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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자신에 맞서 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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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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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노장사상이 공유하는 덕쟁의 논리… 중국 사상의 안팎 이루는 주류로 자리매김

인류의 역사에 등장한 어떤 논리도 일리는 있지만, 또한 어떤 논리도 배타적으로 유일하게 진리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 세계는 서양 전통에서 나온 사유의 틀이 지배하고 있지만, 비유럽 지역의 사유라고 해서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관점에서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두 철인 공자 할아버지와 노자 할아버지의 생각을 오늘날 어떤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공자와 노자는 흔히 매우 대조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공자는 예의범절이나 따지는 고리타분한 할배라는 인상이 있고, 노자는 어딘가 신비로운 지혜를 간직한 늙은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인상만 다른 게 아니라 세계관도 다른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점이 훨씬 더 많다. 두 사람의 사유는 같은 문화권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르기는 어렵다. 두 사람의 사유가 얼음과 불처럼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것으로 윤색된 것은 송유(宋儒)들의 작품이다. ‘정통’ 따지길 좋아하는 송나라 유학자들이 유학만을 오로지 ‘진리’로 여기고 노장 사상 등 다른 사유를 ‘이단’이라 치부하여 억누르려 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적 배경에 근본은 서로 통해


송나라 이전, 특히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육조 시기에는 공자와 노자가 대체 뭐가 다르느냐는 논의가 무성했다. 남조의 문인 유의경(403∼444)이 지은 <세설신어>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태위 벼슬을 하던 왕이보란 사람이 완선자에게 물었다. “노장과 성인(공자)의 가르침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이 물음에 대해 왕이보는 세 마디로 답했다. “아마 같지 않을까요?”(將無同?) 왕이보는 이 답을 훌륭하다고 여겨 그를 부관으로 삼았다. 세상사람들은 그를 “세 마디 부관”(세 마디 말로 부관직을 얻었다는 뜻)이라고 놀렸다. 위개란 사람은 그를 이렇게 놀렸다. “한 마디만 해도 쓰일 수 있었을 텐데, 어찌 세 마디씩이나 입을 놀렸단 말인가?” 그러자 완선자는 이렇게 되받았다. “진실로 천하의 인망을 얻는다면 아무 말 하지 않더라도 쓰일 터인데, 한 마디 입을 놀릴 일은 또 어찌 있겠는가?”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은 벗이 되었다. (<世說新語·文學>)

“장무동”은 인구에 회자하는 명구다. 공자와 노자의 가르침이 “같다”고 단정하는 대신, 완곡하게 ‘다를 게 뭐가 있겠느냐’고 반문한 웅숭깊은 표현이다. 그렇다면 공자와 노자가 어떤 점에서 같은가. 이에 대해서는 왕필의 재미있는 논의가 역시 <세설신어>에 실려 있다(왕필은 <노자>의 주석서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는 <노자주>를 이십대에 완성한 위진시기의 대표적 노장사상가다).

왕필이 배휘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배휘가 물었다. “대저 ‘없음’이라는 것은 진실로 온갖 것이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성인(공자)은 이에 대해서는 잘 말하려 하지 않았는데, 노자는 끊임없이 ‘없음’에 대해 말했으니, 어째서 그런가?” 왕필은 이렇게 대답했다. “성인(공자)은 ‘없음’을 몸으로 깨쳤습니다(體無). 또 ‘없음’이란, 말로 풀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있음’에 대해서만 말했습니다. 그러나 노자와 장자는 ‘있음’의 세계를 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자신들이 모자란 것(없음)에 대해 토를 달았던 겁니다.”(<文學>)

공자는 없음을 몸으로 깨친 사람이기 때문에 없음에 대해 특별히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에게 없음의 사유를 전해주기 위한 방편으로 있음의 세계에 대해 말했다는 얘기다. 반면에 노자와 장자는 있음의 세계를 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입만 열면 자신에게 모자란 없음의 세계에 대해 논했다는 얘기다. 왕필이 정말 이런 얘기를 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가 유가와 도가사상을 일치시키려 한 철학자라는 점에서 있을 법한 얘기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공자를 높이고 노자와 장자를 낮추는 듯하다. 그러나 예민한 유학자라면 이 이야기에 반감을 느낄 것이다. 공자를 높이고는 있지만, 그가 말하는 공자는 이미 ‘도가적’으로 해석된, ‘없음을 체득한 성인’으로서의 공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공자를 노장사상의 흐름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논의 또한 사실은 유가와 도가의 구분이라는 후대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다. 공자와 노자는 모두 ‘없음’을 사유의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위의 일화는 매우 적절하게 공자와 노자의 중요한 공통점을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자기 완성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공자는 “멋대로 억측하지 않았고, 뭘 절대적으로 긍정하지 않았으며, 뭘 외통수처럼 고집하지 않았고, 홀로 옳다고 내세우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된사람(군자)은 하늘아래 일을 하면서 죽어도 이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법이 없고, 또 이렇게 해서는 죽어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법도 없다. 다만 마땅함을 따를 뿐이다.” 공자의 이런 발언은, 인간의 사유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노자의 없음의 철학과 통한다. 어떤 사태나 상황에 부닥쳤을 때, 자기 머리 속에 이성적으로 미리 마련해둔 어떤 원리를 가지고 대처하는 게 아니라, 그 사태 안에서 마땅함을 찾는 공자의 정신은, 인간의 사유로 자연을 재단하는 대신 자연 스스로의 흐름을 읽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노자의 생각과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자신의 이성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 대신 자연 또는 하늘의 뜻을 물어 거기서 어떤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태도는 고대 중국인의 공통된 사유 가운데 하나다. <주역>에서도 그런 사유를 찾아볼 수 있다. 전국시기에 쓰여진, <역경>에 대한 풀이글인 <계사전>은 “거룩함에는 모서리가 없고 생성변화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神無方而易無體)고 말한다. 그래서 <계사전>은 <주역>에 나오는 이야기를 “교과서로 삼아서는 안 된다”(不可爲典要)고 말한다. 바둑에서 정석을 외운 다음에는 잊어버리라는 말이 있다. 정석의 정신을 배워서 그걸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지 막무가내로 외운 대로 써먹다가는 낭패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계사전>의 말은 이 정신과도 통한다. 공자와 노자, 그리고 <주역>의 사유는 먼저 어떤 원리 원칙을 만들어 그것으로 자연과 세상을 재단하는 대신, 어떤 상황에 부닥쳤을 때 인간의 사유가 닿지 않는 ‘없음’의 영역에 조회해서 적절함을 구하라는 메시지를 공통으로 지니고 있다.

자신의 이성을 최대한 발휘해 어떤 원리 원칙을 만들어, 다른 사람이 세운 원리 원칙과 맞서 싸우는 방식은 ‘논쟁’을 낳는다. 이때는 논박당하지 않는 원리 원칙이 승리한다. 그러나 이런 원리 원칙을 미리 만드는 대신 사태에 부닥친 뒤 거기서 어떤 판단이나 행동, 자기 완성의 원리를 끌어내려는 사람들은 사회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덕쟁’을 내세우게 된다.

공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걸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하고 있는지를 근심하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學而> 1-16),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할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게 알아줄 구석이 있을 것을 구하라”(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里仁> 4-14)고 말한다. 그는 또 “잘못된 일을 보면 안으로 자신과 법정투쟁을 벌이라!”(見其過而內自訟. <公冶長> 26)고 요구한다. 공자는 남과 다투는 대신 자신과 먼저 싸워 이길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덕쟁의 핵심이다. 덕쟁은 남과 싸우는 대신 자신과 싸우는 일이다.

노자 또한 “참사람은 늘 자기 몸을 다른 사람의 뒤에 두지만 그 몸이 앞서게 되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지만 그 몸이 잘 지켜진다”고 말한다. 자기 몸을 다른 사람의 뒤에 두라는 노자의 요구 또한 남과 앞을 다툴 게 아니라 자신과 먼저 싸우라는 덕쟁의 논리를 표현한 것이다.

그늘과 양지에서 메인 스트림 형성

논쟁은 사람을 마음에서 설복시키지는 못한다. 그래서 왕필은 <주역주>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려분별하여 벗을 구하면 사람들과 능히 하나로 어울릴 수 없다. 한마음으로 모든 이들과 공감하면 사려분별하지 않아도 그들이 다가온다.”(思以求朋, 未能一也. 一以感物, 不思而至.) 사려분별함으로써 벗을 구하면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만이 나를 따른다. 또는 그런 사람들에 둘러싸이게 된다. 그런 작은 그릇으로는 천하를 도모할 수 없다는 게 고대 중국 철인들의 공통된 감각이었다.

지난 호의 글에서는 노자의 사유가 중국 전통사회에서 비주류로 남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없음에 조회하는 태도, 남과 다투는 대신 자신과 싸울 것을 요구하는 덕쟁의 사유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자와 노자의 사상은 중국 사상의 주류를 함께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음과 양이 하나의 태극을 이루듯, 노장사상은 그늘에서 유가사상은 양지에서 중국 사상의 메인 스트림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덕쟁’의 논리가 뭔가 모호하고 객관적인 표준이 될 수 없다고 본 이들도 없지 않았다. 이들이야말로 중국 철학사에서 진정한 소수자인 셈이다. 이제 이들의 목소리를 검토해볼 때다.

xuand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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