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수의 동서횡단 44 / 손자의 전쟁과 평화(1)
전쟁의 본질을 꿰뚫은 손무의 군사사상… 객관적 분석으로 위태로움 피하는 전략 수립
요한 갈퉁이란 학자가 있다. 그는 몇 안 되는 ‘평화학’ 연구자다. 그의 노트북엔 세계 주요 분쟁지역의 이슈와 역사와 쟁점과 해결방안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남북한이 포함돼 있는 건 물론이다. 그가 지난 1997년 한국에 왔을 때, 평화학이란 이 독특한 학문의 창시자로 누구를 꼽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뜻밖에도 그는 고대 중국의 손자(孫子)를 들었다. 손자라면 ‘병법’(兵法)으로 유명한 인물인데, 전쟁을 연구한 이가 어떻게 평화학의 선구자일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갈퉁은 이렇게 말했다. “손자는 전쟁을 연구했지만,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평화학의 창시자로 꼽을 만하다.”
우리가 고대 중국인의 사유양식을 살펴보기 위해 마지막으로 검토할 인물은 바로 손자다. 그는 중국 춘추·전국시기에 벌어진 거대한 논쟁에서 좀 외따로 떨어져 있는 듯 보인다. 그의 사상은 사람의 생사와 국가의 존망이 갈리는 치명적이고 격렬한 군사적 충돌의 한가운데서 나왔다. 그럼에도 그의 사유에서도 고대 중국적 사유양식의 특질은 어김없이 드러난다.
평화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손자의 전쟁관 먼저 몇 가지 사실 관계를 정리해두자. 오늘날 우리가 흔히 ‘<손자병법>’(孫子兵法)이라 부르는 책의 본디 제목은 <손자>(孫子)이다. 모두 13편으로 이뤄진 이 책은 춘추시기에 이른바 ‘춘추 오패’의 하나로 꼽히는 오나라 왕 합려의 참모를 지낸 손무(孫武)의 저서다. 이 책의 지은이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있어왔다. 중국 춘추전국시기에 손자란 인물이 둘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지금 소개한 춘추말기 오나라의 손무이고, 다른 하나는 전국시기 제나라에서 활동한 손빈(孫빈)이란 인물이다. 오늘날 전하는 <손자>라는 책이 너무도 완정하고 치밀한 사고를 담고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은 춘추시기의 손무가 직접 저술한 게 아니라 그의 후손이기도 한 전국시기의 손빈이 지었을 것이라는 억측을 내놓아왔다. 그러나 역사 문헌에는 손무가 지은 <손자>와 손빈이 지은 <손자>가 둘 다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선 사마천의 <사기·손자오기열전>에는 오나라의 손무와 제나라의 손빈 두 사람의 전기가 모두 실려 있다. 또 후한의 반고가 지은 <한서·예문지>는 전한 때의 학자 유흠이 지은 도서목록인 <칠략>(七略)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오나라의 <손자>는 82권, 그림 9권이다. 안사고(顔師古)에 따르면 손무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제나라의 <손자>는 89권, 그림 4권이다. 안사고에 따르면 손빈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기록을 보면 분명 유흠은 손무와 손빈이 각각 병서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나라 때 편찬된 <수서·경적지>에는 오나라의 <손자>와 제나라의 <손자>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이 시기에 이미 제나라의 손빈이 지은 <손자>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북송 때는 손무의 <손자>와 더불어 <오자> <육도> <삼략> <울료자> <사마법> <이위공문대> 등 일곱권의 책을 통칭해 ‘무경칠서’(武經七書)라 불렀다. 여기에도 손빈의 <손자>는 빠져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전하는 손무의 <손자>가 사실은 손빈이 지은 것이라는 억측이 퍼져왔다. 1972년 산둥성 린이(臨沂)현 인취에산(銀雀山)에서 서기 전 2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나라 때의 무덤이 발굴됐다. 여기서 다른 유물과 함께 죽간이 한 무더기 쏟아져나왔다. 이를 편의상 ‘인취에산 죽간’이라 부른다. 그 안에는 놀랍게도 오늘날 전하는 <손자>의 죽간 305매와 더불어, 그와는 또다른 <손자> 죽간 440매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땅속에 파묻혀 죽간이 많이 훼손당하긴 했지만, 손무의 <손자>는 대략 2300자, 손빈의 <손자>는 대략 1만1천자가 해독되었다. 손무의 <손자>는 오늘날 전하는 이른바 <손자병법>이 춘추말기의 지략가 손무의 저작임을 입증해주었다. 더 놀라운 것은, 편의상 손무의 <손자>와 구별하기 위해 ‘<손빈병법>’이라 불리는 손빈의 저작이 2천년의 시공을 뚫고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일이다.
두번 부활한 손빈… 신중한 전쟁이 최선
손빈은 두번 부활했다. 사마천의 열전에 따르면 손빈은 젊어서 방연(龐涓)이란 인물과 함께 병법을 공부했다. 뒤에 방연은 위나라 혜왕의 장수가 되었다. 그는 손빈의 재능이 자신보다 뛰어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위나라로 초빙한 뒤 혜왕에게 모함하여 두 다리를 자르는 ‘빈형’(빈刑)을 당하도록 했다. 또한 그의 이마에는 먹으로 죄명을 새겨넣었다. 손빈의 이름 ‘빈’(빈)은 빈형을 당한 데서 유래했다. 감금당해 있던 손빈은 제나라 사신의 도움으로 제나라로 탈출한 뒤 제나라 장군 전기(田忌)의 문객이 된다. 그가 지략을 짜내어 전기로 하여금 귀족들의 말달리기 경주에서 우승하도록 도운 일은 유명한 고사다. 전기의 천거로 제위왕의 군사(軍師)가 된 손빈은 방연이 참모로 있는 위나라와 두 차례 전투를 벌인다. 방연은 두 번째 전투인 마릉싸움에서 손빈의 위장도주 전술에 말려들어 크게 패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것이 손빈의 첫 번째 부활이었다면, 2천년 만에 그의 저작이 햇빛을 본 일은 그의 두 번째 부활이라 해야 할 것이다. 손빈은 “불우한 처지가 사람을 분발하게 만든다”는 사마천의 인생철학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춘추시기 손무의 <손자>와 전국시기 손빈의 <손자>는 사회적 격변을 거치면서 군사사상이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비교연구 자료다(이 연재는 손무의 사상을 검토하는 데서 일단 마무리할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은 다른 수단으로 벌이는 정치의 연장”이라고 말했다. 전쟁은 결국 정치·외교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손무야말로 그러한 전쟁의 본질을 가장 명확하게 이해했던 사람이다. <좌전>에는 ‘무’(武)자를 파자(破字)하여 “창(戈)을 그치게(止)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구절이 나온다. 무력이란 결국 무력을 그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무력 동원의 목적은 정치적인 데 있다는 뜻이다. 글자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아니지만, 춘추시기에 이미 전쟁의 목적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고가 싹트고 있음을 반영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손자는 첫 페이지에서부터 군사행동이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가의 큰 일임을 강조한다. 전쟁이란 국가와 사람의 안위가 달린 치명적인 사태이기 때문이다. 손자는 말한다. “최고통치자는 분노로 인해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되며, 장수는 화가 치민다고 해서 전투를 벌여서는 안 된다. 이로움이 있으면 움직이고, 이로움이 없으면 그칠 것이다. 분노는 즐거움으로 다시 바뀔 수 있고 화는 기쁨으로 다시 바뀔 수 있지만, 망한 나라는 다시 세울 수 없으며 죽은 사람은 다시 살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主不可因怒而興師, 將不可以온而致戰; 合於利而動, 不合於利而止. 怒可以復喜, 온可以復悅; 亡國不可以復存, 死者不可以復生. <火攻>) 이처럼 신중을 거듭해야 하는 전쟁에서 위태로움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자의 말 가운데 삼척동자도 아는 가장 유명한 경구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白戰不殆. <謀攻>)는 말일 것이다. 손무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위태롭지 않다”고만 했다.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손무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 자체가 아니었다. 이기더라도 어떻게 이기느냐가 더 중요했고, 싸움이 어차피 불가피할 때는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이 구절은 마오쩌둥도 극찬했다. “중국 고대의 위대한 군사학자 손무 선생의 책에 나오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위태롭지 않다’는 말은, 학습과 응용이라는 두 단계를 포괄해 말한 것이다. 이 말은, 객관적 실재를 인식하는 가운데서 규율이 발전해 나옴을 말함과 동시에, 그러한 규율에 비추어 자기 행동을 결정하고 눈앞의 적을 극복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중국혁명전쟁의 전략문제>)
백번 싸워 위태롭지 않은 전쟁을 위해
마오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위태롭지 않다”는 말 안에서 인식과 실천의 두 차원을 찾아볼 수 있음을 분석적으로 지적했다. 그의 지적은 정당하다. 적과 나를 안다는 것은 비교의 기준이 있다는 뜻이다. 적의 역량과 나의 역량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판단기준이 있다는 뜻이다. 가령 공자의 어짊이나 노자의 덕은 객관적인 비교가 어렵다. 누가 더 어질고 누가 더 덕이 깊은지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그래서 공자와 노자는 그런 비교 개념을 포기했다. 그러나 피와 살이 튀는 살육의 한가운데 서 있던 손무는 적과 나의 역량을 비교하지 않고서는 어떤 전략도 수립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손무의 판단기준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leess@hani.co.kr

평화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손자의 전쟁관 먼저 몇 가지 사실 관계를 정리해두자. 오늘날 우리가 흔히 ‘<손자병법>’(孫子兵法)이라 부르는 책의 본디 제목은 <손자>(孫子)이다. 모두 13편으로 이뤄진 이 책은 춘추시기에 이른바 ‘춘추 오패’의 하나로 꼽히는 오나라 왕 합려의 참모를 지낸 손무(孫武)의 저서다. 이 책의 지은이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있어왔다. 중국 춘추전국시기에 손자란 인물이 둘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지금 소개한 춘추말기 오나라의 손무이고, 다른 하나는 전국시기 제나라에서 활동한 손빈(孫빈)이란 인물이다. 오늘날 전하는 <손자>라는 책이 너무도 완정하고 치밀한 사고를 담고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은 춘추시기의 손무가 직접 저술한 게 아니라 그의 후손이기도 한 전국시기의 손빈이 지었을 것이라는 억측을 내놓아왔다. 그러나 역사 문헌에는 손무가 지은 <손자>와 손빈이 지은 <손자>가 둘 다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선 사마천의 <사기·손자오기열전>에는 오나라의 손무와 제나라의 손빈 두 사람의 전기가 모두 실려 있다. 또 후한의 반고가 지은 <한서·예문지>는 전한 때의 학자 유흠이 지은 도서목록인 <칠략>(七略)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오나라의 <손자>는 82권, 그림 9권이다. 안사고(顔師古)에 따르면 손무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제나라의 <손자>는 89권, 그림 4권이다. 안사고에 따르면 손빈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기록을 보면 분명 유흠은 손무와 손빈이 각각 병서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나라 때 편찬된 <수서·경적지>에는 오나라의 <손자>와 제나라의 <손자>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이 시기에 이미 제나라의 손빈이 지은 <손자>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북송 때는 손무의 <손자>와 더불어 <오자> <육도> <삼략> <울료자> <사마법> <이위공문대> 등 일곱권의 책을 통칭해 ‘무경칠서’(武經七書)라 불렀다. 여기에도 손빈의 <손자>는 빠져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전하는 손무의 <손자>가 사실은 손빈이 지은 것이라는 억측이 퍼져왔다. 1972년 산둥성 린이(臨沂)현 인취에산(銀雀山)에서 서기 전 2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나라 때의 무덤이 발굴됐다. 여기서 다른 유물과 함께 죽간이 한 무더기 쏟아져나왔다. 이를 편의상 ‘인취에산 죽간’이라 부른다. 그 안에는 놀랍게도 오늘날 전하는 <손자>의 죽간 305매와 더불어, 그와는 또다른 <손자> 죽간 440매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땅속에 파묻혀 죽간이 많이 훼손당하긴 했지만, 손무의 <손자>는 대략 2300자, 손빈의 <손자>는 대략 1만1천자가 해독되었다. 손무의 <손자>는 오늘날 전하는 이른바 <손자병법>이 춘추말기의 지략가 손무의 저작임을 입증해주었다. 더 놀라운 것은, 편의상 손무의 <손자>와 구별하기 위해 ‘<손빈병법>’이라 불리는 손빈의 저작이 2천년의 시공을 뚫고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