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반과 술수 권하는 해석은 진정성 외면… 장차 빛남을 꾀하지 않는 고개숙임의 미덕
노자의 글에는 권모술수나 처세술로 읽힐 법한 구절 또한 없지 않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대표적인 예이다.
“장차 접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펴주어라. 장차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어라. 장차 없애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흥하게 해주어라. 장차 빼앗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보태주어라.”(將欲翕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36장)
노자의 글을 권모술수와 처세술로 해석한 가장 오래된 사례는 법가의 집대성자인 한비자(韓非子)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나름대로 <노자>를 탐독하여 <해로>(解老)와 <유로>(喩老)라는 두편의 글을 지었다. ‘해로’란 ‘노자를 해석한다’는 뜻이고, ‘유로’란 ‘노자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에 빗대어 푼다’는 뜻이다. 그의 글은 <노자>에 대한 가장 오래된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사람들이 매우 일찍부터 <노자>에서 권모술수와 처세술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노자에서 권모술수를 배워야 할 건가
앞에서 인용한 구절에 대해 한비자는 역사적 사례를 들어 이렇게 풀이한다.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에 패하여 오나라를 섬길 때의 일이다. 그는 오나라의 국력을 쇠잔시키기 위해 오나라 왕 부차를 부추겨 제나라를 치도록 했다. 오나라 군사는 이미 제나라의 땅인 애릉에서 제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른 상태였으나 장강에서 제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황지에서 제후들을 불러모아 회맹을 열고 패업을 크게 떨쳤다. 이같은 무리한 군사행동을 부추겨 오나라의 국력을 쇠잔시켰기 때문에 결국 월나라 구천은 오호에서 오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장차 접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펴주어라. 장차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어라’(將欲翕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라고 한 것이다.” “진나라 헌공은 장차 우나라를 습격하려고 할 때, 먼저 벽옥과 말을 선물로 보내 안심시켰으며, 진나라 지백은 장차 구유를 습격하려고 할 때, 먼저 큰 종을 큰 수레에 실어 선물로 보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장차 빼앗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보태주어라’(將欲取之, 必固與之.)라고 한 것이다.”(이상 <喩老> 21-9) 한비자가 인용한 위의 일들은 모두 당대에 이미 인구에 널리 회자되어온 역사적 사실들이다. 오왕 합려와 월왕 윤상, 그리고 두 아비의 대를 이어 오·월 쟁투를 이어간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입에 오르내리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성어를 만들어낸 인물들이다.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을 회계산에서 포위했다. 구천은 “나는 종이 되고 내 아내는 첩이 되겠다”며 부차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어 강화를 청했다. 부차에게는 오자서라는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참모가 있었다. 오자서는 부차에게 구천을 용서하지 말고 월나라를 삼키라고 했으나 자만에 빠진 부차는 구천을 풀어주었다. 구천이 ‘회계산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밥상머리에 쓸개를 매달아놓고 매일 핥을 때, 기고만장해진 부차는 제나라를 쳤다. 오자서는 “월나라는 뱃속의 큰 질환이지만 제나라는 부스럼에 지나지 않는다”며 월나라를 먼저 진압할 것을 간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애릉에서 제나라를 물리친 뒤 더욱 기세가 등등해진 부차에게 오자서는 “너무 기뻐하지 마십시오”라고 직언했다. 기분이 상한 부차는 오자서의 정적 백비의 모함을 믿고 오자서에게 촉루검을 보내 자결하도록 했다. 부차의 아버지 합려를 패왕으로 만들었던 오자서가 죽으며 남긴 말은 유명하다. “반드시 내 눈을 오나라의 동문에 매달아라. 월나라 군사가 오나라를 짓밟으러 오는 걸 보겠다!” 부차는 서기 전 482년 황지라는 곳에 제후들을 불러모아 회맹의식을 가졌다. 제후가 회맹을 소집한다는 건 그가 패자(覇者)라는 뜻이다. 부차는 제후들 앞에서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해 주력 정예부대를 이끌고 황지로 갔다. 월왕 구천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오합지졸만 남은 오나라를 공격해 승기를 잡았다. 그뒤 4년 뒤인 서기 전 478년 부차는 고소산에서 월나라 군사에 포위당한다. 그는 그곳에서 3년을 버티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이른다. 처절한 복수를 위한 굽신거림을 권했다? 이 고사에 이어 한비가 인용하고 있는 진헌공과 지백의 고사 또한 당시 널리 입에 오르내리던 역사적 사실이었다. 진헌공은 제환공의 뒤를 이어 패자가 된 진문공 중이의 아버지다. 이 이야기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성어의 출전이다. 서기 전 652년, 진헌공은 괵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순식이란 신하를 사신으로 삼아 굴산에서 나는 명마와 벽옥 구슬을 선물로 보내며 우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우나라의 현자 궁지기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게 될 것”이라며 진나라에게 길을 빌려주지 말라고 간했다. 그러나 우나라 제후는 “진나라와 우리는 성씨가 같다”며 길을 빌려주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서기 전 655년 겨울, 진헌공은 다시 우나라의 길을 빌려 괵나라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 또한 멸망시켰다. 굴산에서 난 명마를 선물로 가지고 갔던 사신 순식은 우나라의 궁궐 마구간에서 3년 전 선물했던 굴산의 명마를 다시 진헌공 앞으로 끌고 왔다. 진헌공은 웃으며 “말은 과인의 말이지만 이빨이 늙었도다!”라고 했다. 세 번째 고사의 주인공인 지백은 서기 전 5세기의 인물이다. 그는 진나라 출공을 몰아내고 애공을 세운 뒤 국정을 전횡한 권신이었다. 구유는 춘추 말기 ‘북방 오랑캐’의 대명사인 적(狄)족이 산서성 우현의 북동쪽에 세운 작은 국가였다. 지백은 구유를 정벌하기 위해 선물로 큰 종을 넓은 수레에 실어보냈다. 구유 사람들은 넓은 수레가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넓혔다. 그러나 지백의 의도는 길을 넓혀 진나라 군사들이 구유로 진격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유 사람들이 닦아놓은 넓은 길로 쳐들어간 진나라 군사는 삽시간에 구유를 멸망시켰다. 트로이 목마를 연상시키는 이 이야기는 <전국책>(戰國策)에 실려 있다. 이 세 고사를 인용한 뒤 한비는 이렇게 말한다. “모습이 드러나지 않은 데서 일을 일으켜 하늘 아래 큰공을 세우는 것, 이를 일러 ‘일은 보이지 않지만 공은 밝게 드러나는 것’(微明)이라고 한다. 천하고 약한 자리에 처하여 거듭 자신을 비하하고 굽히는 것을 일러 ‘유약함이 강함을 이긴다’고 한다.”(起事於無形而要大功於天下, ‘是謂微明’. 處小弱而重自卑損之謂‘弱勝强’也.) 구천이 부차에게 자신과 자기 부인을 “종과 첩으로 삼아달라”고 애원해 목숨을 부지한 뒤 복수에 성공한 일, 진헌공이 우나라 제후에게 준마를 선물로 보낸 지 3년 만에 우나라를 멸하고 준마를 되찾은 일, 선물로 큰 종을 준다고 하여 길을 닦게 한 뒤 군사를 보내 구유를 멸망시킨 지백의 이야기 등의 역사적 사실에서 한비는 <노자>의 실제 적용 사례를 찾았다. 춘추 전국시기는 이런 음모와 모략, 암투와 암살이 밥먹듯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노자 할아버지 또한 그런 궁정모반과 권력투쟁을 싫증나도록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장차 빼앗고자 한다면 먼저 보태주라”는 의뭉스런 금언을 만들어내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비록 이 문제의 구절들이 현존하는 <노자>의 가장 오래된 판본인 죽간본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것만을 근거로 이 구절들이 노자의 사상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약함을 지키는 것이 바로 강함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비처럼 <노자>를 읽는다면 <노자>라는 텍스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의 본령에 공감하는 일로부터는 아무래도 거리가 멀어지는 듯하다. 선물 준 사람의 의도가 뭔지 늘 의심해야 하고, 언젠가 권좌에 올랐을 때 처절한 복수극을 벌이기 위해 간과 쓸개를 다 내던지고 굽신거려야 하며, 후환을 없애기 위해 목숨을 구걸하는 패배자를 비정하게 짓밟으라는 게 <노자>가 들려주는 가르침이라면, 우리 인생을 매우 황량하게 만드는 그런 따위의 책을 난로 속에 집어던지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을까. 아무리 양보하더라도 노자 생각의 본령이 그런 권모술수나 처세술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노자는 세상에서 빛나고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의 반대쪽에 서라고 말한 사람이다. 장차 그게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임을 기대해서 반드시 그쪽에 서는 건 아니다. 정말 빛나는 일 한번 없이 먼지 속에 묻힐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쪽에 서는 게 길을 따라 사는 길이다. 여기에 노자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의 진정성이 있지 않을까? 노자는 “약함을 지키는 것을 일러 강함이라고 한다”(守柔曰强. 52장)고 말한다. 그의 메시지는 ‘중심주의’에 대한 매우 근원적인 반성을 가능하게 한다. leess@hani.co.kr

앞에서 인용한 구절에 대해 한비자는 역사적 사례를 들어 이렇게 풀이한다.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에 패하여 오나라를 섬길 때의 일이다. 그는 오나라의 국력을 쇠잔시키기 위해 오나라 왕 부차를 부추겨 제나라를 치도록 했다. 오나라 군사는 이미 제나라의 땅인 애릉에서 제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른 상태였으나 장강에서 제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황지에서 제후들을 불러모아 회맹을 열고 패업을 크게 떨쳤다. 이같은 무리한 군사행동을 부추겨 오나라의 국력을 쇠잔시켰기 때문에 결국 월나라 구천은 오호에서 오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장차 접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펴주어라. 장차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어라’(將欲翕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라고 한 것이다.” “진나라 헌공은 장차 우나라를 습격하려고 할 때, 먼저 벽옥과 말을 선물로 보내 안심시켰으며, 진나라 지백은 장차 구유를 습격하려고 할 때, 먼저 큰 종을 큰 수레에 실어 선물로 보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장차 빼앗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보태주어라’(將欲取之, 必固與之.)라고 한 것이다.”(이상 <喩老> 21-9) 한비자가 인용한 위의 일들은 모두 당대에 이미 인구에 널리 회자되어온 역사적 사실들이다. 오왕 합려와 월왕 윤상, 그리고 두 아비의 대를 이어 오·월 쟁투를 이어간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입에 오르내리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성어를 만들어낸 인물들이다.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을 회계산에서 포위했다. 구천은 “나는 종이 되고 내 아내는 첩이 되겠다”며 부차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어 강화를 청했다. 부차에게는 오자서라는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참모가 있었다. 오자서는 부차에게 구천을 용서하지 말고 월나라를 삼키라고 했으나 자만에 빠진 부차는 구천을 풀어주었다. 구천이 ‘회계산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밥상머리에 쓸개를 매달아놓고 매일 핥을 때, 기고만장해진 부차는 제나라를 쳤다. 오자서는 “월나라는 뱃속의 큰 질환이지만 제나라는 부스럼에 지나지 않는다”며 월나라를 먼저 진압할 것을 간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애릉에서 제나라를 물리친 뒤 더욱 기세가 등등해진 부차에게 오자서는 “너무 기뻐하지 마십시오”라고 직언했다. 기분이 상한 부차는 오자서의 정적 백비의 모함을 믿고 오자서에게 촉루검을 보내 자결하도록 했다. 부차의 아버지 합려를 패왕으로 만들었던 오자서가 죽으며 남긴 말은 유명하다. “반드시 내 눈을 오나라의 동문에 매달아라. 월나라 군사가 오나라를 짓밟으러 오는 걸 보겠다!” 부차는 서기 전 482년 황지라는 곳에 제후들을 불러모아 회맹의식을 가졌다. 제후가 회맹을 소집한다는 건 그가 패자(覇者)라는 뜻이다. 부차는 제후들 앞에서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해 주력 정예부대를 이끌고 황지로 갔다. 월왕 구천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오합지졸만 남은 오나라를 공격해 승기를 잡았다. 그뒤 4년 뒤인 서기 전 478년 부차는 고소산에서 월나라 군사에 포위당한다. 그는 그곳에서 3년을 버티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이른다. 처절한 복수를 위한 굽신거림을 권했다? 이 고사에 이어 한비가 인용하고 있는 진헌공과 지백의 고사 또한 당시 널리 입에 오르내리던 역사적 사실이었다. 진헌공은 제환공의 뒤를 이어 패자가 된 진문공 중이의 아버지다. 이 이야기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성어의 출전이다. 서기 전 652년, 진헌공은 괵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순식이란 신하를 사신으로 삼아 굴산에서 나는 명마와 벽옥 구슬을 선물로 보내며 우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우나라의 현자 궁지기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게 될 것”이라며 진나라에게 길을 빌려주지 말라고 간했다. 그러나 우나라 제후는 “진나라와 우리는 성씨가 같다”며 길을 빌려주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서기 전 655년 겨울, 진헌공은 다시 우나라의 길을 빌려 괵나라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 또한 멸망시켰다. 굴산에서 난 명마를 선물로 가지고 갔던 사신 순식은 우나라의 궁궐 마구간에서 3년 전 선물했던 굴산의 명마를 다시 진헌공 앞으로 끌고 왔다. 진헌공은 웃으며 “말은 과인의 말이지만 이빨이 늙었도다!”라고 했다. 세 번째 고사의 주인공인 지백은 서기 전 5세기의 인물이다. 그는 진나라 출공을 몰아내고 애공을 세운 뒤 국정을 전횡한 권신이었다. 구유는 춘추 말기 ‘북방 오랑캐’의 대명사인 적(狄)족이 산서성 우현의 북동쪽에 세운 작은 국가였다. 지백은 구유를 정벌하기 위해 선물로 큰 종을 넓은 수레에 실어보냈다. 구유 사람들은 넓은 수레가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넓혔다. 그러나 지백의 의도는 길을 넓혀 진나라 군사들이 구유로 진격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유 사람들이 닦아놓은 넓은 길로 쳐들어간 진나라 군사는 삽시간에 구유를 멸망시켰다. 트로이 목마를 연상시키는 이 이야기는 <전국책>(戰國策)에 실려 있다. 이 세 고사를 인용한 뒤 한비는 이렇게 말한다. “모습이 드러나지 않은 데서 일을 일으켜 하늘 아래 큰공을 세우는 것, 이를 일러 ‘일은 보이지 않지만 공은 밝게 드러나는 것’(微明)이라고 한다. 천하고 약한 자리에 처하여 거듭 자신을 비하하고 굽히는 것을 일러 ‘유약함이 강함을 이긴다’고 한다.”(起事於無形而要大功於天下, ‘是謂微明’. 處小弱而重自卑損之謂‘弱勝强’也.) 구천이 부차에게 자신과 자기 부인을 “종과 첩으로 삼아달라”고 애원해 목숨을 부지한 뒤 복수에 성공한 일, 진헌공이 우나라 제후에게 준마를 선물로 보낸 지 3년 만에 우나라를 멸하고 준마를 되찾은 일, 선물로 큰 종을 준다고 하여 길을 닦게 한 뒤 군사를 보내 구유를 멸망시킨 지백의 이야기 등의 역사적 사실에서 한비는 <노자>의 실제 적용 사례를 찾았다. 춘추 전국시기는 이런 음모와 모략, 암투와 암살이 밥먹듯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노자 할아버지 또한 그런 궁정모반과 권력투쟁을 싫증나도록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장차 빼앗고자 한다면 먼저 보태주라”는 의뭉스런 금언을 만들어내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비록 이 문제의 구절들이 현존하는 <노자>의 가장 오래된 판본인 죽간본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것만을 근거로 이 구절들이 노자의 사상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약함을 지키는 것이 바로 강함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비처럼 <노자>를 읽는다면 <노자>라는 텍스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의 본령에 공감하는 일로부터는 아무래도 거리가 멀어지는 듯하다. 선물 준 사람의 의도가 뭔지 늘 의심해야 하고, 언젠가 권좌에 올랐을 때 처절한 복수극을 벌이기 위해 간과 쓸개를 다 내던지고 굽신거려야 하며, 후환을 없애기 위해 목숨을 구걸하는 패배자를 비정하게 짓밟으라는 게 <노자>가 들려주는 가르침이라면, 우리 인생을 매우 황량하게 만드는 그런 따위의 책을 난로 속에 집어던지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을까. 아무리 양보하더라도 노자 생각의 본령이 그런 권모술수나 처세술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노자는 세상에서 빛나고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의 반대쪽에 서라고 말한 사람이다. 장차 그게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임을 기대해서 반드시 그쪽에 서는 건 아니다. 정말 빛나는 일 한번 없이 먼지 속에 묻힐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쪽에 서는 게 길을 따라 사는 길이다. 여기에 노자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의 진정성이 있지 않을까? 노자는 “약함을 지키는 것을 일러 강함이라고 한다”(守柔曰强. 52장)고 말한다. 그의 메시지는 ‘중심주의’에 대한 매우 근원적인 반성을 가능하게 한다. leess@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