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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죽음을 기리는 ‘실용적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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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7-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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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소한 장례의식 내세운 묵자의 박장론… 유가는 죽음에 대한 문화적 접근 시도

묵자는 박애평등(兼愛)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실용주의를 강조했다. 묵자의 실용주의는 ‘인민의 이익’을 표준으로 삼는 실용주의였다. 묵자의 10대 강령 가운데 (8)씀씀이를 아끼라(節用) (9)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節葬) (10)사치스런 음악에 반대한다(非樂)는 내용은 모두 실용주의와 연관이 있는 조항들이다. 묵자가 이런 주장을 편 이유는 귀족들의 사치가 인민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귀족들의 호화스런 과소비와 부장품을 방대하게 집어넣고 오랫동안 상을 치르는 후장(厚葬), 사치스런 음악을 즐기는 일 따위가 결국은 서민의 부담으로 돌아가 이들을 더욱 가난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국가의 부를 늘리는 일에는 찬성했지만, 전쟁을 통해 다른 나라의 땅과 재물을 빼앗아 국부를 늘리는 데에는 반대했다. 묵자는 침략전쟁을 통해 다른 나라의 땅과 인민과 재물을 약탈하지 않더라도, 그 나라의 형편에 따라 낭비를 없애고 사치를 막기만 하더라도 국부를 두배로 늘릴 수 있다(其倍之, 非外取地也. 因其國家, 去其無用之費, 足以倍之. <節用> 上)고 주장했다. 묵자가 보기에 옷이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면 그만이다. 집, 갑옷, 방패, 배와 수레, 음식 등도 인민 모두의 생존과 실용에 봉사해야지 소수 귀족의 허영심과 과시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낭비되어선 안 된다고 보았다. 이 가운데 유가와 가장 첨예하게 맞선 주장은 장례의식과 관련한 내용이다.

죽은 이가 산 사람을 희생시켜서야

고대 중국의 귀족들은 장례를 치르는 데 많은 비용과 번거로운 의식과 오랜 기간의 복상(服喪)을 지켜왔다. 귀족이 죽으면 지체가 높을수록 부장품이 많았다. 평소에 쓰던 그릇과 집기 따위는 물론, 수레와 노비들까지 함께 무덤에 끌고 들어가는 게 상례였다. “귀족이 죽으면 창고를 다 털어 부장품으로 파묻고, 금과 옥과 갖가지 구슬로 죽은 이의 몸을 장식하며, 아름다운 실과 끈으로 잘 묶고, 수레와 말까지 함께 파묻어버리는” 후장 풍습을 보며 묵자는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게 마치 이사를 가는 것 같다”(送死若徙. <節葬> 下)고 비꼬기도 했다. 부장품을 많이 넣는 것은 인민이 생산한 부를 땅 속에 파묻는 일이고, 삼년상을 치르도록 강요하여 인민들로 하여금 생산노동에 종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노동력의 낭비다. 묵자의 시대까지도 남아 있던 순장(殉葬)의 악습 또한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을 희생시키는 잔인한 행위였다. 삼년상이란 긴 복상 기간은 관료들이 행정업무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게 만들고, 농민과 노동자와 아낙네들에게서 농업과 수공업과 가내 수공업에 종사할 시간을 빼앗아간다. “이렇게 하면서도 부유해지길 바란다는 건, 비유하자면 땅을 가는 일을 금지하면서도 수확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以此求富, 此譬猶禁耕而求穫也. <節葬> 下)


묵자의 이런 절용설은 서민들에게 깊은 호소력이 있었다. 이 논리를 극단까지 밀고 나가면 모든 인민은 사회주의 중국에서 한때 그랬던 것처럼 누구나 똑같은 ‘인민복’을 입고 똑같이 꾸민 집에서 살고 똑같은 일식삼찬을 먹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꾸밈과 다양성의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묵자의 절용설에 맞서 유가의 논리를 방어하기 위해 비교적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제시한 사람은 순자였다. 순자는 인간의 욕망을 일단 긍정한다. “인간이란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있다. 욕망이 있는데 이를 실현하지 못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실현하려 한다. 거기에 일정한 한계가 없다면 사람들은 서로 싸움박질을 벌이게 된다.” 유가에서 말하는 예(禮)란 사람들의 욕망에 일정한 한계를 그어 욕망을 잘 기르도록 함으로써 사회적 혼란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순자는 예를 이렇게 정의한다. “예란 욕망을 기르는 것이다.”(禮者, 養也. <禮論>) 흔히 유가에서 말하는 예법이란 인간의 욕망을 억누르고 기성의 사회질서와 윤리규범에 복종할 것을 강요하는 논리라는 선입견을 갖기 쉽지만, 순자는 인간이 누구나 욕망을 지닌 존재임을 긍정한 뒤, 그 욕망이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잘 기르는” 일이 중요하며, 그것이 바로 예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순자는 예를 통해 비로소 인간이 본성과 꾸밈의 중용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유가의 예론 가운데 핵심이랄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상례(喪禮)이다. 순자는 상례에서도 인간의 본성과 꾸밈(수식)이 중용을 얻어야 한다고 보았다. 가까운 피붙이가 죽었을 때 슬픈 감정을 느끼는 건 사람의 본성이다.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지나칠 수도 있고 모자랄 수도 있다. 가령 슬픔이 지나쳐 식음을 전폐하고 온몸을 자해하다 목숨을 잃는 지경까지 이른다면 그건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 지나친 것이다. 반면에 혈육이 죽었음에도 생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돌아보지도 않는다면 그건 너무 모자란 것이다. 유가에서 상례를 정한 것은 슬픔을 수식하는 일정한 법도를 마련함으로써 중용을 얻고자 함이라고 순자는 설명한다. 그 또한 순장에는 반대한다. 그건 잔인한 구습일 뿐이다. 그러나 부장품을 넣고 삼년상을 치르는 일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는다. 부장품을 넣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산 사람인 것처럼 꾸며 보내는 일”(以生者飾死者也. <禮論>)이다.

순자의 예론은 문화주의자의 자의식

그러나 미묘한 차이가 있다. 가령 죽은 이에게 넣어주는 그릇은 크기가 작아서 실제로는 쓸 수 없는 것들이다. 죽은 이에게 넣어주는 음식 또한 익히지 않은 것이어서 실제 먹을 수는 없는 것들이다. 피리와 젓대를 넣지만 구멍이 막혀 있어 실제로 불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거문고와 비파도 넣지만 줄을 고르지 않은 채 넣으며, 모형 수레를 넣되 말을 거꾸로 매어 놓는다. 여기에 어떤 뜻이 있는가. 산 사람이 사용하는 물건의 모형을 넣어주는 이유는 죽은 뒤에도 똑같이 그를 공경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고, 실제 사용할 수 없도록 해서 넣어주는 이유는 그가 죽은 사람임을 분명히 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순자는 해석한다. 그럼으로써 “산 사람을 희생해 죽은 이를 섬기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서, 인간 본연의 정서인 슬픔을 적절히 수식하는 법도(예) 또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묵자의 박장론(薄葬論: 상례를 극히 검소하게 치러야 한다는 주장)이 도탄에 빠진 인민의 신음소리에서 나온 것이라면, 순자의 예론(禮論)은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문화 전통을 옹호하고 거기에 합리적인 논리를 부여하려는 문화주의자의 자의식에서 나온 반론이라 할 수 있다. 두 진영의 논쟁에는 귀족 대 서민의 대립이라는 ‘계급적’ 성격만 있는 게 아니라, 실용주의와 문화주의의 대립이라는 또다른 면모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 어느 한면만 강조하는 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논쟁을 공정히 자리매김하는 일이라 하기 어렵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 인민에게 고통만 안겨주고 있던 당대의 귀족들에 맞서 박애평등에 기초한 절용설을 주장한 묵자의 논리도 소중한 가치를 지니지만, 인간의 욕망을 적절한 형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중용을 찾으려 한 순자의 도도한 문화주의 또한 그에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소중한 논리라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두 인민복을 입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면, 순자의 문화주의를 단순히 귀족문화를 옹호하는 논리라고 비판할 수만은 없다.

죽음과 상례문화에 대한 묵자의 주장은 ‘실용’에 치우쳐 극단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오늘날에도 죽음과 상례문화에 대해 묵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가령 지난 1992년 세상을 떠난 저우언라이 총리의 아내 덩잉차오의 유서는 그가 죽은 뒤 지구마을 사람들에게 외신을 타고 전해져 깊은 감동을 준 적이 있다. 그는 죽기 10년 전에 중국공산당 중앙에 편지를 보내두었다. “사람은 누구나 결국 죽습니다. 내가 죽은 뒤 다음과 같이 처리해주길 당 중앙에 간절히 요구합니다. (1)주검은 해부실습용으로 쓴 뒤 화장할 것. (2)화장한 뒤 남은 유골도 (납골당 따위에) 보존하지 말고 뿌려버릴 것. 이는 1956년 저우언라이 동지와 내가 약속한 것임. (3)부음을 돌리지 말 것. (4)추도회를 열지 말 것. (5)내가 죽은 뒤 이 요구를 공포할 것.”

묵자의 태도 따른 저우언라이 부부

그는 “공산당원이 인민에 봉사하는 건 무한하며, 그가 하는 모든 일과 직무는 당과 인민의 결정에 따를 뿐”이라며, 모름지기 공산당원이란 “한뼘의 땅조차 죽은 뒤에 차지함으로써 인민에게 부담을 주어선 안 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살아생전 인민복 한벌로 살고 죽어서는 한뼘의 땅에 묻히는 일조차 거부한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 부부는 이를테면 현대의 묵자(墨者)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런 ‘각박한’ 태도를 모든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문화주의자라 자부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음에 대해서는 이런 묵자적 태도를 취하는 것 또한 가능할 것이다. 글쓴이의 생각을 밝혀두자면, ‘문화’에 대해서는 순자의 논리에 찬성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묵자와 덩잉차오의 논리에 찬성한다.

xuand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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