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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몸으로 생각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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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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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노동의 자의식 드러나는 묵가 철학… 정신은 몸을 가두어야만 하는가

인류의 역사에서 사유는 대체로 정신노동자의 전유물이었다. 인류 문화의 여명기부터 존재했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업은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다. 극단적인 정신노동자랄 수 있는 철학자들은 대체로 육체노동에 대한 정신노동의 우위를 당연시해왔다. 가령, 잘 알려진 바대로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는 소수의 정신노동자인 수호자계급이 군인계급과 농민·수공업자 등 생산자계급을 다스린다. 수호자계급은 머리에, 생산자계급은 수족에 비유된다. 맹자 또한 육체노동에 대한 정신노동의 우위를 드러내놓고 주장했다. “어떤 이는 마음을 써서 수고하고, 어떤 이는 힘을 써서 수고한다. 마음을 써서 수고하는 이는 남을 다스리고, 힘을 써서 수고하는 이는 남의 다스림을 받는 법이다.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남을 먹여살리고, 남을 다스리는 사람은 남에게 얻어먹는 게 하늘아래 일반적인 이치이다.”(或勞心, 或勞力. 勞心者治人, 勞力者治於人. 治於人者食人, 治人者食於人, 天下之通義也. <등文公> 上-4)” ‘마음을 써서 수고하는 이’(勞心者)란 바로 정신노동자를 말하며, ‘힘을 써서 수고하는 이’(勞力者)란 바로 육체노동자를 말한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업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나 정신노동이 육체노동을 지배하고 정신이 육체를 지배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는 참이 아니다. 정신의 판단이 육체의 판단보다 더 옳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우리의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논리적으로 마땅함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까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육체가 내리는 판단도 정신이 내리는 판단 못지않은 가치가 있다. 육체는 소멸의 위협과 마주치면 뒤로 물러선다. 우리는 생각하는 습관보다 살아가는 습관을 먼저 배우고 익힌다.”


철학사에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경계를 오가며 삶을 영위했던 이들이 몇 있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중국에서는 아마 묵자나 왕용계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고, 유럽에서는 에픽테토스나 스피노자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에픽테토스(55?∼135?)는 엄마가 노예였기 때문에 자연히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그의 주인은 네로 황제의 행정비서관이던 에파프로디투스란 사람이었다. ‘말하는 도구’인 노예이면서 사색을 좋아한다는 건 불행을 불러들이는 짓일 수 있다. 그는 노예노동에 종사하는 대신 스토아철학자 무소니우스 루푸스의 강의를 듣기를 더 좋아했다. 그는 다리가 불구였는데, 주인이 게으르다는 이유로 그의 다리를 분질렀다고 하기도 하고, 날 때부터 불구였다고 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노예로써 썩 쓸모있는 ‘생산수단’이 아니었던 그는 덕분에 노예신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자유인이 된 에픽테토스는 로마에서 철학을 강의하다 지식인을 혐오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추방령에 따라 그리스 북서쪽의 니코폴리스란 곳에 정착한 뒤 학원을 세워 철학을 강의했다. 로마를 대표하는 현명한 황제 예닐곱을 꼽을 때 늘 빠지지 않는 현자이자 <명상록>의 작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그의 제자였다. 에픽테토스는 노예 출신 철학자였지만, 그가 사색한 것은 ‘세계의 시민’으로서의 삶이었다. 그는 평생 책을 한권도 쓰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인 플라비우스 아리아누스가 수집한 어록집이 네권 남아 있다. 그의 글은 중국이나 인도의 고전을 읽는 듯 독자의 마음에 평정을 준다. 그의 사유세계에서는, 노예든 황제든 거역할 수 없는 자연과 운명의 힘 앞에 평등하다. 그러나 거기서 ‘노예’ 출신 철학자로서의 자의식을 읽어내기는 어렵다.

에픽테토스처럼, 정신노동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노예노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정신노동의 자유를 위해 스스로 육체노동으로 삶을 이어간 예도 없지 않다. 베네딕투스 스피노자(1632∼77)가 그런 예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부유한 유대인 상인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라비가 될 뻔했으나, 젊고 자유로운 그의 영혼은 유대교의 정통 교리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유대교의 유일신 교리와 어긋날 뿐 아니라 구교와 신교 등 어느 종파의 신봉자라도 자신의 믿음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일 범신론 철학으로 인해 “유물론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유대교에서 파문당했다. 당시 유대인사회에서 파문이란 유대인의 경제공동체로부터도 따돌림당함을 뜻했다. 그는 안경알을 갈아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자기 사상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당시 프랑스 왕인 루이 14세의 연금 지급 제안도 거절했고,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교수로 갈 수 있었으나 그것마저 포기했다. 안경알을 갈 때 나오는 유리가루는 이 성실한 철학자의 폐부에 박혀 마흔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도록 만들었다. 그는 사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 권력과 제도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안락한 정신노동 대신 육신을 갉아먹는 육체노동을 선택한, 조금은 예외적인 정신노동자였다.

육체노동을 선택한 스피노자

에픽테토스나 스피노자에게서 가시밭길을 걸어간 철인의 성실함을 읽을 수는 있으나 육체노동자로서의 자의식을 읽기는 어렵다. 그런 자의식을 읽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의 유령이 유럽의 한복판을 어슬렁거리며 걸어다니던 19세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포이에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언>에서 요제프 디츠겐(1828∼88)이란 독일 노동자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어느 육체노동자가 쓴 정신노동의 본질>(1869)이라는 매우 도전적인 제목의 책을 썼다. 이 책을 직접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엥겔스의 친절한 소개에 따르면 디츠겐은 당대 사회주의자들과 교분이 없었음에도 스스로 ‘유물론적 변증법’ 철학에 이르렀다고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이란 헤겔 <정신현상학>의 ‘관념론적 변증법’을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 디츠겐은 헤겔 철학을 공부할 기회가 없었음에도 마르크스·엥겔스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육체노동이 정신노동의 지배에 반기를 들기까지는 매우 긴 철학사의 여정이 필요했다. 그것은 정신노동인 철학이 스스로의 지배를 부정하는 일일 수 있다. 물론 이 명제에 동의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신봉할 필요는 없다. 사회주의의 경제환원주의와 전체주의적 발상은 매우 거칠고 위험한 논리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사회주의는 여전히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에 안주하고 있고, 관념론의 이분법을 유물론의 이분법으로 대치했을 뿐이다.

조금 에둘러왔지만, 우리는 고대 중국의 묵가 철학에서도 육체노동의 자의식을 읽을 수 있다. 묵자라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그가 목수라는 직업을 가진 육체노동자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가 일으킨 묵가 학파는 유럽 근대의 사회주의 사상과 많은 점에서 닮았다. 양의 동서와 이천년의 세월을 격해 있는 두 사상을 수평 비교하는 일은 무모한 작업이지만, 인간의 삶과 노동과 문화에 대한 서로 다른 통찰이라는 점에서 거기에 들이는 수고가 아깝지만은 않으리라고 본다.

묵가의 창시자인 묵적이라는 인물의 삶에 대해 우리는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사마천의 <사기>조차 그에 대해서는 매우 간략하다. 별도의 열전을 마련하지도 않았고, 다만 <맹자순경열전> 끄트머리에 다음과 같은 짧은 언급이 붙어 있을 뿐이다. “묵적은 송나라의 대부로서 방어술에 능했고 씀씀이를 아낄 것을 주장했다. 어떤 사람은 공자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라 하고, 다른 사람은 그보다 나중이라고 한다.”(蓋墨翟, 宋之大夫, 善守禦, 爲節用. 或曰竝孔子時, 或曰在其後. <孟子荀卿列傳>) 겨우 스물네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풀뿌리 하나에도 의미가 있을지언데

묵가 학파의 기초 자료인 <묵자>는 묵자와 그의 후학들의 기록이다. 여기에는 천민 출신 목공 노동자인 묵자의 자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는 일화가 남아 있다. 그가 초나라 헌혜왕을 찾아갔을 때다. 혜왕은 묵자가 천민 출신이기 때문에 만나주지 않고 대신 신하인 목하로 하여금 만나게 했다. 목하는 묵자의 주장을 들은 뒤, “좋은 얘기이긴 하지만 당신이 천민 출신이기 때문에 헌혜왕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묵자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천한 사람의 말이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음은, 비유하자면 약을 쓰는 일과 같습니다. 풀뿌리라 하더라도 천자가 그걸 먹고 병을 다스릴 수 있다면 어찌 한낱 풀뿌리라 무시하여 먹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농부들은 공경대인들에게 세금을 바치고, 공경대인들은 그걸로 술과 단술을 빚고 제수용품을 만들어 상제와 귀신들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어찌 천한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제사용품으로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비록 천한 사람이더라도, 위로는 농부에 비겨보고 아래로는 약에 비겨볼 때, 한낱 풀뿌리만도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唯其可行, 譬若藥然. 草之本, 天子食之, 以順其疾, 豈曰‘一草之本’而不食哉? 今農夫入其稅於大人, 大人爲酒醴자盛, 以祭上帝鬼神, 豈曰‘賤人之所爲’而不享哉? 故雖賤人也, 上比之農, 下比之藥, 曾不若一草之本乎? <貴義>)

xuand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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