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수의 동서횡단 45 / 손자의 전쟁과 평화(2)
“어떤 공식을 미리 만들어 전해줄 수는 없다”(不可先傳也.)는 발언은 이미 익숙한 사유일 것이다. 공자는 이런 발언을 남겼다. “된사람은 하늘아래 일을 하면서 죽어도 이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법이 없고, 또 이렇게 해서는 죽어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법도 없다. 다만 마땅함을 따를 뿐이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里仁> 10) 공자에게 어떤 올바름이나 마땅함이란 미리 정해진 원리가 아니다. 구체적인 실제상황에 들어가 부닥쳤을 때 거기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손자가 군사행동에서 다양한 임기응변의 예를 들면서도 “어떤 공식을 미리 만들어 전해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위에 인용한 공자의 태도와 통한다. 전에 한번 인용한 적이 있지만, 이런 사유는 <주역>의 점괘를 “교과서로 삼아서는 안 된다”(不可爲典要)고 한 <계사전>의 사유와도 통한다. 고대 중국의 철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런 태도는 인간의 이성에 의지해 ‘원리’나 ‘이상’을 미리 만들어 표준으로 삼는 서양 철인들과는 다른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임기응변의 전술만 익히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손자는 미리 정해진 어떤 원리를 가지고 세상을 재단하는 일에는 반대했지만, 사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일까지 포기한 건 아니었다. 그는, 주로 전쟁과 관련한 발언이지만,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최선을 다해 사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래야 임기응변도 가능해진다. 앞서 지적했듯 그는 임금이나 군사 책임자가 일순간 감정의 동요 때문에 경솔하게 군사를 일으키거나 선제공격을 하는 사태를 크게 경계했다. 전쟁이란 기본적으로 사람이 죽고 생산시설이 파괴되는 해로운 일이므로 신중히 판단해야 할 것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손자는 말한다. “대저 전쟁을 오래 끌어 나라를 이롭게 한 경우는 지금까지 있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군사행동의 해로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군사행동의 이로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는 법이다.”(夫兵久而國利者, 未之有也. 故不盡知用兵之害者, 則不能盡知用兵之利也. <作戰>) 전쟁을 벌이기 전에는 먼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해득실이 어떠할 것인지 분명한 판단이 서야 하고, 적의 역량과 아군의 역량을 비교해 보아 승리할 수 있겠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서야 한다. 그는 이를 ‘묘산(廟算)’이라 불렀다. 묘산이란 고대 중국에서 전쟁에 나가기 전에 조상의 사당 앞에서 일정한 의식을 거행한 뒤 작전과 계략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손자는 이 묘산에서 승패가 이미 결정된다고 보았다. “무릇 싸움을 벌이기 전에 묘산을 해보아 이길 셈이 있으면 승리할 조건이 많은 것이고, 싸움을 벌이기 전에 묘산을 해보아 이길 셈이 없으면 승리할 가능성이 적은 것이다.”(夫未戰而廟算勝者, 得算多也; 未戰而廟算不勝者, 得算少也. <計>) 묘산에서 적의 역량과 아군의 역량을 정확히 비교할 수 있다면 이 싸움을 벌여야 할 것인지 피해가야 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묘산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적에 대한 사전정보가 충실하다는 뜻이다. 그만큼 준비된 군사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묘산조차 제대로 안 된다면 그런 군사는 주먹구구로 셈하면서 ‘일단 한번 붙고 보자’는 막무가내랄 수 있다. 그런 군사가 승리를 거둘 가능성은 희박할 수밖에 없다.
간첩을 쓰는 다섯 가지의 방법
손무는 묘산을 할 때 객관적인 분석과 실제 조사를 통한 사실 자료를 바탕으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귀신이나 점, 별자리 따위의 미신에 의존하거나 요행을 바라선 안 된다. 손무는 이렇게 말한다. “밝은 임금과 현명한 장수가 전장에 나아가면 반드시 승리를 거두고 여느 사람들보다 뛰어난 공을 이루는 까닭은 그들이 (적의 상황을) 먼저 알기 때문이다. 먼저 아는 것은 귀신에게 빌려서 가능한 게 아니고, 다른 일을 미뤄 유추해 아는 것도 아니며, 별자리 따위를 헤아려 아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사람으로부터 취하여 적의 실정을 아는 것이다.”(明君賢將, 所以動而勝人, 成功出於衆者, 先知也. 先知者不可取於鬼神, 不可象於事, 不可驗於度, 必取於人, 知敵之情者也. <用間>)
“사람으로부터 취하여 적의 실정을 안다”는 건 무슨 뜻일까. 스파이를 보내 적의 실정을 구체적으로 정탐하여 파악하라는 말이다. 위의 인용문은 <손자>의 마지막 편인 13편 ‘<용간>(用間)에 나오는 얘기다. ‘용간’이란 바로 “간첩을 쓰는 법”에 관해 서술한 장이다. 손무는 간첩에 관해 전문적인 글 한편을 쓸 정도로 이 문제를 중시했다. 적과 아의 역량을 대충 어림짐작하거나, 막연히 ‘정신력’ 따위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간첩을 보내 눈으로 직접 적의 군장비와 사기와 전투태세를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손무는 이처럼 철저하게 관념을 배격하고 실사구시를 추구한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위의 인용문 바로 다음에 손무는 다섯 가지 종류의 스파이 공작에 대해 논한다. “간첩을 쓰는 방법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향간(鄕間)이요, 둘째는 내간(內間)이요, 셋째는 반간(反間)이요, 넷째는 사간(死間)이요, 다섯째는 생간(生間)이다.” 향간이란 적국의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을 간첩으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고정간첩’이라 할 수 있다. 내간이란 적국의 관료조직 안에서 포섭한 간첩을 말한다. 고위직일수록 고급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임은 물론이다. 반간이란 적의 간첩을 역이용하여 이중간첩으로 이용하거나 허위정보를 수집해 돌아가도록 하는 공작을 말한다. 사간이란 적에게 허위정보를 주고 죽임을 당하는 간첩을 말한다. 치명적인 허위보고이므로 죽을 각오를 하고 간첩행위를 하는 것이기에 손무는 이를 ‘사간’(死間)이라고 불렀다. 생간이란 적정을 정탐한 뒤 살아돌아와 보고하는 간첩을 말한다.
간첩공작은 적의 실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수단이므로 손무는 이를 매우 중시했다. “군사전략 가운데 가장 친밀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 바로 간첩공작이며, 보상이 가장 후한 것도 바로 간첩공작이며, 가장 기밀을 유지해야 하는 일 또한 간첩공작이다. 주도면밀한 지혜가 아니면 간첩을 능숙하게 쓸 수 없고, 어진 장수가 아니면 간첩을 부릴 수 없으며, 미묘하지 않으면 간첩으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없다. 묘하다! 묘하다! 어떠한 경우에도 간첩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用間>)
현대 첩보전은 손무에서 비롯되었다
춘추 말기의 군사전략가 손무가 간첩에 대해 이토록 상세한 정보와 공작방식을 정리하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 춘추 시기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춘추좌전>에는 이미 각 제후국들이 광범위하게 간첩을 이용해 첩보전을 벌였음을 알 수 있는 사례들이 더러 나온다. 가령 장공 28년에는 “간첩이 돌아와 보고하기를…”(諜告曰…) 하는 구절이 나오고, 장공 8년과 희공 25년의 기사에도 ‘첩’(諜) 또는 ‘간’(間)을 파견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은 손무의 분류에 따르면 살아돌아와 적정을 보고하는 ‘생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간의 사례는 손무 이전의 역사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사간’의 사례는 <사기·역생이기열전>에 실려 있다. 초한전쟁 때 유방은 제나라를 칠 때 역이기를 보내 거짓 항복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한신이 제나라를 급습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제왕은 역이기를 가마솥에 넣어 삶아버렸다. 사간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손무가 활동하던 시기로부터 200년쯤 지난 상황이다. 이를 보더라도 손무란 인물이 얼마나 탁월한 군사전략가인지 알 수 있다.
이렇게 실사구시를 통해 얻은 정보가 있어야 적의 역량과 나의 역량을 비교할 수 있다. 손무는 적과 아의 역량을 비교하는 다섯 가지 틀을 제시한다.
xuande@hanmail.net
승리를 보장하는 손무의 묘산 방법… 실제 자료에 근거해 적의 실체 파악 손무는 “군사행동이란 속임수”(兵者, 詭道也. <計>)라고 잘라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능하면서 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하고, 쓸 것이면서 쓰지 않을 것처럼 보이도록 하고, 가까우면서 먼 것처럼 보이도록 하고, 멀면서 가까운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이로움을 보여 적을 유인하고, 적진을 어지럽힌 뒤에 삼킨다. 적군의 역량이 충실하면 방비하고, 강하면 정면충돌을 피한다. 적이 격노하면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적에게 굽히고 들어가 적을 기고만장하도록 만든다. 적이 휴식을 취하고 있으면 건드려 피곤하게 만들고, 단결이 잘 되어 있으면 이간질을 시킨다. 무방비 상태인 곳을 찾아 공격해야 하며, 꿈에도 상상 못한 때에 병력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군사행동에서 승리하는 길이다. 그러나 그 때의 상황에 맞도록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지, 어떤 공식을 만들어 미리 전해줄 수는 없다”.(<計>) 임기응변의 전술은 승리 가능성 희박
“어떤 공식을 미리 만들어 전해줄 수는 없다”(不可先傳也.)는 발언은 이미 익숙한 사유일 것이다. 공자는 이런 발언을 남겼다. “된사람은 하늘아래 일을 하면서 죽어도 이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법이 없고, 또 이렇게 해서는 죽어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법도 없다. 다만 마땅함을 따를 뿐이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里仁> 10) 공자에게 어떤 올바름이나 마땅함이란 미리 정해진 원리가 아니다. 구체적인 실제상황에 들어가 부닥쳤을 때 거기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손자가 군사행동에서 다양한 임기응변의 예를 들면서도 “어떤 공식을 미리 만들어 전해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위에 인용한 공자의 태도와 통한다. 전에 한번 인용한 적이 있지만, 이런 사유는 <주역>의 점괘를 “교과서로 삼아서는 안 된다”(不可爲典要)고 한 <계사전>의 사유와도 통한다. 고대 중국의 철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런 태도는 인간의 이성에 의지해 ‘원리’나 ‘이상’을 미리 만들어 표준으로 삼는 서양 철인들과는 다른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임기응변의 전술만 익히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손자는 미리 정해진 어떤 원리를 가지고 세상을 재단하는 일에는 반대했지만, 사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일까지 포기한 건 아니었다. 그는, 주로 전쟁과 관련한 발언이지만,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최선을 다해 사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래야 임기응변도 가능해진다. 앞서 지적했듯 그는 임금이나 군사 책임자가 일순간 감정의 동요 때문에 경솔하게 군사를 일으키거나 선제공격을 하는 사태를 크게 경계했다. 전쟁이란 기본적으로 사람이 죽고 생산시설이 파괴되는 해로운 일이므로 신중히 판단해야 할 것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손자는 말한다. “대저 전쟁을 오래 끌어 나라를 이롭게 한 경우는 지금까지 있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군사행동의 해로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군사행동의 이로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는 법이다.”(夫兵久而國利者, 未之有也. 故不盡知用兵之害者, 則不能盡知用兵之利也. <作戰>) 전쟁을 벌이기 전에는 먼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해득실이 어떠할 것인지 분명한 판단이 서야 하고, 적의 역량과 아군의 역량을 비교해 보아 승리할 수 있겠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서야 한다. 그는 이를 ‘묘산(廟算)’이라 불렀다. 묘산이란 고대 중국에서 전쟁에 나가기 전에 조상의 사당 앞에서 일정한 의식을 거행한 뒤 작전과 계략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손자는 이 묘산에서 승패가 이미 결정된다고 보았다. “무릇 싸움을 벌이기 전에 묘산을 해보아 이길 셈이 있으면 승리할 조건이 많은 것이고, 싸움을 벌이기 전에 묘산을 해보아 이길 셈이 없으면 승리할 가능성이 적은 것이다.”(夫未戰而廟算勝者, 得算多也; 未戰而廟算不勝者, 得算少也. <計>) 묘산에서 적의 역량과 아군의 역량을 정확히 비교할 수 있다면 이 싸움을 벌여야 할 것인지 피해가야 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묘산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적에 대한 사전정보가 충실하다는 뜻이다. 그만큼 준비된 군사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묘산조차 제대로 안 된다면 그런 군사는 주먹구구로 셈하면서 ‘일단 한번 붙고 보자’는 막무가내랄 수 있다. 그런 군사가 승리를 거둘 가능성은 희박할 수밖에 없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성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