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에 나선 묵자의 제자도 신념 흔들려… 사상무장 확실해도 유혹에 휘둘리기 일쑤
다른 제자백가와 달리 묵가는 매우 조직적으로 활동했던 집단이다. <묵자>를 읽어보면 묵자가 제자들을 각국에 파견해 활동하도록 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들이 나온다.
“묵자가 경주자를 초나라로 보냈다.”(子墨子遊耕柱子於楚.)
“묵자가 관검오로 하여금 고석자를 위나라로 보내도록 했다.”(子墨子使管黔敖遊高石子於衛. 이상 <耕柱>)
“묵자가 공상과를 월나라로 보냈다.”(子墨子遊公尙過於越.)
“묵자가 조공자로 하여금 송나라로 가도록 내보냈다.”(子墨子出曹公子而於宋.)
“묵자가 승작으로 하여금 항자우를 섬기도록 했다.”(子墨子使勝綽事項子牛. 이상 <魯問>) 떵떵거리고 살라고 한 게 아니건만 위의 글에 나오는 경주자, 관검오, 고석자, 공상과, 조공자, 승작 등은 모두 묵자의 제자들이다. 인용문을 보면 묵자가 직접 어느 나라로 가라고 지시한 경우도 있고, 상급자를 통해 하급자를 다른 나라로 파견한 것으로 보이는 구절도 있다. 묵자가 관검오를 통해 위나라로 가 벼슬을 하라고 지시한 고석자는 나중에 돌아와 묵자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위나라 임금은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인해 제게 매우 두터운 봉록을 내리셨고 저를 경의 벼슬에 앉혀주었습니다.”(衛君以夫子之故, 致祿甚厚, 設我於卿. <耕柱>) 이를 보면 묵자가 각국 제후들과의 교분을 이용해 제자들을 관직에 앉혀 활동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도 제자들을 제후국에 추천해 벼슬하도록 하기도 했지만, 묵가 집단만큼 조직적으로 움직인 건 아니었다. 묵자가 이들을 각국에 보낸 건 단순히 제자들이 벼슬 한자리 차고앉아 떵떵거리고 살도록 해주려는 건 아니었다. 이들의 임무는 반전·평화·박애·평등이라는 묵가 집단의 이상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 임무를 망각하고 그저 부귀와 권력을 누리는 데 정신이 팔린 제자는 가차없이 지위를 박탈당했다. 승작이 그런 경우이다. 제나라의 실력자인 항자우의 가신으로 활동하라는 ‘오더’를 받고 그의 수하로 들어간 승작은, 항자우가 노나라를 세번이나 침략했는데 그때마다 참전했다. 이 말을 들은 묵자는 고손자를 보내 항자우로 하여금 승작을 퇴임시키도록 했다. 이미 항자우와 만나 직접 인상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있던 묵자는 고손자를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항자우에게 전했다. “내가 승작을 보낸 것은 그로 하여금 그대의 교만함을 막아주고 치우침을 바로잡아주라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승작은 봉록은 후하게 받아먹으면서 그대를 속이고 있습니다. 그대가 노나라를 세번이나 침략했는데 승작은 세번 다 따라가 싸웠습니다. 그건 달리는 말을 멈추도록 하는 대신 가슴걸이에 채찍질하여 더욱 사납게 달리도록 하는 짓입니다. 저는 ‘입으로는 올바름에 대해 말하면서 이를 실천하지 않는 것은, 알면서 일부러 죄를 범하는 짓’(言義而弗行, 是犯明也.)이라고 들었습니다. 승작은 올바른 게 무엇인지 몰라서 그걸 실천하지 않은 게 아니라 봉록의 무게가 올바름을 짓눌렀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겁니다.”(綽非弗之知也, 祿勝義也. <魯問>) <사기·전경중완세가>와 <육국연표>에서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략한 기사 가운데 묵자의 활동시기와 겹치는 걸 추려보면 대략 서기 전 412년, 411년, 408년, 394년에 벌어진 전쟁이 이에 해당한다. 이 네번의 전란은 제나라의 태공 전화와 그의 오른팔이던 무장 항자우가 활동하던 시기와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묵자가 승작을 항자우의 밑으로 파견한 건 서기 전 412년 즈음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승작만 파견한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제나라의 태공 전화와 그의 장수 항자우를 만나 침략전쟁을 중지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그 대화의 내용은 <묵자·노문>편에 남아 있다. 묵자는 제나라의 침공이 두려워 불안에 떠는 노나라의 임금도 만났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제나라와 노나라를 오가며 인민에게 고통과 피해만 안겨줄 뿐인 침략전쟁을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반전 평화주의자 묵자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승작을 항자우의 가신으로 들어가도록 한 건 반전 평화활동을 펴란 뜻이었지 자기 한몸 잘먹고 잘살라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승작은 항자우를 설득하기는커녕 침략전쟁에 세번이나 참전했다. 그런 철없는 조직원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묵자가 아니다. 승작이 참전한 세 차례의 제-노전쟁이 서기 전 412년, 411년, 408년에 잇따라 벌어진 전쟁이라면, 묵자는 적어도 4∼5년 동안은 승작의 활동을 지켜보았음을 알 수 있다. 충분한 시간을 주고 기다렸음에도 그가 반전운동에 힘이 되기는커녕 묵가 집단의 이상을 저버리고 일개 전투원으로 전락하자 항자우에게 조직원을 보내 그를 직위해제하도록 한 것이다. 우리는 이 일화에서 묵가가 매우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상류사회의 단맛에 길들여진 제자들
묵자가 각국에 파견할 정도의 제자라면 사상무장이 철저한 정예요원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묵가 집단에 속해 있을 때는 최하층민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지만, 묵자의 추천으로 벼슬자리를 얻자 비로소 상류사회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묵자가 송나라로 보낸 조공자의 고백을 들어보자. “제가 처음 선생님의 문하에 들어왔을 때는 (천민들이 입는) 짧고 거친 옷으로 몸을 가리고 명아주잎과 콩잎을 넣고 끓인 국으로 연명했습니다. 그나마 아침을 때우고 나면 저녁엔 그것마저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그러니 조상님과 신령님께 제사 지내기도 어려웠지요. 그러나 지금은 선생님 덕분으로 집안은 처음보다 넉넉해졌고, 조상님과 신령님께 제사를 지낼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魯問>) 묵자가 파견해 각 제후국에서 벼슬하도록 한 제자들은 모두 이와 비슷한 체험을 했을 것이다.
묵자 자신은 여전히 콩잎국으로 연명하면서 제자들을 각국에 파견해 벼슬자리를 얻도록 했건만, 제자들이 모두 충실하게 활동한 건 아니었다. 승작의 경우는 완전히 조직에서 이탈해 자기 혼자만 신분상승한 경우에 해당한다. 지난호에 잠시 등장했던, 월나라로 파견된 공상과는 묵자의 이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만 호의호식하기가 미안했던지 “묵자 선생님도 저랑 같이 월나라로 가서 귀족이 되시죠!”라고 권유하고 나섰다. 묵자는 그를 비판하긴 했지만 그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지는 않았다. 송나라로 보낸 조공자의 경우는 묵가의 이상에 잔뜩 회의를 품었다. 등 따뜻하고 배불러진 그는 묵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공연히 묵자의 사상을 비판하고 나섰다. “선생님께서는 조상님과 신령님을 잘 섬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사를 잘 지내는데도 집안 사람들이 죽고 가축이 번성하지 않고 몸에는 병이 드니, 선생님의 길을 계속 따라야 할지 회의가 듭니다.” 거친 옷을 입은 야윈 얼굴의 묵자는 비단옷을 걸치고 얼굴에 윤기가 도는 이 제자의 공연한 도발에 속이 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묵자는 안색을 바꾸지 않고 차분하게 자기 생각을 다시 전해준다. “그렇지가 않다. 조상님과 신령님이 사람들에게 바라는 일은, 사람이 높은 벼슬과 봉록을 받았을 때 곧 그것을 현명한 사람에게 양보하고, 재물이 많으면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란다.”
그가 초나라로 파견한 경주는 묵자의 제자 두세명이 들렀을 때 이들을 푸대접했다. 이들은 돌아와 묵자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묵자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라며 이들을 제지했다. 얼마 뒤 경주는 “제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하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10금의 돈을 묵자에게 보냈다. 경주자 또한 제대로 활동하는 데 성공하진 못했지만, 혼자 잘먹고 잘사는 대신 자금이라도 모아서 조직에 보낸 경우다.
마지막으로, 묵자가 위나라로 파견한 고석자는 위나라 임금에게 묵가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높은 작위와 두터운 봉록을 다 팽개쳐버리고 묵자에게 다시 돌아온다. 돌아온 고석자가 묵자에게 물었다. “(그 귀한 자리를 박차고 와버렸으니) 위나라 임금이 저를 미친 놈 취급하지 않겠습니까?” 묵자는 답했다. “그곳을 떠나는 게 진실로 올바른 길이었다면,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게 뭐 대수이겠는가!”(去之苟道, 受狂何傷! <耕柱>)
시대의 미친 놈 취급을 받을지라도…
다섯명의 제자 가운데 오로지 고석자 한 사람만이 묵자의 대의를 진실로 이해하고 실천했다. 가장 심각하게 대의명분을 저버린 승작을 포함해 다른 제자들도 몰라서 대의를 실천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묵자 시대에도 대의를 실천하는 길은 “미친 놈” 취급을 받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진보’니 ‘진화’니 하는 얘기를 쉽게 한다. 그러나 묵자의 제자들보다 2500년 뒤에 태어난 오늘의 뜻있는 사람들은 과연 그들보다 더 진일보한 실천을 하고 있는 걸까? 정녕 ‘미친 놈’ 취급을 받을지언정 대의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걸까? 옛 글을 읽을 때마다 문득 드는 생각이다.
xuande@hanmail.net

“묵자가 승작으로 하여금 항자우를 섬기도록 했다.”(子墨子使勝綽事項子牛. 이상 <魯問>) 떵떵거리고 살라고 한 게 아니건만 위의 글에 나오는 경주자, 관검오, 고석자, 공상과, 조공자, 승작 등은 모두 묵자의 제자들이다. 인용문을 보면 묵자가 직접 어느 나라로 가라고 지시한 경우도 있고, 상급자를 통해 하급자를 다른 나라로 파견한 것으로 보이는 구절도 있다. 묵자가 관검오를 통해 위나라로 가 벼슬을 하라고 지시한 고석자는 나중에 돌아와 묵자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위나라 임금은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인해 제게 매우 두터운 봉록을 내리셨고 저를 경의 벼슬에 앉혀주었습니다.”(衛君以夫子之故, 致祿甚厚, 設我於卿. <耕柱>) 이를 보면 묵자가 각국 제후들과의 교분을 이용해 제자들을 관직에 앉혀 활동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도 제자들을 제후국에 추천해 벼슬하도록 하기도 했지만, 묵가 집단만큼 조직적으로 움직인 건 아니었다. 묵자가 이들을 각국에 보낸 건 단순히 제자들이 벼슬 한자리 차고앉아 떵떵거리고 살도록 해주려는 건 아니었다. 이들의 임무는 반전·평화·박애·평등이라는 묵가 집단의 이상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 임무를 망각하고 그저 부귀와 권력을 누리는 데 정신이 팔린 제자는 가차없이 지위를 박탈당했다. 승작이 그런 경우이다. 제나라의 실력자인 항자우의 가신으로 활동하라는 ‘오더’를 받고 그의 수하로 들어간 승작은, 항자우가 노나라를 세번이나 침략했는데 그때마다 참전했다. 이 말을 들은 묵자는 고손자를 보내 항자우로 하여금 승작을 퇴임시키도록 했다. 이미 항자우와 만나 직접 인상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있던 묵자는 고손자를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항자우에게 전했다. “내가 승작을 보낸 것은 그로 하여금 그대의 교만함을 막아주고 치우침을 바로잡아주라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승작은 봉록은 후하게 받아먹으면서 그대를 속이고 있습니다. 그대가 노나라를 세번이나 침략했는데 승작은 세번 다 따라가 싸웠습니다. 그건 달리는 말을 멈추도록 하는 대신 가슴걸이에 채찍질하여 더욱 사납게 달리도록 하는 짓입니다. 저는 ‘입으로는 올바름에 대해 말하면서 이를 실천하지 않는 것은, 알면서 일부러 죄를 범하는 짓’(言義而弗行, 是犯明也.)이라고 들었습니다. 승작은 올바른 게 무엇인지 몰라서 그걸 실천하지 않은 게 아니라 봉록의 무게가 올바름을 짓눌렀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겁니다.”(綽非弗之知也, 祿勝義也. <魯問>) <사기·전경중완세가>와 <육국연표>에서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략한 기사 가운데 묵자의 활동시기와 겹치는 걸 추려보면 대략 서기 전 412년, 411년, 408년, 394년에 벌어진 전쟁이 이에 해당한다. 이 네번의 전란은 제나라의 태공 전화와 그의 오른팔이던 무장 항자우가 활동하던 시기와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묵자가 승작을 항자우의 밑으로 파견한 건 서기 전 412년 즈음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승작만 파견한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제나라의 태공 전화와 그의 장수 항자우를 만나 침략전쟁을 중지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그 대화의 내용은 <묵자·노문>편에 남아 있다. 묵자는 제나라의 침공이 두려워 불안에 떠는 노나라의 임금도 만났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제나라와 노나라를 오가며 인민에게 고통과 피해만 안겨줄 뿐인 침략전쟁을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반전 평화주의자 묵자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승작을 항자우의 가신으로 들어가도록 한 건 반전 평화활동을 펴란 뜻이었지 자기 한몸 잘먹고 잘살라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승작은 항자우를 설득하기는커녕 침략전쟁에 세번이나 참전했다. 그런 철없는 조직원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묵자가 아니다. 승작이 참전한 세 차례의 제-노전쟁이 서기 전 412년, 411년, 408년에 잇따라 벌어진 전쟁이라면, 묵자는 적어도 4∼5년 동안은 승작의 활동을 지켜보았음을 알 수 있다. 충분한 시간을 주고 기다렸음에도 그가 반전운동에 힘이 되기는커녕 묵가 집단의 이상을 저버리고 일개 전투원으로 전락하자 항자우에게 조직원을 보내 그를 직위해제하도록 한 것이다. 우리는 이 일화에서 묵가가 매우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상류사회의 단맛에 길들여진 제자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