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에 강요하지 않는 무위의 사유… 작위에 대항하는 노자의 방식은 무엇
관용과 관련한 두 번째 논점은 “관용에는 한계가 없는가” 하는 문제다.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관용에 한계를 긋지 않으면 관용의 정신 자체가 존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고 말한다. 칼 포퍼(1902∼94)는 이를 ‘관용의 역설’(paradox of tolerance)이라 불렀다. 그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민주주의의 역설’, ‘자유의 역설’, ‘관용의 역설’ 등 세 가지의 역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먼저 민주주의의 역설에 대해서는 일찍이 플라톤이 말한 바 있다. “개인이든 국가든 지나친 자유는 지나친 예속을 낳을 수 있다. (…) 독재는 다른 무엇보다 바로 민주주의에서 발전되어 나올 것이며, 극단적인 자유는 가장 사납고 극단적인 예속을 낳을 것이다.”(<국가> 564a) 이것이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민주주의의 역설이 가장 전형적으로 역사에 드러난 예는 아마도 1933년 히틀러의 집권일 것이다. 그는 플라톤의 예언을 실현하기라도 하듯 당시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을 갖추고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권력을 장악한 뒤 독일 제2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극악한 파시스트 체제를 구축했다.
무제한의 관용은 불관용을 낳는다?
자유의 역설에 대해 포퍼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에 아무런 제약이 없을 때, 자유는 자멸한다. 아무 제약이 없는 자유는 강자가 약자를 협박하여 그의 자유를 강탈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의 자유가 법의 보호 아래 있도록 하기 위한 범위 안에서 국가가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누구도 타인의 자비심에 내맡겨져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은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져야 한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역설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온 바이다. 포퍼는 같은 논리를 ‘관용’에도 적용한다. 다시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아무 제약없는 관용은 반드시 관용의 소멸을 불러온다. 우리가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베푼다면, 그리고 우리가 불관용의 습격으로부터 관용적인 사회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관용적인 사회와 관용정신 그 자체가 함께 파괴당하고 말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관용의 이름으로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the right not to tolerate intolerant)를 천명해야 한다.” 자유나 관용이란 개념에는 이처럼 자기 모순이 포함되어 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를 침해할 자유’에 제약을 가할 필요가 있으며, 관용을 지키기 위해서는 ‘관용을 해치는 불관용의 행위’를 관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자유와 관용의 역설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유와 관용은 단순한 방임이 아니라 예속과 불관용에 대한 적극적인 투쟁을 의미한다. 이제 노자의 말을 다시 상기해보자. “원수를 덕으로 갚으라”는 노자의 요구는 불관용까지도 관용함으로써 관용 자체를 파괴시킬 수 있는 ‘대책없는’ 무제한의 관용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미 인용했지만,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잘하는 사람을 나는 잘 대해준다. 잘 못하는 사람 또한 나는 잘 대해준다. 그럼으로써 잘함을 얻는다. 미더운 사람을 나는 믿는다. 미덥지 않은 사람 또한 나는 믿는다. 그럼으로써 미더움을 얻는다.”(49장) 노자의 이 말은 관용과 불관용 모두에 똑같이 관용을 베풀라는 흐리멍덩한 논리는 아닌가.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선 먼저 노자의 관용이 어디서 비롯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자의 관용은 무위(無爲)의 사유에서 나온 것이다. 무위의 반대는 ‘작위’이다. 작위란 타인이나 자기 바깥의 세계를 자신의 의도대로 바꾸려는 행위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뜯어고치기 위해 그를 묶어 기름 부은 장작더미 위에 앉혔다면, 관용의 철학자는 그를 ‘앵톨레랑’(불관용적인 사람)이라 부를 것이고, 노자는 그의 ‘작위’를 용납하기 어렵다고 말할 것이다. 노자가 문제로 삼는 ‘작위’는 관용의 철학자들이 문제로 삼는 ‘불관용’보다 훨씬 광범위한 인간의 행위를 겨냥한다. 가령 관용의 철학은 돌멩이나 잡초 한 포기에도 관용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위의 철학은 인간사는 물론 삼라만상에 대해서도 작위를 가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보면 노자가 말하는 무위란 이를테면 ‘조물주적인 관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셸 세르는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건 순전히 “조물주의 관용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조물주의 관용은 노자가 생각한 조물주의 무위와 맥락이 닿는다. 세르가 보기에, 전능하신 하느님은 이 불완전한 피조물을 싹 쓸어버리는 대신 무위의 정신을 발휘하여 한 걸음 물러서 계신다. 세르는 하느님께서 “태곳적부터 자제하고 계시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조물주의 ‘유보’ 덕분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조물주가 인간의 대소사에 직접 나서 사사건건 ‘역사’하신다면, 부족하고 온전하지 못한 우리 피조물로서는 손발을 둘 곳조차 없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도 조물주는 이 불완전한 세계를 관용하고 계시다. 그가 관용하고 계신 것은 어떤 작위적인 일을 하지 않고 계시다는 뜻이다. 세르의 논리에서 조물주의 피조물에 대한 관용은 바로 노자가 말하는 길(道)의 무위와 다르지 않다. 불완전화 세계를 향한 조물주적 관용 관용과 무위는 둘 다 타자에 대해 자기 의도를 강요하지 않고 유보적으로 다가선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관용의 철학은 “관용정신을 위협하는 불관용에 대해서는 관용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노자는 불관용 대신 ‘작위’를 문제삼는다. 노자의 말을 들어보자. “길은 늘 무위하지만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세상의 지배자들이 이를 잘 지킨다면 사람들은 장차 스스로 자기 길을 따라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지배자가 백성들을 교화하여 작위하려 든다면 나는 장차 그를 이름 없는 통나무로 때려잡을 것이다.”(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37장) 작위적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통치자를 “이름 없는 통나무(無名之樸)로 때려잡겠다”는 노자의 언설은 매우 과격하게 들린다. ‘무명지박’(無名之樸)은 그냥 “이름 없는 소박함”으로 풀 수도 있다. 그러나 주칭치앤(朱情牽) 같은 이는 박(樸)을 글자 그대로 “칼이나 도끼를 대지 않은 통나무”(無刀斧之斷者謂之樸)로 새긴다. 이렇게 읽는 게 훨씬 생동감이 넘친다. 노자의 이 말은 그야말로 은유이지, 통나무 몽둥이를 들고 작위하는 자를 쫓아다니며 때려잡겠다는 말은 아니다. “이름 없는 통나무”란 ‘길’(道)의 은유이다. 노자는 멋대로 작위하는 자의 의도가 길의 작용에 의해 분쇄당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장차 천하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작위하는 자에게서 나는 그가 뜻을 이루지 못함을 본다. 세상은 거룩한 그릇이다. 그건 거기에 어떤 작위를 가할 수가 없는 성질의 것이다. 거기에다 작위하는 자는 실패하고, 그걸 잡으려는 자는 놓친다.”(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天下神器,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29장) “이름 없는 통나무”로 때려잡겠다는 얘기는 바로 이처럼 작위하는 자의 노력을 무위로 돌리고 마는 ‘길’의 작용을 말한 것이다. 길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목표와 방법이 일치해야 한다. 아무리 어떤 통치배의 작위적인 행위가 눈에 거슬린다 해도 자신이 직접 나서서 칼춤을 춘다면 그 또한 새로운 작위가 될 수 있다. 이를 노자는 “목수를 대신해 대패질하는 일”이라 말한다. “백성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두렵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백성들로 하여금 늘 죽음을 두려워하도록 했는데도 튀는 짓을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잡아죽이고 싶어질 것이다. 누가 감히 그 일을 하겠는가? 늘 죽임을 관장하는 자를 두어 일을 맡겨야 할 것이다. 대저 죽임을 관장하는 자를 대신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일러 목수를 대신해 대패질을 한다고 한다. 대저 목수를 대신해 대패질하는 자 치고 그 손을 다치지 않는 자 드물 것이다.”(民不畏死, 奈何以死懼之? 若使民常畏死, 而爲奇者, 吾得執而殺之. 孰敢? 常有司殺者殺. 夫代司殺者殺, 是謂代大匠착, 夫代大匠착者, 希有不傷其手矣. 74장) 세상을 멋대로 바꾸려는 자들에게… 여기서도 ‘대패질을 맡아 하는 목수’는 길의 은유이다. 노자는 작위함을 통해 세상을 멋대로 바꾸려는 자를 ‘길’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멋대로 작위하는 자를 진압하는 일 또한 작위적인 방식으로 손대어서는 안 된다. 논의가 여기까지 오면, 노자가 말하는 길을 따라서는 어떤 실천도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그의 논리에서 대체 어떤 사회적 실천이 가능할까. leess@hani.co.kr

자유의 역설에 대해 포퍼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에 아무런 제약이 없을 때, 자유는 자멸한다. 아무 제약이 없는 자유는 강자가 약자를 협박하여 그의 자유를 강탈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의 자유가 법의 보호 아래 있도록 하기 위한 범위 안에서 국가가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누구도 타인의 자비심에 내맡겨져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은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져야 한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역설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온 바이다. 포퍼는 같은 논리를 ‘관용’에도 적용한다. 다시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아무 제약없는 관용은 반드시 관용의 소멸을 불러온다. 우리가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베푼다면, 그리고 우리가 불관용의 습격으로부터 관용적인 사회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관용적인 사회와 관용정신 그 자체가 함께 파괴당하고 말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관용의 이름으로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the right not to tolerate intolerant)를 천명해야 한다.” 자유나 관용이란 개념에는 이처럼 자기 모순이 포함되어 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를 침해할 자유’에 제약을 가할 필요가 있으며, 관용을 지키기 위해서는 ‘관용을 해치는 불관용의 행위’를 관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자유와 관용의 역설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유와 관용은 단순한 방임이 아니라 예속과 불관용에 대한 적극적인 투쟁을 의미한다. 이제 노자의 말을 다시 상기해보자. “원수를 덕으로 갚으라”는 노자의 요구는 불관용까지도 관용함으로써 관용 자체를 파괴시킬 수 있는 ‘대책없는’ 무제한의 관용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미 인용했지만,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잘하는 사람을 나는 잘 대해준다. 잘 못하는 사람 또한 나는 잘 대해준다. 그럼으로써 잘함을 얻는다. 미더운 사람을 나는 믿는다. 미덥지 않은 사람 또한 나는 믿는다. 그럼으로써 미더움을 얻는다.”(49장) 노자의 이 말은 관용과 불관용 모두에 똑같이 관용을 베풀라는 흐리멍덩한 논리는 아닌가.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선 먼저 노자의 관용이 어디서 비롯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자의 관용은 무위(無爲)의 사유에서 나온 것이다. 무위의 반대는 ‘작위’이다. 작위란 타인이나 자기 바깥의 세계를 자신의 의도대로 바꾸려는 행위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뜯어고치기 위해 그를 묶어 기름 부은 장작더미 위에 앉혔다면, 관용의 철학자는 그를 ‘앵톨레랑’(불관용적인 사람)이라 부를 것이고, 노자는 그의 ‘작위’를 용납하기 어렵다고 말할 것이다. 노자가 문제로 삼는 ‘작위’는 관용의 철학자들이 문제로 삼는 ‘불관용’보다 훨씬 광범위한 인간의 행위를 겨냥한다. 가령 관용의 철학은 돌멩이나 잡초 한 포기에도 관용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위의 철학은 인간사는 물론 삼라만상에 대해서도 작위를 가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보면 노자가 말하는 무위란 이를테면 ‘조물주적인 관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셸 세르는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건 순전히 “조물주의 관용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조물주의 관용은 노자가 생각한 조물주의 무위와 맥락이 닿는다. 세르가 보기에, 전능하신 하느님은 이 불완전한 피조물을 싹 쓸어버리는 대신 무위의 정신을 발휘하여 한 걸음 물러서 계신다. 세르는 하느님께서 “태곳적부터 자제하고 계시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조물주의 ‘유보’ 덕분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조물주가 인간의 대소사에 직접 나서 사사건건 ‘역사’하신다면, 부족하고 온전하지 못한 우리 피조물로서는 손발을 둘 곳조차 없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도 조물주는 이 불완전한 세계를 관용하고 계시다. 그가 관용하고 계신 것은 어떤 작위적인 일을 하지 않고 계시다는 뜻이다. 세르의 논리에서 조물주의 피조물에 대한 관용은 바로 노자가 말하는 길(道)의 무위와 다르지 않다. 불완전화 세계를 향한 조물주적 관용 관용과 무위는 둘 다 타자에 대해 자기 의도를 강요하지 않고 유보적으로 다가선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관용의 철학은 “관용정신을 위협하는 불관용에 대해서는 관용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노자는 불관용 대신 ‘작위’를 문제삼는다. 노자의 말을 들어보자. “길은 늘 무위하지만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세상의 지배자들이 이를 잘 지킨다면 사람들은 장차 스스로 자기 길을 따라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지배자가 백성들을 교화하여 작위하려 든다면 나는 장차 그를 이름 없는 통나무로 때려잡을 것이다.”(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37장) 작위적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통치자를 “이름 없는 통나무(無名之樸)로 때려잡겠다”는 노자의 언설은 매우 과격하게 들린다. ‘무명지박’(無名之樸)은 그냥 “이름 없는 소박함”으로 풀 수도 있다. 그러나 주칭치앤(朱情牽) 같은 이는 박(樸)을 글자 그대로 “칼이나 도끼를 대지 않은 통나무”(無刀斧之斷者謂之樸)로 새긴다. 이렇게 읽는 게 훨씬 생동감이 넘친다. 노자의 이 말은 그야말로 은유이지, 통나무 몽둥이를 들고 작위하는 자를 쫓아다니며 때려잡겠다는 말은 아니다. “이름 없는 통나무”란 ‘길’(道)의 은유이다. 노자는 멋대로 작위하는 자의 의도가 길의 작용에 의해 분쇄당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장차 천하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작위하는 자에게서 나는 그가 뜻을 이루지 못함을 본다. 세상은 거룩한 그릇이다. 그건 거기에 어떤 작위를 가할 수가 없는 성질의 것이다. 거기에다 작위하는 자는 실패하고, 그걸 잡으려는 자는 놓친다.”(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天下神器,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29장) “이름 없는 통나무”로 때려잡겠다는 얘기는 바로 이처럼 작위하는 자의 노력을 무위로 돌리고 마는 ‘길’의 작용을 말한 것이다. 길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목표와 방법이 일치해야 한다. 아무리 어떤 통치배의 작위적인 행위가 눈에 거슬린다 해도 자신이 직접 나서서 칼춤을 춘다면 그 또한 새로운 작위가 될 수 있다. 이를 노자는 “목수를 대신해 대패질하는 일”이라 말한다. “백성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두렵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백성들로 하여금 늘 죽음을 두려워하도록 했는데도 튀는 짓을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잡아죽이고 싶어질 것이다. 누가 감히 그 일을 하겠는가? 늘 죽임을 관장하는 자를 두어 일을 맡겨야 할 것이다. 대저 죽임을 관장하는 자를 대신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일러 목수를 대신해 대패질을 한다고 한다. 대저 목수를 대신해 대패질하는 자 치고 그 손을 다치지 않는 자 드물 것이다.”(民不畏死, 奈何以死懼之? 若使民常畏死, 而爲奇者, 吾得執而殺之. 孰敢? 常有司殺者殺. 夫代司殺者殺, 是謂代大匠착, 夫代大匠착者, 希有不傷其手矣. 74장) 세상을 멋대로 바꾸려는 자들에게… 여기서도 ‘대패질을 맡아 하는 목수’는 길의 은유이다. 노자는 작위함을 통해 세상을 멋대로 바꾸려는 자를 ‘길’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멋대로 작위하는 자를 진압하는 일 또한 작위적인 방식으로 손대어서는 안 된다. 논의가 여기까지 오면, 노자가 말하는 길을 따라서는 어떤 실천도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그의 논리에서 대체 어떤 사회적 실천이 가능할까. leess@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