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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결사항전은 능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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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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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싸움을 위한 다섯 가지 평가기준… 아군의 승리 조건은 적군에 달려 있어

이상수의 동서횡단 46 / 손자의 전쟁과 평화(3)

일러스트레이션/ 김성희
손무가 적과 아군의 역량을 평가하기 위해 제시한 기준은 다섯 가지다. 그것은 “첫째는 길이요, 둘째는 하늘이요, 셋째는 땅이요, 넷째는 장수요, 다섯째는 법이다.”

손자가 말하는 ‘길’이란 “백성으로 하여금 지도자와 뜻을 같이하도록 하여, 생사를 함께하되, 백성들이 이를 위태롭게 여기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생사를 함께하되 이를 위태롭다 여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강압이나 술수로써 가능한 건 아니다. 그래서 현대의 손자 연구자인 궈화뤄는 길(道)을 ‘정치’라 옮기기도 했다. 결국 국내 정치상황이 어떠한가가 전쟁을 치를 만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란 얘기다. 손무가 단순히 ‘군사기술’에만 매달린 전쟁기술자가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1972년 출토된 인취에산 죽간에는 손무가 오왕 합려와 나눈 대화가 담긴 <오왕문>(吳王問)이란 글이 포함돼 있다. 여기서 손무는 진나라의 정치를 평해달라는 오왕 합려의 말에 답하면서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군사를 적게 하는”(富民少士) 정책을 실행하면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자신 군사 지도자이면서 군비확충 대신 군사를 줄이라고 건의하는 데서 손무의 사상이 단순한 전쟁기술에 관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건 군비나 병졸의 수가 아니라 결국 ‘국내 정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하늘’이란, 낮과 밤, 추위와 더위 등 전쟁을 치를 때 맞이하는 계절과 기후조건 등을 말한다. 낮에 싸우느냐 밤에 싸우느냐, 폭염 속에서 싸우느냐 엄동설한을 이겨내야 하느냐 따위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주요한 요인의 하나라고 손무는 본 것이다. 셋째 ‘땅’이란 전쟁을 치를 전장이 “고원지대인가 저지대인가, 본국에서 먼 곳인가 가까운 곳인가, 험한 지형인가 평탄한가, 광활한 지역인가 협소한 곳인가, 삶의 땅인가 죽음의 땅인가”를 말한다. 넷째 ‘장수’란 군사 지도자가 지략, 미더움, 어짊, 용기, 엄중함 등의 덕을 갖추었는가이다. 다섯째 ‘법’이란 “군사조직의 편제, 지휘 신호와 복무 규정, 보급루트·군수물자·군비의 관리” 등을 말한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나서라

손무는 이 다섯 가지 평가기준에 더해 다시 이렇게 부연한다. 전쟁당사국 가운데 “어느 임금이 길을 제대로 가고 있으며, 장수는 어느 쪽이 더 유능하며, 천시와 지리는 어느 쪽에 더 유리하며, 법령은 어느 쪽이 제대로 행해지고 있으며, 병사는 어느 쪽이 더 강하며, 군사는 어느 쪽이 더 잘 훈련되었으며, 상벌은 어느 쪽이 더 분명한가를 살펴보라. 나는 이로써 전쟁의 승패를 안다.”(主孰有道? 將孰有能? 天地孰得? 法令孰行? 兵衆孰强? 士卒孰練? 賞罰孰明? 吾以此知勝負矣. <計>) 여기서 손무는 정치 지도자(主), 군사 지도자(將), 천시와 지리, 법령 등 다섯 가지 판단기준 이외에 병사의 강함과 훈련 정도, 상벌 등 세 가지 조건을 더 들고 있다.

손무는 이런 다섯 가지(또는 여덟 가지)의 판단기준을 바탕으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설 때에만 전쟁에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전쟁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확보할 수 없는 이득이나 목표가 있을 때에 한해서 얘기다. 이렇게 적과 아군의 역량을 셈한 뒤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손무는 말한다. “군사를 쓰는 법은 이렇다. 우리 군사가 적군의 열배라면 포위 공격할 것이요, 다섯배라면 정면 공격할 것이요, 두배라면 적을 분산시킨 뒤 칠 것이요, 병졸의 수가 대등하다면 계책을 써서 싸울 것이요, 병력이 적다면 물러날 것이요, 맞서싸우기가 어렵다는 판단이 서면 피해야 할 것이다. 적은 병력으로 끝까지 버티려 든다면 강대한 적군의 포로가 될 뿐이다.”(<謀攻>) 이 발언을 보면 손무가 얼마나 조심스런 사람인지 드러난다. 적을 공격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다섯배 이상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지녀야 한다. 포위 공격이라는 전면적인 공격을 펴려면 열배는 돼야 한다. 이런 판단은 오늘날 군사 전문가들의 분석과도 일치한다. 흔히 침략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3배 이상의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공격이 방어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의 예에서 우리는 군사력이 10배가 넘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결국 마음대로 하지 못했음을 본 적이 있다. 적의 역량보다 두배의 군사력을 지녔더라도, 적을 잘게 나눠 분산시킨 뒤 각개격파하라고 손무는 말한다. 적과 군사력이 대등할 때는, ‘붙어보자’가 아니라 ‘계책’을 써서 아군을 강화하고 적군을 약화시킨 뒤 다음 행동을 취해야 한다. “적이 늘어지게 쉬고 있으면 피곤하게 만들 수 있고, 배불러 퍼져 있으면 굶주리게 만들 수 있고, 편안하게 있으면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수 있다”(敵佚能勞之, 飽能飢之, 安能動之. <虛實>)는 말은, 적과 아군의 역량이 대등할 때 균형을 깨뜨리기 위한 ‘계책’의 사례라 할 수 있다. 병력이 적거나 싸움이 안 될 거라는 판단이 들 땐 가차없이 물러나고 피해서 아군의 역량을 보존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적군을 무력화하고 아군을 강화하는 계책

실전에서 손무의 충고를 가장 충실하게 따랐던 이는 바로 마오쩌둥이다. 만약 그가 1927∼35년 사이에 정강산이나 후난성의 해방구를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 노선을 택했다면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병력이나 군장비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였던 국민당군에 맞서 마오가 ‘땅’을 포기하는 대신 ‘민심’을 얻기 위해 주력하고, 국민당군은 분산시키고 해방군의 역량은 집중해 공격했으며, 군사역량 보존을 위해 후난에서 옌안에 이르기까지 ‘대장정’이란 그럴듯한 이름이 붙은 ‘삼십육계’를 선택한 것은 손무의 충고를 충실하게 따른 것이었다.

손무의 가르침의 핵심은,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이 불을 보듯 분명할 때에만 싸우라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예로부터 이른바 잘 싸우는 사람의 승리는 이기기 쉬운 적을 이기는 것이다.”(故之所謂善戰者勝, 勝易勝者也. <形>) “이기는 군대의 싸우는 모습이란, 마치 천길 골짝을 막아 가둬두었던 물을 터놓아 쏟아져내리게 하는 것과 같으니, 이를 형세라 하는 것이다.”(勝者之戰民也, 若決積水於千 之豁者, 形也. <形>) 우리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이길 수 없는 적을 불요불굴의 투지와 정신력으로 극복해내는 영웅의 모습을 보길 원한다. 그러나 손무의 사전에 그런 불확실한 싸움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이기기 쉬운 적’을 이기는 게 잘 싸우는 사람이란 손무의 말에서 어떤 허탈감을 느낄 ‘용사’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그만큼 손무는 전쟁을 ‘장난’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이런 다섯 가지 판단기준으로 적과 아군의 역량을 비교한 뒤, 군사 지도자는 적어도 네 가지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것은, 아군이 공격능력을 갖췄는가, 아군은 적의 공격을 막아낼 준비가 돼 있는가, 적군은 아군을 공격할 능력을 갖췄는가, 적군은 아군의 공격을 막아낼 준비가 돼 있는가 등이 그것이다. 손무는 이렇게 말한다. “아군이 공격능력이 있다는 것만 알고, 적이 공격당할 만한 허점이 없다는 것을 모르면 이길 가능성은 절반이다. 적이 공격당할 만한 허점이 있다는 것만 알고, 아군이 공격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을 모른다면 역시 이길 가능성은 절반이다.”(知吾卒之可以擊, 而不知敵之不可擊, 勝之半也; 知敵之可擊, 而不知吾卒之不可以擊, 勝之半也. <地形>) 결국은 아군이 공격능력을 갖추고 있고, 적군은 방어태세를 제대로 갖추고 있어야 비로소 공격의 조건이 마련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한 건 아니다. 손무는 다시 말한다. “적이 공격당할 만한 허점이 있다는 것도 알고, 아군에 적을 공격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지형이 싸우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역시 승리할 가능성은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知敵之可擊, 知吾卒之可以擊, 而不知地形之不可以戰, 勝之半也. <地形>)

아무리 공격능력을 갖추고 있을지라도…

손무가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고 했을 때 위의 판단기준에 대해 완벽한 정보를 가져야 함을 말한 것이다. 손무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전쟁에서 쌍방 당사자의 상호의존성이다. 아군이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손무는 이렇게 말한다. “옛날 전쟁에 능한 사람은 먼저 적이 아군을 이길 수 없도록 방비를 갖춘 뒤, 적의 허점이 노출되기를 기다렸다. 적이 이길 수 없도록 방비를 갖추는 일은 아군의 책임이지만, 아군이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는 적군에 달려 있다.”(昔之善戰者, 先爲不可勝, 以待敵之可勝. 不可勝在己, 可勝在敵. <形>) 아군 승리의 조건이 적군에 달려 있다는 발언은 세계 군사사상의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냉철한 통찰이 아닌가 한다.

한국처럼 자본의 공공성에 대한 자각이 낙후한 나라에서 일개 정당의 정책위 의장이란 인물이 국가의 복지정책을 “사회주의적”이라 밀어붙이는 ‘막가파’식 정치가 지배하는 사회에 살면서, 끔찍하리만치 치밀한 사고로 ‘투쟁의 과학’을 정리해내고 있는 <손자>를 읽는 일은 차라리 괴로운 일에 속한다.

xuand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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