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의 굴레에 빠지는 중심주의의 폐해… 중심에 대한 집착 버리는 위대한 전복
모든 중심주의는 열린 사유를 가로막는, 우리의 뇌수에 박힌 압정이다. 인간중심주의, 종족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남근중심주의는 오늘날까지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그럴듯한 편견덩어리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우리의 의식 안에 댓진처럼 진득하게 배어 있다. 중심주의는 단지 그릇된 사유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소통을 가로막는 고약한 걸림돌이다.
중심주의는 이분법(bifurcation)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가령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이라는 영장류를 우주의 중심에 두고 우주만물을 거기 종속시킨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을 ‘헬라스’라 부르고 그리스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오랑캐들은 모두 ‘바르바로’(헬라스어를 쓰지 않는 이)라 불렀다(‘나눔’을 사물인식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발전시킨 플라톤은 그답게 이런 헬라스/바르바로의 이분법이 그릇된 것임을 <소피스테스>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의 그리스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한 관념은 이런 이분법이었다). 고대 중국인들 또한 스스로를 ‘중화’라 칭하고, 중원의 둘레를 동이·서융·남만·북적 등 사방을 대표하는 네 오랑캐로 둘러세웠다. 대표적인 고대 문화를 만들어낸 두 겨레가 이런 종족중심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실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선과 악으로 재단하는 양가치적 사고
모든 이분법은 진리가 아니다. 가령 감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의 요리를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감자가 들어간 요리, 다른 하나는 감자가 들어가지 않은 요리. 세상의 모든 이분법은 이 요리 분류법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 나름대로 쓸모가 있겠으나, 그건 구분자의 편의에 복무할 뿐이다.
이성중심주의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이분법은 과학/비과학의 나눔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이란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자연의 질을 양으로 환원하는 방법에 기초한 분석을 지칭한다. ‘과학’이란 단어는 서양 자연과학의 패권을 보장하는 개념이다. 이런 이분법적 사유 아래서는 비유럽 지역의 다양한 전통적 사유가 모두 비과학으로 치부당할 수밖에 없다.
유럽의 이성중심주의를 대변하는 단어가 ‘과학’이라면, 동아시아의 이성중심주의를 대변하는 단어는 ‘실학’(實學)이다. 흔히 ‘실학’이라 하면 조선 후기에 중세의 이른바 주자학적 세계관에 맞서 새롭게 등장한 실사구시적 학문 경향을 지칭하는 역사학의 용어로 쓰인다. 그러나 실학이란 말은 본디 송나라 때의 유학자 주희가 불교를 ‘헛된 학문’이란 뜻에서 ‘허학’(虛學)이라 부르고, 그와 대조해 유학이야말로 허황하지 않은 학문이라는 뜻에서 실학이라 부른 데서 비롯했다. 허학과 실학이라는 이분법이야말로 이성중심주의의 전형적인 논리구도를 보여주는 사례다.
실학은 오늘날 조선 후기 사상사 연구에서 매우 중심적인 개념이다. 이미 역사학의 용어로 굳어졌지만, 이 말은 ‘허학’이라는 맞짝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분법적 사유의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이수광에서부터 이익,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을 거쳐 최한기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실학자’로 묶이는 이들이 스스로 주자학적 세계관을 ‘허학’이라 인식하고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 여기는 이분법적 사유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이는 오히려 오늘날 역사 연구자들의 이분법적 사고를 보여주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실학이라는 개념은 이른바 ‘자주적 근대화’의 맹아를 조선 후기의 역사에서 찾으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역사학 용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통교’(通敎)의 학풍에 주목하는 게 더 생산적으로 보인다. ‘통교’란 말은 최한기의 <기측체의>(氣測體義)에 등장한다. “세상의 여러 가르침 가운데 하늘과 사람의 마땅함에 절실한 내용을 가려 취하고 헛되고 잡박하고 괴이하고 황당한 것들을 제거하여 이로써 하늘아래 만세에 이르도록 통하는 가르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의 이 발언은 전통 학문이든 서양 학문이든 가리지 말고 그 가운데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내용을 취하여 새로운 ‘세계학’을 세우자는 주장이다(‘통교’를 ‘세계학’이라 옮기는 것은 북한 학자 정성철의 번역어이다). 최한기의 문제의식은 실학/허학, 동학/서학 따위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열린 사유를 통해 새로운 보편을 모색하자는, 참으로 선진적인 문제의식이었다. 통교란 말은 최한기의 글에서 비로소 등장하지만, 그 이전에도 정약용·홍대용 등 통교의 문제의식 아래 전통 학문과 서학의 결합을 시도한 이가 없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최한기의 주장처럼 모름지기 세계학을 해야 한다. 어떤 분야에서도 세계학을 하겠다는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가령 서양 의학을 전공하는 이라 할지라도 한의학을 함께 연구할 필요가 있다. 지난 98년 미국의 한의학 연구실태를 취재한 적이 있었다. 그때 미국의 의과대학 교수들이 한의학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던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서양의들은 오히려 한의학에 대해 대체로 적대적이다. 우리는 유럽인들이 극찬해 마지않는 윤이상의 음악은 대단한 걸로 여기면서, 막상 윤이상 음악의 탯줄을 이룬 국악은 고리타분한 과거의 유물로 치부한다. 이런 사고의 뿌리에는 유럽중심주의의 해독이 작용하고 있다.
최한기의 ‘통교’는 세계학의 뿌리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이 새로운 중심주의를 만드는 경향도 있다. 가령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동양사상’을 내세우면서, “서양의 사유보다 동양의 사유가 더 우월하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이 있다. 이런 발상은 거꾸로 선 지역중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세미나에서 서양철학 전공자가 “서양철학이 동양철학보다 더 보편적이다”라는 발언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보편적’이란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다. “어느 쪽이 더 보편적이다”란 말은 난센스다. ‘보편’이라는 말에 값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의 사유든 고대 중국의 사유든 모두 다 아우를 수 있는 논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발전해온 사유가 고대 중국이나 인도에서 발전해온 사유보다 더 보편적이지도 더 우월하지도 않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 등장한 다양한 저항운동은 중심주의에 대한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저항운동 안에는 늘 새로운 중심주의의 유혹이 잠복해 있었다. 전복의 열망이 거꾸로 선 중심주의를 낳은 것이다. 가령 흑인운동가들 가운데 흑인성(네그리튀드)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논리라든가, 여성운동 이론에서 여성성을 찬미하는 경향은 일종의 거꾸로 선 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중심주의에 대한 가장 철저한 비판은 중심주의의 단념에 있다. 60년대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흑인이 백인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하는 대신 “백인과 흑인이 형제가 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간디는 신사의 나라 영국의 야만적인 지배에 맞서 싸우면서 인도인의 영혼이 영국인의 그것보다 더 위대하다는 주장을 하는 대신 “인도인이 영국인과 같은 권리를 누리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인도인의 위대함을 드러냈다. 그는 “인드라, 미트라, 바르나, 간디아루트만 등 수많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절대자의) 실제는 하나이다”라고 노래한 <리그-베다>의 전통을 이어받아, “세계에는 오로지 하나의 종교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다양한 많은 가지를 지닌 튼튼한 나무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사상, 자신의 종교, 자신의 전통만이 중심임을 포기함으로써 인류는 모두 함께 중심에 설 수 있다.
“길을 길이라 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
중심에 대한 도전은 그것을 전복해 새로운 중심을 만들어내는 일보다, 중심에 대한 집착을 지워나가는 과정을 통해 더욱 위대한 과정으로 변한다. 노자가 “그 수컷됨을 알면서도 암컷됨을 지킨다, 그 흼을 알면서도 어둠을 지킨다”고 한 말은, 중심을 전복하되 자신이 다시 중심에 서는 대신 영원한 ‘변방의 오랑캐’로 남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여기에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이 있다.
오랑캐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 또한 새로운 중심주의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올 수 있겠다. 어떤 논리에 대해서도 이런 무한퇴행의 비판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지성사는 ‘지움의 논리’를 만들어냈다. 지움의 논리란 “마땅히 머무는 곳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 <莊嚴淨土分>)는 <금강경>의 요구나,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의 발언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불교의 논리를 들어 설명하자면, 자신이 ‘깨달은 사람’ 곧 ‘부처’라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은 결코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부처라는 자의식, 부처라는 아상(我相)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이라고 말한다. 중심주의에 대한 가장 철저한 단념은 자기 논리의 발판을 지울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노자는 “길을 길이라 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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