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위한 실천에 온몸 던진 묵자 집단… 육체노동자 자의식 반영한 사상 잉태
묵자의 주장을 청문하기 전에, 그에 관한 정보를 좀더 정리해두는 게 좋겠다.
묵자의 이름은 ‘묵적’(墨翟)이다. 성이 묵씨, 이름이 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묵’은 성씨라기보다 학파의 집단적인 이름이라는 주장이 좀더 설득력 있다(江전, ‘論墨子非姓墨’<讀子치言>).
‘묵’(墨)이란 글자의 뜻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치앤무 같은 학자는 ‘묵’이 성씨가 아니라, 묵형(墨刑)이란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라고 주장한다. 고대 중국에는 이른바 ‘다섯 가지 형벌’(五刑)이 있었다. 자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다섯 가지 형벌이란, 얼굴에 죄명을 칼로 새기고 거기에 먹물을 들이는 ‘묵형’, 코를 베어내는 ‘의형’(의刑), 한쪽 발뒤꿈치(또는 발목)를 잘라내는 ‘월형’(월刑), 남자의 성기를 잘라내거나 여자의 음부를 손상시키는 ‘궁형’(宮刑), 큰 도끼로 허리를 잘라 죽이는 ‘대벽’(大벽) 등을 말한다. 하나같이 죄인의 몸을 치명적으로 손상시키는 비인격적인 신체형이다. 묵형은 그 가운데 가장 가벼운 형벌인 셈이다. 이 다섯 가지 형벌에 해당하는 죄목이 각각 500가지씩 있었다고 한다(<周禮·秋官>).
묵이란 글자에 내포된 반항적 의식
묵형은 ‘경형’(경刑)이라고도 불렀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경형을 받은 뒤 자기 성씨 대신 ‘경’자를 성처럼 달고 다닌 인물이 나온다. 항우를 도와 회남왕이 되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항우를 배반하고 유방 아래로 들어가 항우의 몰락을 재촉했던 경포(경布)란 자가 바로 그이다. 그의 본디 이름은 영포(英布)인데, 법을 어겨 경형을 받은 뒤부터 ‘경포’라고 불렸다. 이런 예가 있는 걸 보면, 묵적 또한 묵형을 받은 뒤에 ‘묵적’이라 불렸을 수 있다. 감옥 안에서 재소자들끼리 이름 대신 죄명을 부르는 경우는 오늘날에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가령 국가보안법을 어겨 옥에 갇힌 삼식이를 다른 재소자들이 “어이, 국보!”라고 부르듯이 말이다. 묵자(또는 묵가 학파)의 이름이 이런 경력에서 유래했다면, 이름부터 이미 대단히 반항적이고 반체제적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자신이 형벌을 받은 ‘전과자’임을 숨기고 싶겠지만, 묵자는 오히려 자랑스럽게 “난 묵형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내세운 셈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국가의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건 사람들이 지배집단의 정당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백성이 통치집단의 위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정말 두려워해야 할 사태가 닥친다.”(民不畏威, 則大威至. 72장) ‘정말 두려워해야 할 사태’(大威)에 대해 왕필은 이렇게 풀고 있다. “백성이 통치집단의 위세를 감당할 수 없으면 위아래가 모두 크게 허물어져 하늘의 단죄가 장차 닥칠 것이다.”(民不能堪其威, 則上下大潰矣, 天誅將至.) 통치집단이 위세를 과시하고 강제하는 수단인 형벌이 백성에게 먹혀들지 않을 때는 통치집단도 큰 위기에 빠지는 것이다. 왕필은 이를 ‘하늘의 단죄(天誅)’가 도래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묵자가 활동하던 시기야말로 이런 ‘하늘의 단죄’가 시시각각 닥쳐오고 있던 혁명의 시기였다. 이런 시기일수록 통치집단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강압수단에 더 의존하게 마련이다. <좌전>에는 “온나라의 시장바닥에서 가죽신 값은 싼데 목발 값은 비싸다”(國之諸市, 구賤踊貴. 昭公 3年)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목발(踊)이란 월형을 당해 발뒤꿈치(또는 발목)를 잘린 사람들이 신는 의족을 말한다. 얼마나 월형당한 사람들이 많았으면 시장에서 목발 값이 치솟았겠는가. <장자>에는 월형을 당해 불구가 된 사람들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가령 왕태란 인물은 노나라 사람으로 월형을 당했음에도 덕망이 높아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공자의 제자와 맞먹을 정도였다고 한다(<德充符> 5-1). 왕태는 장자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지만, 당시 형벌이 무고한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남발되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논어·공야장>편 첫머리에서 공자는 공야장이란 인물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사위로 삼을 만하다. 비록 검은 포승에 묶여 옥에 갇혔으나 그의 허물이 아니다.” 공자는 자기 딸을 ‘전과자’인 공야장에게 시집보냈다. 이런 일들은 당시 통치집단의 형벌이 얼마나 정당성과 위세를 잃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통치집단이 정당성을 잃어갈 때 형벌의 징벌효과는 점차 엷어진다. 우리는 지난 1980년대에 그런 일을 충분히 겪었다. 아무런 정당성 없이 총칼로 권좌에 오른 전두환 정권은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등 악법에 의지해 숱한 학생과 노동자들을 감옥으로 보냈지만, 그건 결국 자기 묘혈을 파는 행위였다. 묵가는 그 이름에서부터 통치집단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한 집단이었다 할 수 있다. 묵자는, 맹자의 표현에 따르면, “정수리에서 무릎까지 다 닳아 없어지더라도 세상에 이롭다면 그것을 행동에 옮긴”(摩頂放踵利天下, 爲之. <盡心> 上-26) 실천적 사상가였다. 그가 이상으로 삼은 인물은 하나라의 우(禹) 임금이다. 우는 신하 시절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13년 동안 풍찬노숙하면서 “장딴지와 정강이의 털이 다 닳아 없어질” 정도로 일했다. 그는 자기 집 앞을 세번이나 지나갔지만 잠시 들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쳤다는 일화로 유명한, 사회적 실천의 화신과도 같은 인물이다. 묵자는 우 임금의 예를 들며 제자들에게 “거칠고 허름한 옷도 감사히 입고 나막신 짚신에 만족하며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하면서 몸소 고생하는 것을 근본 도리로 삼도록” 가르쳤다. “이런 일을 할 수 없으면 우 임금의 길을 따르는 게 아니며, 묵가가 되기에 부족하다.” 묵가 집단이란 이처럼 세상을 위한 실천에 온몸을 바친 사람들이었으므로 몸에 살이 붙을 겨를이 없어 누구나 깡말랐고 살갗 또한 먹빛처럼 시커멓기 때문에 ‘묵’이란 별명이 붙었다고도 한다. 장자의 후학들이 당시 사상계를 정리한 글인 <천하>(天下)편은 묵가 학파를 이렇게 평한다. “살아서는 죽도록 일만하고 죽어서도 후한 장례 대신 박장에 만족해야 했으니, 그 길은 너무나 각박했다.”(其生也勤, 其死也薄, 其道大곡.) 순자 또한 묵가의 주장을 “척박하고 천하다”(瘠墨)고 평하고 있다. 세상의 안락 버리고 대동세상 구현 묵자 집단을 따라나선다는 건 세상의 안락과 결별하고 대동세상을 만들기 위해 갖은 고생을 자청한다는 의미였다. <묵자>에는 이 가시밭길을 자청하고 나선 이의 눈물겨운 삽화가 하나 실려 있다. “금활리는 묵자를 섬긴 지 삼년 만에 손발에 못이 박히고 터서 쩍쩍 갈라졌으며 얼굴은 누렇게 뜨고 시커멓게 그을었다. 그는 몸소 몸을 놀려 시중을 들면서 감히 뭘 묻는 일도 없었다. 묵자는 이를 매우 아프게 여겨 술과 마른 고기를 마련해 태산에 올라 풀을 뜯어 자리를 마련해 앉고는 금활리에게 술을 권했다.”(禽滑釐子事子墨子三年, 手足변지, 面目리黑, 役身給使, 不敢問欲. 子墨子其哀之, 乃管酒塊脯, 寄于大山昧유坐之, 以樵禽子. <備梯> 56-1) 시집살이 석삼년 한 것도 아니건만 세상의 바른 도리를 배우겠다고 나선 젊은 금활리의 손은 어느덧 물갈퀴만 없는 오리발로 변했다. 이를 애처롭게 여긴 묵자가 마련한 자리란 것도 조촐하기 그지없지만, 거기서 우린 질박하고 따뜻한 인간미를 느낀다. 동시대의 다른 학파들이 “각박하다”고 비판한 묵자의 검소한 실천궁행의 삶이란 이런 모습이었다. 묵자의 길을 따른다는 건 좁은 문, 가시밭길을 골라 걷는 일이었다. ‘묵’이란 글자에는 목수의 중요한 연장 가운데 하나인 ‘먹줄’이란 뜻도 있다. 먹줄은 목수들이 나무에 반듯한 금을 긋기 위해 쓰는 연장이다. 그런 연유로 먹줄은 고대 중국에서 ‘법도’를 상징하는 말처럼 쓰였다. 순자의 말을 들어보자. “먹줄은 반듯함의 극치이고, 저울은 평형의 극치이며, 컴퍼스와 자는 네모와 동그라미의 극치이고, 예는 사람의 길의 극치이다.”(繩者, 直之至; 衡者, 平之至; 規矩者, 方圓之至; 禮者, 人道之極也. <禮論> 19-8) 여기서도 먹줄이 반듯함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먹줄에는 또한 엄격한 규율로 자신을 단속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평민계급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묵가라는 이름에는 이처럼 반체제적이고 실천적인 육체노동자의 자의식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펑유란은 그리스의 철학자 안티스테네스가 자신의 학문이 ‘견유학’이라 일컬어지자 거기에 만족해 스스로 무덤 옆에 개의 석상을 세우게 한 것처럼, 묵가 집단 또한 자신들의 학풍이 ‘천인들의 길’이란 뜻에서 ‘묵도’(墨道)라 불리는 데 기꺼이 만족했다고 지적한다. 묵가가 등장할 즈음, 통치집단조차 이미 ‘민’의 위력을 자각하고 있었다. 순자의 말처럼 백성은 물과 같아서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어엎을 수도 있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묵가의 등장이 다른 제자백가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이 사상이 평민계급 자체 내에서 걸어나온 사상이라는 데 있다. 그러면 평민의 이상을 스스로 대변하려 한 묵가는 이를 어떻게 실현하려 했는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끝났는가. 이제 묵자를 발언대로 불러내기로 하자. xuande@hanmail.net

묵형은 ‘경형’(경刑)이라고도 불렀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경형을 받은 뒤 자기 성씨 대신 ‘경’자를 성처럼 달고 다닌 인물이 나온다. 항우를 도와 회남왕이 되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항우를 배반하고 유방 아래로 들어가 항우의 몰락을 재촉했던 경포(경布)란 자가 바로 그이다. 그의 본디 이름은 영포(英布)인데, 법을 어겨 경형을 받은 뒤부터 ‘경포’라고 불렸다. 이런 예가 있는 걸 보면, 묵적 또한 묵형을 받은 뒤에 ‘묵적’이라 불렸을 수 있다. 감옥 안에서 재소자들끼리 이름 대신 죄명을 부르는 경우는 오늘날에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가령 국가보안법을 어겨 옥에 갇힌 삼식이를 다른 재소자들이 “어이, 국보!”라고 부르듯이 말이다. 묵자(또는 묵가 학파)의 이름이 이런 경력에서 유래했다면, 이름부터 이미 대단히 반항적이고 반체제적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자신이 형벌을 받은 ‘전과자’임을 숨기고 싶겠지만, 묵자는 오히려 자랑스럽게 “난 묵형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내세운 셈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국가의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건 사람들이 지배집단의 정당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백성이 통치집단의 위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정말 두려워해야 할 사태가 닥친다.”(民不畏威, 則大威至. 72장) ‘정말 두려워해야 할 사태’(大威)에 대해 왕필은 이렇게 풀고 있다. “백성이 통치집단의 위세를 감당할 수 없으면 위아래가 모두 크게 허물어져 하늘의 단죄가 장차 닥칠 것이다.”(民不能堪其威, 則上下大潰矣, 天誅將至.) 통치집단이 위세를 과시하고 강제하는 수단인 형벌이 백성에게 먹혀들지 않을 때는 통치집단도 큰 위기에 빠지는 것이다. 왕필은 이를 ‘하늘의 단죄(天誅)’가 도래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묵자가 활동하던 시기야말로 이런 ‘하늘의 단죄’가 시시각각 닥쳐오고 있던 혁명의 시기였다. 이런 시기일수록 통치집단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강압수단에 더 의존하게 마련이다. <좌전>에는 “온나라의 시장바닥에서 가죽신 값은 싼데 목발 값은 비싸다”(國之諸市, 구賤踊貴. 昭公 3年)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목발(踊)이란 월형을 당해 발뒤꿈치(또는 발목)를 잘린 사람들이 신는 의족을 말한다. 얼마나 월형당한 사람들이 많았으면 시장에서 목발 값이 치솟았겠는가. <장자>에는 월형을 당해 불구가 된 사람들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가령 왕태란 인물은 노나라 사람으로 월형을 당했음에도 덕망이 높아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공자의 제자와 맞먹을 정도였다고 한다(<德充符> 5-1). 왕태는 장자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지만, 당시 형벌이 무고한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남발되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논어·공야장>편 첫머리에서 공자는 공야장이란 인물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사위로 삼을 만하다. 비록 검은 포승에 묶여 옥에 갇혔으나 그의 허물이 아니다.” 공자는 자기 딸을 ‘전과자’인 공야장에게 시집보냈다. 이런 일들은 당시 통치집단의 형벌이 얼마나 정당성과 위세를 잃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통치집단이 정당성을 잃어갈 때 형벌의 징벌효과는 점차 엷어진다. 우리는 지난 1980년대에 그런 일을 충분히 겪었다. 아무런 정당성 없이 총칼로 권좌에 오른 전두환 정권은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등 악법에 의지해 숱한 학생과 노동자들을 감옥으로 보냈지만, 그건 결국 자기 묘혈을 파는 행위였다. 묵가는 그 이름에서부터 통치집단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한 집단이었다 할 수 있다. 묵자는, 맹자의 표현에 따르면, “정수리에서 무릎까지 다 닳아 없어지더라도 세상에 이롭다면 그것을 행동에 옮긴”(摩頂放踵利天下, 爲之. <盡心> 上-26) 실천적 사상가였다. 그가 이상으로 삼은 인물은 하나라의 우(禹) 임금이다. 우는 신하 시절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13년 동안 풍찬노숙하면서 “장딴지와 정강이의 털이 다 닳아 없어질” 정도로 일했다. 그는 자기 집 앞을 세번이나 지나갔지만 잠시 들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쳤다는 일화로 유명한, 사회적 실천의 화신과도 같은 인물이다. 묵자는 우 임금의 예를 들며 제자들에게 “거칠고 허름한 옷도 감사히 입고 나막신 짚신에 만족하며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하면서 몸소 고생하는 것을 근본 도리로 삼도록” 가르쳤다. “이런 일을 할 수 없으면 우 임금의 길을 따르는 게 아니며, 묵가가 되기에 부족하다.” 묵가 집단이란 이처럼 세상을 위한 실천에 온몸을 바친 사람들이었으므로 몸에 살이 붙을 겨를이 없어 누구나 깡말랐고 살갗 또한 먹빛처럼 시커멓기 때문에 ‘묵’이란 별명이 붙었다고도 한다. 장자의 후학들이 당시 사상계를 정리한 글인 <천하>(天下)편은 묵가 학파를 이렇게 평한다. “살아서는 죽도록 일만하고 죽어서도 후한 장례 대신 박장에 만족해야 했으니, 그 길은 너무나 각박했다.”(其生也勤, 其死也薄, 其道大곡.) 순자 또한 묵가의 주장을 “척박하고 천하다”(瘠墨)고 평하고 있다. 세상의 안락 버리고 대동세상 구현 묵자 집단을 따라나선다는 건 세상의 안락과 결별하고 대동세상을 만들기 위해 갖은 고생을 자청한다는 의미였다. <묵자>에는 이 가시밭길을 자청하고 나선 이의 눈물겨운 삽화가 하나 실려 있다. “금활리는 묵자를 섬긴 지 삼년 만에 손발에 못이 박히고 터서 쩍쩍 갈라졌으며 얼굴은 누렇게 뜨고 시커멓게 그을었다. 그는 몸소 몸을 놀려 시중을 들면서 감히 뭘 묻는 일도 없었다. 묵자는 이를 매우 아프게 여겨 술과 마른 고기를 마련해 태산에 올라 풀을 뜯어 자리를 마련해 앉고는 금활리에게 술을 권했다.”(禽滑釐子事子墨子三年, 手足변지, 面目리黑, 役身給使, 不敢問欲. 子墨子其哀之, 乃管酒塊脯, 寄于大山昧유坐之, 以樵禽子. <備梯> 56-1) 시집살이 석삼년 한 것도 아니건만 세상의 바른 도리를 배우겠다고 나선 젊은 금활리의 손은 어느덧 물갈퀴만 없는 오리발로 변했다. 이를 애처롭게 여긴 묵자가 마련한 자리란 것도 조촐하기 그지없지만, 거기서 우린 질박하고 따뜻한 인간미를 느낀다. 동시대의 다른 학파들이 “각박하다”고 비판한 묵자의 검소한 실천궁행의 삶이란 이런 모습이었다. 묵자의 길을 따른다는 건 좁은 문, 가시밭길을 골라 걷는 일이었다. ‘묵’이란 글자에는 목수의 중요한 연장 가운데 하나인 ‘먹줄’이란 뜻도 있다. 먹줄은 목수들이 나무에 반듯한 금을 긋기 위해 쓰는 연장이다. 그런 연유로 먹줄은 고대 중국에서 ‘법도’를 상징하는 말처럼 쓰였다. 순자의 말을 들어보자. “먹줄은 반듯함의 극치이고, 저울은 평형의 극치이며, 컴퍼스와 자는 네모와 동그라미의 극치이고, 예는 사람의 길의 극치이다.”(繩者, 直之至; 衡者, 平之至; 規矩者, 方圓之至; 禮者, 人道之極也. <禮論> 19-8) 여기서도 먹줄이 반듯함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먹줄에는 또한 엄격한 규율로 자신을 단속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평민계급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묵가라는 이름에는 이처럼 반체제적이고 실천적인 육체노동자의 자의식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펑유란은 그리스의 철학자 안티스테네스가 자신의 학문이 ‘견유학’이라 일컬어지자 거기에 만족해 스스로 무덤 옆에 개의 석상을 세우게 한 것처럼, 묵가 집단 또한 자신들의 학풍이 ‘천인들의 길’이란 뜻에서 ‘묵도’(墨道)라 불리는 데 기꺼이 만족했다고 지적한다. 묵가가 등장할 즈음, 통치집단조차 이미 ‘민’의 위력을 자각하고 있었다. 순자의 말처럼 백성은 물과 같아서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어엎을 수도 있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묵가의 등장이 다른 제자백가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이 사상이 평민계급 자체 내에서 걸어나온 사상이라는 데 있다. 그러면 평민의 이상을 스스로 대변하려 한 묵가는 이를 어떻게 실현하려 했는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끝났는가. 이제 묵자를 발언대로 불러내기로 하자. xuande@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