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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너른 사랑’으로 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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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7-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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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의 박애평등사상 핵심 명제는 겸애… 도적은 엄벌주의 전통에 따라 예외로

묵자에게는 열 가지 정치강령이 있었다. ⑴ 세상 사람을 두루 사랑하라(兼愛) ⑵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주장에 반대한다(非命) ⑶ 침략전쟁에 반대한다(非攻) ⑷ 현명한 사람을 높이라(尙賢) ⑸ 국론은 통일되어야 한다(尙同) ⑹ 하늘은 의로움을 좋아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天志) ⑺ 귀신은 인간의 선악에 상벌을 내린다(明鬼) ⑻ 씀씀이를 아끼라(節用) ⑼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節葬) ⑽ 사치스러운 음악에 반대한다(非樂)는 등의 주장이 그것이다. 그는 어느 나라에 들어가 유세를 할 때, 그 나라의 실정을 살펴보아 거기 필요한 내용을 골라서 역설했다. 이를 ‘택무이종사’(擇務而從事)라 한다. “무릇 어느 나라에 들어가면 반드시 시급한 문제가 뭔지 파악해 그 일을 앞세워야 한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현명한 사람을 높이라는 주장과 국론은 통일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나라가 가난하면 씀씀이를 아끼라는 주장과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주장을 앞세운다. 나라가 음악과 주색잡기에 빠져 있다면 사치스러운 음악에 반대한다는 주장과 운명론에 반대하는 논리를 제시한다. 나라의 풍습이 한 방면에 지나치거나 치우쳐 예의법도가 없을 때는 하늘을 높이고 귀신을 섬기라는 주장을 편다.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해 빼앗고 짓밟는 데 힘쓰면 세상을 두루 사랑하라는 주장과 침략전쟁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시급하게 역설해야 할 상황을 파악해 그 일을 앞세우라고 하는 것이다.”(<魯問>) 마오쩌둥식으로 말하자면, 그 나라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주요 모순’을 파악해 그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논리를 제시하라는 얘기다.

유가의 논리는 차별하는 사랑으로 규정

묵자의 10대 강령 가운데 핵심적인 강령이라면 역시 “세상 사람을 두루 사랑하라”는 ‘겸애’(兼愛)의 주장을 꼽아야 할 것이다. “서로 두루 사랑하고 서로 두루 이로움을 나누라”(兼相愛, 交相利. <兼愛> 中)는 게 묵자의 박애평등사상의 핵심 명제이다. 공자는 “친족을 친히 대하는 데에도 차등이 있고, 어진 사람을 높이는 데에도 등급이 있다”(親親有術, 尊賢有等. <非儒> 下)고 했다.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하기 시작해 이를 확충해 가깝지 않은 사람에까지 넓혀가야 한다는 게 유가의 논리다. 이에 대해 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널리 두루 베풀어 고르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의 나라를 자기 나라 보듯 하고, 남의 집안을 자기 집안 보듯 하며, 남의 몸을 자기 몸 보듯 하라. 그러면 제후들은 서로 사랑하여 들판에서 전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고, 가문끼리도 서로 사랑하여 서로를 넘보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끼리도 서로 사랑하여 서로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兼愛> 中) 묵자는 유가의 논리를 ‘차별애’(別愛)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논리를 ‘겸’(兼)이란 한 글자로, 유가의 논리를 ‘별’(別)이란 한 글자로 요약해, “겸으로써 별을 대치해야 한다”(兼以易別)고 말한다. 널리 세상을 두루 사랑하는 사해동포 박애주의로써 차별애를 대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평등박애에 관한 묵자의 주장은 매우 철두철미하다. 그의 평등박애론은 그 자신이 낮은 신분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지만, 논리적 사유의 귀결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묵자의 제자들이 정리한 ‘후기 묵가’의 글이긴 하지만, 다음의 논리적 추론을 살펴보자.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두루 사람을 사랑한 이후에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이 성립한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두루 다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 건 아니다. 두루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愛人, 待周愛人而後爲愛人. 不愛人, 不待周不愛人: 不周愛, 因爲不愛人矣. <小取>)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에 값하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사랑해야 한다. 그게 묵자가 말하는 ‘겸애’이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 건 모든 사람을 다 원수처럼 대해야 그런 소릴 듣는 건 아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람을 두루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다. 가령 귀족계급은 두루 사랑하면서 노예계급의 존재를 당연시한다면 그는 이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다. 묵경은 다시 말한다. “여자 노예는 사람이다. 여자 노예를 사랑함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남자 노예는 사람이다. 남자 노예를 사랑함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옳고도 자연스러운 주장이다.”(獲, 人也: 愛獲, 愛人也. 臧, 人也: 愛臧, 愛人也. 此乃是而然者也. <小取>) 이 옳고도 자연스러운 주장에 동의한 고대의 철인은 불행하게도 많지 않았다. 공자도 노자도 ‘노예’라는 당시 최하층의 처지에 놓인 사람들까지 철학적 논의의 대상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았다. 보편적 논리를 추구한 플라톤의 유토피아에서도 여자 노예와 남자 노예들은 여전히 가사노동과 생산노동에 종사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의식 안에서 노예란 ‘말 못하는 도구’(삽과 곡괭이 따위), ‘반쯤 말하는 도구’(가축)와 더불어 ‘말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묵가 학파가 도달한 박애평등의 논리는, 엄격한 카스트제도가 엄존하고 있던 고대 인도사회에서 일천제(불가촉 천민)조차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한 고타마 싯다르타나, 암하아레츠(땅의 사람들)라 불렸던 최하층민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주인”이라고 설파한 예수의 박애평등사상과 어깨를 견줄 만한 것이다.

노예는 사람이지만 도적은 사람이 아니다?

후기 묵가의 논리 가운데 한 가지 해명이 필요한 논리가 있다. “노예도 인간이다”라고 부르짖었던 이들이 ‘도적’(盜)에 대해서는 뜻밖의 논리를 펴고 있다. “도적도 사람이다. 그러나 도적이 많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게 아니다. 도적이 없다는 것은 사람이 없다는 건 아니다. (…) 도적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도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며, 도적을 죽이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盜, 人也: 多盜, 非多人也: 无盜, 非无人也. …愛盜, 非愛人也: 不愛盜, 非不愛人也: 殺盜, 非殺人也. <小取>) 후기 묵가의 논리에서 노예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만, 오로지 ‘도적’만은 ‘겸애’의 대상에서 배제당하고 있다. “노예도 사람이다”란 주장에서 “노예조차 사랑해야 진정한 박애라 할 수 있다”는 논리를 끌어냈던 후기 묵가가, “도적도 사람이다”란 같은 전제를 똑같이 밀고나가 “도적도 사랑해야 한다”는 논리에 이르지 못한 것은 묵가 논리학의 한계라 할 수 있다. ‘도적’이란 당시 도망한 노예나 전쟁동원과 수탈을 이기지 못해 생산활동에서 이탈한 유랑 서민의 무리였다. 후기 묵가 논리학의 이런 한계는, 오늘날 가령 사형제도가 ‘살인’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한계와 같다.

묵가 집단이 도적을 죽이는 걸 살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이들이 수성(守城) 전술을 발전시키면서, 적의 포위공격에 직면한 성 안에서 엄벌주의를 실행했던 전통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가령 포위공격 당하고 있는 성 안의 기율을 논하고 있는 <호령>편에서는 통행금지를 어긴 자, 명령에 불복종한 자, 적과 내통한 자, 경계를 소홀히 한 자, 고의로 실화한 자, 고의로 큰 소리를 내어 방비대열을 흐트린 자 등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규정해두고 이들을 참수형, 거열형 등의 엄벌로 다스리고 있다. 수성전투에서 엄벌주의를 채택하는 건 불가피한 점이 없지 않다. 이처럼 명문화한 엄벌주의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묵가 집단이었기에, “도적을 처형하는 건 살인이 아니다”라는 자기 합리화의 논리가 나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모도 모르는 사랑”이라는 유가의 비판

박애평등에 철저한 묵가의 사상은 유가와 세력을 견줄 정도로 당시 평민과 천민들에게 크게 부각되었으나, 유가쪽의 반박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맹자는 나의 나라와 남의 나라를 똑같이 대하고 나의 부모와 남의 부모를 똑같이 대하라는 묵가의 논리가 “어미 아비도 몰라보게 만드는 주장”(墨氏兼愛, 是無父也. <등文公> 下)이라고 비판했다. 맹자에 이어, 제자백가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순자는 묵자의 학설을 “실용에 가려 문화의 중요성을 몰랐다”(墨子蔽於用而不知文. <解蔽>)고 총평했다.

논리적 정합성을 철저하게 추구해 박애평등의 이상에 도달했던 묵가의 사상은 어떻게 보면 고대 중국에서 예외적인 흐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묵가의 논리학과 ‘표준’에 대한 사고는 명가와 법가 등 고대 중국 사상계에서 비주류라 할 수 있는 학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유가와 도가 또한 묵가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사상투쟁과 실제적 쟁투의 과정에서 살아남은 것은 결국 유가의 문화주의였고, 이들이 중국 사상의 주류를 만들어갔다.

xuand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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