 자’(敵之司命)가 되라는 손무의 요구는 사실 매우 섬뜩한 말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아군이 주도면밀하지 못해 군사 역량과 병력배치 상황 따위를 노출했을 때, 적군이 바로 우리의 사형집행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잘 싸우는 사람은 적을 부리지 적으로부터 부림을 당하지 아니한다.”(善戰者, 致人而不致於人. <虛實>) 결국 적의 역량을 파악하는 것 이상으로 나의 역량을 드러내지 않는 게 중요하다. 손무는 말한다. “적군의 배치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아군의 배치상황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 아군의 병력은 집중시킬 수 있지만 (아군이 어디에 군사를 배치했는지 모르는) 적군은 병력을 이곳저곳에 분산 배치하지 않을 수 없다. 아군의 병력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고 적군의 병력을 열곳으로 분산 배치하도록 하면, 이는 열배의 병력으로 분산된 적의 병력 하나를 치는 결과가 되어, 아군이 우위에 서고 적군이 열세에 빠지게 된다.”(故形人而我無形, 則我專而敵分; 我專爲一, 敵分爲十, 是以十攻其一也, 則我衆而敵寡. <虛實>) ‘적의 운명을 관장하는 자’가 되려면, 적의 병력규모, 배치상황과 더불어 전술까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거꾸로 아군의 병력규모와 배치상황은 물론 전술 또한 적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기밀을 유지해야 함은 물론이다. 손무는 전술에 관해 논한 장에서 “멀리 우회하는 길을 질러가는 길로 만들고, 어려운 환경을 유리한 조건으로 활용하는”(以迂爲直, 以患爲利. <軍爭>) 전술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선제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질러가는 길을 이용하는 건 적군도 뻔히 안다. 그렇다면 오히려 적이 예상치 못한 우회로를 이용하는 게 질러가는 길이 될 수도 있다. 또, 유리한 고지를 먼저 장악하려는 건 쌍방의 생각이 같을 수 있다. 그럴 때 불리한 지형을 유리한 조건으로 만들어 싸울 줄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손무는 말한다. “지혜로운 이의 사고는 반드시 이로움과 해로움의 양 측면을 함께 볼 줄 알아야 안다. 불리한 상황에 처해서는 동시에 그 안에 잠재해 있는 유리한 조건을 보아 승리할 가능성을 높일 것이며, 유리한 상황에 처해서는 동시에 그 안에 잠재해 있는 불리한 조건을 보아 위태로움을 피해가야 할 것이다.”(是故智者之慮, 必雜於利害. 雜於利, 而務可信也; 雜於害, 而患可解也. <九變>) 이 구절에 대해선 <손자>에 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석인 위무제 조조의 주석이 명쾌하다. 그는 단 여덟자의 주석을 달아놓았다. “이로운 환경에서는 해로움을 생각하고, 해로운 환경에서는 이로움을 생각하라.”(在利思害, 在害思利.) 여기서 상세히 논하지는 않겠지만, <논어>와 <노자>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손무의 사고가 공자·노자와 함께 상반상성(相反相成)의 논리를 공유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정공법과 변칙을 배합해 이기는 싸움을 사고가 여기까지 이르면 전쟁은 이제 고수들의 치밀한 전략 게임으로 변한다. 아군이 역량과 배치상황과 전술을 숨기려 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로 적군 또한 거짓 행동과 계략으로 역량과 배치상황과 전술을 숨기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적의 상황을 거꾸로 해석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손무는 말한다. “(적군이 보낸 사신이) 말은 공손히 하면서 군비를 더해가는 것은 곧 쳐들어오겠다는 뜻이요, 말을 함부로 하면서 병력을 전진배치하는 것은 후퇴하겠다는 뜻이요, 장비가 가벼운 기동부대가 앞서 나오고 주력부대가 양 측면에 포진하고 있는 것은 진지를 구축하겠다는 뜻이요, 아무 약정없이 강화를 청하는 것은 다른 모략을 쓰려는 것이요, 병졸들이 바삐 달리며 공격무기를 벌여놓는 것은 공격에 대비하는 것이요, 반쯤 앞으로 나왔다가 반쯤 물러나길 되풀이하는 것은 아군을 유인하는 것이다.”(辭卑而益備者, 進也; 辭强而進驅者, 退也; 輕車先出居其側者, 陳也; 無約而請和者, 謀也; 奔走而陳兵者, 期也; 半進半退者, 誘也. <行軍>) 적군 또한 아군의 행동을 거꾸로 해석할 수 있으므로, 뻔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위장행동은 도리어 내심을 드러내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 본래 의도와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여기까지 이르면 게임은 이제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손무는 상황에 따라 정공법과 변칙을 섞어 쓸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무릇 작전이란 정공법으로써 대처하고 변칙전술로써 승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칙을 잘 구사하는 사람은 그 계략이 하늘과 땅의 변화만큼 다함이 없으며 장강의 강물처럼 마르지 않는다. (…) 작전의 형식은 정공법과 변칙공격의 두 가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공법과 변칙공격의 변화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변칙공격과 정공법이 서로를 낳는 것은 꼬리를 맞물고 도는 고리처럼 끝이 없으니 누가 능히 그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凡戰者, 以正合, 以奇勝. 故善出奇者, 無窮如天地, 不渴如江河. … 戰勢不過奇正, 奇正之變, 不可勝窮也. 奇正相生, 如循環之無端, 孰能窮之? <勢>) 군사투쟁에서 참모의 사유 수준이 이 정도에 이르렀을 때, 쌍방간의 전투가 쉽게 벌어질 리 없다.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기 전에는 선제공격을 감행하는 게 유리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둑을 잘 두는 고수들의 대국에서, 대마의 생사를 건 싸움이 쉽게 벌어지지 않는 것과 사정이 거의 같다. 바둑을 둘 때, 자신과 상대방의 역량을 가늠하지 않고 적진에 뛰어들거나 함부로 싸움을 거는 건 하수들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대륙 학자들은 이를 이른바 ‘군사변증법 사상’이라 부르는데, 이 또한 여기서 검토할 겨를은 없으므로 넘어가기로 하자. 이처럼 전쟁이 고수들의 고차원적인 두뇌 게임으로 전화할 즈음, 손무는 더 놀라운 주장을 내놓았다. 그것은, 피 흘리는 유혈투쟁 대신 싸우지 않고 전쟁의 승패를 결판 짓는 게 최선이라는 주장이었다. 손무의 말을 들어보자. “무릇 군사를 쓰는 법에서 나라를 온전하게 두고 삼키는 것이 최선이며, 나라를 깨부수는 것은 그 다음이다. 군단을 온전하게 삼키는 것이 최선이며, 군단을 깨부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여단을 온전하게 삼키는 것이 최선이며, 여단을 깨부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일개 중대를 온전하게 삼키는 것이 최선이며, 중대를 깨부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일개 소대를 온전하게 삼키는 것이 최선이며, 소대를 깨부수는 것은 그 다음이다.”(凡用兵之法, 全國爲上, 破國次之; 全軍爲上, 破軍次之; 全旅爲上, 破旅次之; 全卒爲上, 破卒次之; 全伍爲上, 破伍次之. <謀攻>) 백번 싸워 백번 이겨도 최선 아니다 손무의 군사사상은 결국 이처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런 결론은 사실은 중국 사상사에서 그렇게 낯선 건 아니다. 가령 <갈관자>란 책에는 중국의 전설적인 명의 편작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느날 그는 괵나라의 공자가 가사상태에 빠졌을 때 그를 살려냈다. 괵나라 사람들이 그를 명의라고 떠받들자 그는 자신보다 자신의 형들이 훨씬 명의라고 말한다. 첫째 형은 병이 아예 발생하기 전에 예방을 한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로부터 뛰어나다는 얘기를 듣는 법이 없다. 둘째 형은 병이 드러나기 시작할 즈음 근본적인 치료를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가 뛰어난 명의인지 모른다. 셋째인 편작은 병이 사람들에게 인식될 때 비로소 치료를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편작이 세상에서 최고의 명의인 줄 안다. 전쟁에 관한 손무의 사상은 <갈관자>에 나오는 명의에 관한 사고와 완전히 일치한다. 이는 중국적 사유의 한 가지 특질을 이루는 부분이다. 평화연구자 요한 갈퉁이 손무를 인류 최초의 평화주의자라고 지목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손무는 심지어 백전백승이 최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은 최선이 아니요, 싸우지 않고 적을 굽히는 것이 좋은 것 가운데 좋은 것이다.”(<謀攻>) xuande@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