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천하 엎으려 목숨 걸리라!

364
등록 : 2001-06-20 00:00 수정 :

크게 작게

최고 영수의 외아들도 묵가 법대로 처형… 차세대 지도자 부실해 망각 속으로

묵가의 조직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다.

전국시기에 활동한 맹자(약 372∼289 서기 전)는 “양주와 묵적의 학설이 하늘아래 가득하여 천하의 학설이 양주에게 쏠리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간다”(楊朱·墨翟之言盈天下. 天下之言不歸楊, 則歸墨. <등文公> 下-9)고 한탄했다. 맹자는 묵자(약 475∼396 서기 전)가 죽은 뒤 두 세대쯤 지나서 활동한 인물이다. 이를 보면 묵자 사후에도 묵가의 학설은 크게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맹자가 죽은 뒤 한 세대쯤 지나 활동한 인물인 한비자(약 279∼233 서기 전)는 또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저명한 학파를 꼽자면 유가와 묵가를 들 수 있다.”(世之顯學, 儒·墨也. <顯學> 50-1) 한비자의 활동 시기는 묵자 사후 다섯 세대쯤 지난 때이다. 그때까지도 묵자의 학설은 유가와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학문(顯學)’으로 꼽힐 정도로 창성했다. 그러나 한대 이후에는 학맥 자체가 완전히 끊어져 청대에 고증학자들에 의해 묵가 연구가 부활할 때까지 <묵자>를 읽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처럼 세력이 장대했던 학파가 어떻게 이토록 급속도로 몰락하여 완벽한 망각 속으로 사라질 수 있었을까. 불가사의한 일 가운데 하나다. 흩어진 자료의 파편 속에서 몇 가지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묵가 조직의 엄격함 드러난 복돈의 비극


먼저 묵자가 죽은 뒤 묵가 조직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자료를 살펴보자. 묵가 집단은 최고 지도자인 거자(鉅子)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조직원은 ‘묵자’(墨者)라 불렸다. 묵가의 초대 거자는 물론 묵적(墨翟)이었다. <여씨춘추>에는 묵가의 거자로 복돈(腹돈), 맹승(孟勝), 전양자(田襄子)라는 세 인물이 나온다. 이들의 활동 시기를 대조해 보면 묵적이 죽은 뒤 복돈―맹승―전양자의 순서로 ‘거자’의 의발이 전승된 걸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 가운데 맹승과 복돈은 묵가 조직의 단면을 보여주는 매우 강렬한 일화를 남겼다. 먼저 복돈에 관한 <여씨춘추>의 기록이다.

묵가의 거자인 복돈은 진(秦)나라에 살았는데, 그의 아들이 사람을 죽였다. 진나라 혜왕이 복돈에게 말했다. “선생은 나이도 많고 또다른 아들이 없으시니 과인이 이미 형리에게 아들을 처형하지 말도록 조처를 취했습니다. 선생께서는 이런 제 뜻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복돈의 입에서는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묵자의 법에 따르면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을 해친 자는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대저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행위를 금하는 것은 천하의 대의입니다. 왕께서 비록 제 자식을 사면하셔서 처형하지 않도록 하셨더라도 저로서는 묵자의 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돈은 이렇게 답한 뒤 혜왕의 사면을 허용하지 않고 결국 자식을 처형했다.(<去私>)

끔찍한 일이다. 묵가의 거자 복돈은 자기 외아들조차 예외를 허용하지 않고 묵가 집단의 법에 따라 처형했다. 이 일화에 등장하는 진 혜왕의 재임기간은 서기 전 399년부터 서기 전 387년까지이므로 묵자가 죽은 직후 벌어진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묵가 조직이 국가의 법률과 별도로 독자적인 법을 가지고 있었고, 거자가 묵가의 법 집행권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군주가 비록 사면하더라도 묵가의 기율이 허락하지 않으면 최고 영수인 거자의 아들조차 달아날 구멍이 없었다.

<논어>에는 이와 정반대의 논리가 나온다. 초나라 섭현의 영윤이던 섭공자고가 공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무리에 몸소 바름을 실천한 이가 있으니,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아비가 훔쳤다고 증언을 했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 무리의 바름은 그와 다릅니다. 아비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숨겨줍니다. 바름은 그 안에 있습니다.”(<子路> 13-18) <맹자>에도 닮은 상황에 대한 문답이 나온다. “순임금이 천자로 있을 때, 만약 순임금의 아비인 고수가 사람을 죽였다면 사법 담당자인 고요는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했을 것인가.” 이 고약한 질문에 맹자는 이렇게 답했다. “고요는 법을 집행하기 위해 고수를 잡으러 나섰을 것이고, 순임금은 천자 자리를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리고 아비를 업고 외딴 바닷가로 달아나 죽을 때까지 즐거이 살면서 천하를 잊었을 것이다.”(<盡心> 上-35) <맹자>의 이야기는 물론 실제상황은 아니지만, 이런 데서 유가와 묵가의 차이가 드러난다. 아마도 유가의 논리가 사람의 본디 심성에 훨씬 더 가까울 것이다. 그게 유가의 미덕이라면, 묵가의 미덕은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변됨을 취하는 데 있다. 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만들어 세습귀족 중심의 세상을 철저하게 바꿔보겠다는 뜻을 세운 묵가로서는 유가처럼 ‘은둔’ 같은 피난처가 존재하지 않았다. 자기 손으로 외아들을 죽여야 했던 복돈의 비극은 겉보기엔 상식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묵가 조직의 상황을 이해하면 거자인 복돈조차도 운신의 폭이 거의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조차도 재임중에 자기 아들이 감옥에 가는 일을 막지 못하지 않던가.

자결한 맹승을 따라 죽은 제자 183명

아마도 복돈 다음으로 거자의 자리에 올랐을 것으로 추정되는 맹승은 더욱 끔찍한 일화를 남겼다. 역시 <여씨춘추>에 실려 있다. 맹승은 초나라의 양성군과 가까이 지냈다. 양성군은 그에게 나라의 수비를 맡기면서, 패옥을 둘로 나누어 신표로 주었다. 두 사람은 “신표가 맞으면 명에 따른다”고 서약하였다. 서기 전 381년, 초나라의 도왕이 죽은 뒤 벌어진 내란에서 양성군은 왕실에 도전했다가 달아났고, 초 왕실은 양성군의 봉지를 몰수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다. 양성군의 봉지를 지켜주겠노라고 패옥을 나눠 가지며 약속했던 맹승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의 봉지를 맡으면서 신표를 나눠가졌다. (…) 우리 힘으로는 초나라 왕실이 양성군의 봉지를 몰수하려는 걸 막을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하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그의 제자 서약이 맹승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죽어서 양성군에게 이롭다면 죽는 게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죽음을 선택하는 건 양성군에게 이로울 게 없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 묵자의 조직을 끊는 일이니 마땅하지 않습니다!” 맹승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 양성군에 대한 나의 관계는 스승이기 이전에 벗이었고, 벗이기 이전에 신하였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 죽음을 피한다면 지금부터 세상사람들이 엄격한 스승을 구할 때 묵자학파는 반드시 제쳐놓을 것이고, 어진 벗을 구할 때에도 묵자학파의 사람들을 제쳐놓을 것이며, 좋은 신하를 구할 때도 반드시 묵자학파의 사람들을 제쳐놓을 것이다. 내가 지금 죽는 것은 묵자학파의 대의를 실천하고 그 업을 계승하려는 것이다! 나는 장차 거자 자리를 송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양자에게 넘기려 한다. 전양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니, 어찌 묵자의 조직이 세상에서 끊어질 것을 걱정하겠는가?” 맹승은 거자 자리를 전양자에게 넘기고 자결했다. 맹승이 죽자 그를 따라 함께 자결한 제자가 183명이었다.(<上德>)

<회남자·태족훈>편에는 “묵자 학설을 신봉하는 사람 180명은 모두 불 속에 뛰어들고 칼날을 밟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발을 돌리지 않을 수 있었다”고 묵가 조직을 평하고 있다. 이런 평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복돈과 맹승의 일화를 통해 우리는 묵자의 ‘거자’가 ‘선양’이라는 방식을 통해 자기보다 더 뛰어난 다른 동지에게 자리물림했음을 알 수 있다.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버리는 투철한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조직이었기에 묵가 조직이 의로운 협객인 ‘유협’(游俠)의 선구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한번 약속한 일은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는 이런 불 같은 의협정신 때문에 묵가 조직은 맹자와 한비자의 활동시기까지 자신들의 정치강령으로 천하를 뒤덮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묵적, 복돈, 맹승 이후 묵가 조직에 이들 만한 인상적인 지도자는 더이상 등장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빼어난 지도자가 없을 때 조직 내에는 반드시 분파투쟁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한비자는 “묵자가 죽은 뒤 상리씨의 묵가, 상부씨의 묵가, 등릉씨의 묵가로 분열되었다”고 전한다. <장자·천하>편에는 묵가의 분파들이 서로를 “별묵”(別墨)이라 비난하며 다투었다고 전한다.

가장 오래된 좌파 조직의 흥망성쇄

어떤 정치 집단 안에 비슷한 수준의 그릇을 지닌 지도자 두 사람이 존재한다면 두 사람은 일쑤 관뚜껑에 못이 박힐 때까지 서로 헐뜯고 싸운다. 우리는 양 김씨에게서 좋은 사례를 구경하고 있다. 두 사람의 그릇이 비슷할 때, 양보하고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사람이 사실은 더 큰 그릇이다. 불행하게도, 묵가 조직에도 오늘날의 대한민국처럼 그런 지도자가 등장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는 조직의 분열로 이어졌고, 결국 묵가의 원대한 뜻을 실현하지 못한 채 묵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인류 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컸던 좌파 조직은 이렇게 망각의 세월 속으로 묻혀갔다.

xuande@hanmail.net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