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으로 인해 빛나는 존재의 의미… 반문화의 논리로 철저한 반성 요구
이제 노자의 무명론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고대 중국에서 ‘이름’을 둘러싼 거대한 논쟁이 벌어졌던 시절, 공자가 “이름 바로잡기”(正名)를 자신의 첫 번째 정치적 과제로 내세우던 즈음, 노자는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이름으로도 자연의 스스로 그러한 질서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연의 스스로 그러한 질서를 노자는 ‘길’이라 불렀다. 그 길은 늘 이름이 없거나(道常無名. 32장), “늘 이름 없음 뒤에 숨어 있다”(道隱無名. 41장). 길에 이름이 없다는 말은, 자연에는 인간의 어떤 이성적 사유로도 다 헤아릴 수 없는 잉여의 영역이 늘 남아 있다는 얘기다. 노자가 “이름 없음”(無名)이나 “없음”(無)이란 말을 통해 드러내려 한 것은 이런 인간 사유의 바깥에 놓여 있는 잉여이다.
있음의 그림자로서의 없음을 위하여
“없음”(無)은 노자의 사유 한가운데에 자리한 생각이다. 그래서 노자를 ‘없음(무)의 철학자’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크게 세 가지 상황에서 ‘없다’는 말을 쓴다. 첫째는 어떤 곳에 있던 무엇이 사라졌을 때 그 말을 쓴다. “책상 위에 떡이 있었는데, 내가 먹어치워서 지금은 없다”고 할 때가 그런 예이다. 둘째는 세상에 아예 존재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그 말을 쓴다. “이 세상에 봉황이란 동물은 없다”고 할 때가 그런 예이다. 봉황이란 동물이 있다가 멸종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본디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셋째는 ‘있음(존재)의 그림자’로서의 없음이다. 노자가 말하는 ‘없음’이란 ‘있음의 그림자’로서의 없음이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서른개의 바퀴살이 바퀴통으로 모인다. 그 빈 곳이 있음으로 수레바퀴의 쓰임이 있다. 진흙을 빚어 질그릇을 만들 때, 그 빈 곳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문을 내고 들창을 뚫어 방을 만들 때, 그 빈 곳에 방의 쓰임이 있다. 그러므로 있음이 이로울 수 있는 것은 없음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三十輻共一곡, 當其無, 有車之用. 연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유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11장) 우리는 진흙을 빚어 질그릇을 만든다. 우리가 만든 것은 오목한 진흙덩어리다. 이 물건이 정작 쓰이는 곳은 빈 곳이다. 빈 곳이 없다면 그릇으로 쓰일 수 없다. 우리가 진흙으로 빚은 건 빈 곳의 테두리지만, 질그릇이라는 존재는 이미 빔을 껴안고 있다. 질그릇의 쓰임은 우리가 진흙을 주무를 때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 우리가 행위하지 않은 곳, 그곳에서 작용한다. 인간의 사유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주 삼라만상에 대해 사고하고 논리를 구성하지만, 그 삼라만상이 제각기 껴안고 있는 ‘빔’이나 ‘없음’에 대해서는 논리를 구성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사유를 구성하더라도 그 사유가 미치지 않는 빈 곳이 잉여로 남아 있다. 노자가 “이름 없음”을 말한 까닭은 여기 있다. 제자백가들이 아무리 날카롭고 빛나는 논리를 내세우더라도 세상에 대한 인간의 논리는 늘 잉여를 남긴다. 그 잉여의 영역을 노자는 “이름 없음”이라고 부른 것이다. 노자의 사유에서 ‘있음’과 ‘없음’의 관계는 오늘날 논쟁거리의 하나다. 이 논쟁은 두 가지 관점으로 갈린다. 하나는 노자가 말하는 ‘있음’과 ‘없음’이 서로 상대적인 관계에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노자에게 ‘없음’이 좀더 근원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주장이다. <노자>에는 이 두 가지 관점이 섞여 있는 듯하다. 가령 2장에서는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는다”(有無相生)고 말한다. 그렇다면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상대적일 뿐, 없음에 더 근원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있음이 없다면 없음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40장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 아래 온갖것들은 있음에서 생겨나고,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난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있음과 없음이 서로 상대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2장에 주목하고, 없음이 있음보다 근원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40장에 주목한다. 참으로 결판이 나기 어려운 말싸움이다. 없음과 있음, 그 근원은 무엇인가
그런데 최근 있음과 없음이 서로 상대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자료가 등장했다. 지난 1993년 겨울 중국 후베이성 징먼시 궈디앤의 전국시기 초나라 무덤에서 나온 죽간본 <노자>가 그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노자> 판본인 죽간본의 40장은 통행본과 달리 이렇게 쓰여 있다. “하늘 아래 온갖것들은 있음에서 생겨나고, 없음에서 생겨난다.”(天下之勿生於又, 生於亡. 여기서 ‘勿’은 ‘物’, ‘又’는 ‘有’, ‘亡’은 ‘無’의 뜻이다.) 죽간본은 통행본에서 한 글자가 빠졌을 뿐이지만, 뜻빛깔은 크게 다르다. 통행본은 없음에서 있음이 생겨나고 있음에서 다시 만물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지만, 죽간본은 “만물이 있음에서 생겨나며 또한 없음에서 생겨난다”고 하여 있음과 없음을 나란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첸구잉(陳鼓應)이나 왕중장(王中江) 같은 연구자들은 이를 근거로 노자의 사유에서 없음이 있음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자의 사유에서 있음과 없음이 동등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에서 인용한 구절을 다시 음미해보자. “있음이 이로울 수 있는 것은 없음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릇이라는 진흙덩어리가 쓸모있을 수 있는 것은 없음, 빔 덕분이다. 노자는 또 길이 이름 없음 뒤에 숨어 있다고 말한다. 이를 보면 노자가 있음보다 없음에 방점을 찍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없음이 있음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전통적인 해석은 자칫 노자가 말하는 ‘없음’을 절대화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노자가 ‘없음’에 대해 말한 까닭이 바로 인간의 어떤 논리를 절대화하는 잘못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떠올린다면, 이런 해석이 노자의 본뜻과는 거리가 먼 것임은 자명하다.
노자의 사유에서 있음과 없음은 우선 서로 의존하고 서로를 낳는 관계다. 없음은 존재의 그림자다. 그러나 어떤 존재도 없음으로 인해 작용과 쓸모를 지닌다. 그렇다면 사실은 존재가 없음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 노자가 말하는 없음은 길이 작용하는 통로이지만, 인간의 논리로 구성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니다. 죽간본 40장은 그 자체 매우 간명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있음과 없음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모든 것은 있음에서 나오고 또한 없음에서 나온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삼라만상은 모두 어떤 존재(있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없음을 껴안고 있다는 뜻이다.
없음의 사유를 인간사회에 적용했을 때 이 논리는 무위의 정치에 대한 요구로 나타난다. 무위의 정치에 대한 요구는,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통치자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낮잠 자란 얘기가 아니다. 노자는 세상의 모든 ‘지도자 동지’들에게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요구한다. “참사람은 일삼아 하는 일이 없는 데 처하며, 말을 떠난 가르침을 행한다. 온갖 것이 이뤄지지만 그 위에 군림하려 들지 않고, 무얼 창조해내지만 그걸 소유하려 들지 않으며, 남을 위해주지만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공이 이뤄지더라도 거기 눌러앉으려 들지 아니한다. 대저 오로지 거기 눌러앉으려 들지 아니하므로 오히려 영원히 거기 거할 수 있으리라.”(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2장) 무위의 정치란 바로 이런 것이다. 명예도 이름도 자취도 공적도 남기려 들지 말고 혼신의 힘을 다해 세상의 이름 없는 머슴으로 일하다 티끌로 사라지라. 그래야 참된 정치가라 할 수 있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정치를 하겠다는 꿈도 꾸지 말라. 노자가 요구한 무위의 정치란 바로 이런 내용이다.
문화의 균형추 노릇한 노자의 사유
노자의 무명론은 인간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반문화의 논리다. 그는 말한다.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의 수를 적게 하라. 갖가지 편리한 도구가 있다 해도 쓰지 않도록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무겁게 여겨 멀리 옮겨다니지 않도록 하라. 배와 수레가 있더라도 탈 일이 없도록 하고, 갑옷과 병장기가 있더라도 무력시위할 일이 없도록 하라.”(小國寡民. 使有什佰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80장) 인류가 만들어낸 어떤 문화도 그 안에 반문화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 반문화의 논리는 사실은 그 문화의 생명력을 지켜주는 균형추이다. 반문화의 목소리를 몰아내고 소탕하는 문화는 스스로의 생명을 단축시킬 뿐이다. 중국의 역사에서 주류의 자리는 줄곧 유가가 차지해왔지만, 노장사상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며 문화의 균형추 노릇을 했다. 노장사상 자체가 그릇의 빈 곳처럼 작용한 셈이다. 세상에는 주류가 되고 주도권을 쥐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주류가 되고 주도권을 쥐는’ 과정에서 세상을 바꾸고자 한 본디 뜻이 손상을 입기도 한다. 노자는 세상의 주류에 포섭되는 일을 기꺼이 포기한 채,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해 가장 철저한 반성을 요구한 사유의 한 가지 표본이라 할 수 있다.
xuande@hanmail.net

“서른개의 바퀴살이 바퀴통으로 모인다. 그 빈 곳이 있음으로 수레바퀴의 쓰임이 있다. 진흙을 빚어 질그릇을 만들 때, 그 빈 곳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문을 내고 들창을 뚫어 방을 만들 때, 그 빈 곳에 방의 쓰임이 있다. 그러므로 있음이 이로울 수 있는 것은 없음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三十輻共一곡, 當其無, 有車之用. 연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유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11장) 우리는 진흙을 빚어 질그릇을 만든다. 우리가 만든 것은 오목한 진흙덩어리다. 이 물건이 정작 쓰이는 곳은 빈 곳이다. 빈 곳이 없다면 그릇으로 쓰일 수 없다. 우리가 진흙으로 빚은 건 빈 곳의 테두리지만, 질그릇이라는 존재는 이미 빔을 껴안고 있다. 질그릇의 쓰임은 우리가 진흙을 주무를 때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 우리가 행위하지 않은 곳, 그곳에서 작용한다. 인간의 사유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주 삼라만상에 대해 사고하고 논리를 구성하지만, 그 삼라만상이 제각기 껴안고 있는 ‘빔’이나 ‘없음’에 대해서는 논리를 구성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사유를 구성하더라도 그 사유가 미치지 않는 빈 곳이 잉여로 남아 있다. 노자가 “이름 없음”을 말한 까닭은 여기 있다. 제자백가들이 아무리 날카롭고 빛나는 논리를 내세우더라도 세상에 대한 인간의 논리는 늘 잉여를 남긴다. 그 잉여의 영역을 노자는 “이름 없음”이라고 부른 것이다. 노자의 사유에서 ‘있음’과 ‘없음’의 관계는 오늘날 논쟁거리의 하나다. 이 논쟁은 두 가지 관점으로 갈린다. 하나는 노자가 말하는 ‘있음’과 ‘없음’이 서로 상대적인 관계에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노자에게 ‘없음’이 좀더 근원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주장이다. <노자>에는 이 두 가지 관점이 섞여 있는 듯하다. 가령 2장에서는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는다”(有無相生)고 말한다. 그렇다면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상대적일 뿐, 없음에 더 근원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있음이 없다면 없음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40장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 아래 온갖것들은 있음에서 생겨나고,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난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있음과 없음이 서로 상대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2장에 주목하고, 없음이 있음보다 근원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40장에 주목한다. 참으로 결판이 나기 어려운 말싸움이다. 없음과 있음, 그 근원은 무엇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