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백한 잘못조차도 껴안는 관용의 정신… 판단기준 공유한다면 대화와 토론으로 설복
노자의 생각과 관용의 정신이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 좀더 검토해보자. 관용의 정신과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의 주요한 논점이 있다. 하나는 ‘진리’가 ‘오류’를 관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다른 하나는 관용 정신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문제다. 순서대로 살펴보자.
내가 명명백백한 진리를 알고 있고, 상대방은 명명백백하게 오류에 빠져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오류를 무작정 용인해야 할까? 만약 그가 그 오류로 인해 파멸의 구렁텅이로 들어가고 있다면?
진리가 서로 양립할 때의 문제들
아마도 대화를 통해 내가 알고 있는 명명백백한 진리를 그에게 나눠주는 게 도리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방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는 내가 명명백백한 오류에 빠져 파멸의 구렁텅이로 들어가고 있다며 내 생각을 바꾸라고 설득한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럽인들이 이렇게 ‘진리’가 서로 양립할 때의 문제를 심각하게 깨달은 건 16세기 즈음의 일이다. 광기의 소용돌이 안에 있을 때는 냉정한 눈으로 사태의 진실을 바라보기 어렵다. 가령 보스니아 바깥에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는 가톨릭과 이슬람교도들이 서로의 피를 피로 씻는 일이 어리석게만 보인다. 그러나 광기의 소용돌이 안에 휘말려 있는 사람들은 그런 시야를 얻기가 지극히 어렵다. 종교개혁의 시기인 16세기,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이 유혈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광기의 시공간 안에 함께 있으면서 이성의 눈빛을 잃지 않은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파리 시의원이던 안 뒤 부르란 사람이 그 한 예이다. 당시 가톨릭이 지핀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 죽어가는 위그노들도 예수의 이름을 불렀고, 위그노들의 손에 살해당하는 가톨릭들도 예수의 이름을 불렀다. 둘 사이에 대체 뭐가 다르기에 서로의 생명을 영원히 앗아가는 테러를 자행해야 하는가. 그는 왕과 의회의 개신교 박해에 반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불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비는 사람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은 경솔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발언 때문에 체포되어 유죄선고를 받은 뒤 그 자신이 장작더미 위에 올라가야 했다. 그는 장작에 불이 붙기 직전, “주여, 제가 당신을 포기하지 않도록 저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했다.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의 칼뱅에게 화형당한 지 6년 뒤인 1559년의 일이다. 이들의 죽음은 이성의 죽음이자 희망의 죽음이기도 했다. 우리는 유럽의 이런 역사를 읽으며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네 이웃을 사랑할 것은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요구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 사이에서 어떻게 이런 잔혹극이 연출될 수 있었을까. 그 이론적인 근거는 서기 5세기의 성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강권”을 동원하는 일까지도 정당화했다. 그가 근거로 삼은 성경 말씀은 천국에 대한 예수의 우화이다. 예수는 천국을 여러 비유를 통해 묘사했다. 그 가운데 천국을 잔칫집에 비유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부자가 성찬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했으나, 사람들은 자기 일이 바빠 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 부자는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누가> 14:23)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말씀을 근거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강권”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한 선의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겠으나, 그의 논리는 불행하게도 16∼18세기 광기의 시대에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에 대해 휘두른 폭력의 근거로 쓰였다. 이 논리를 확대한다면,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하는 사람들은 잠시도 지체말고 사람들의 영혼을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 이교도들을 지구마을에서 소탕하기 위한 성전을 벌여야 할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우리는 그게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의 참뜻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18세기 프랑스의 잡학박사 볼테르는 신의 이름으로 이웃을 학살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하느님이 종교를 만드셨다면, 하느님은 그대가 없어도 그것을 지탱시킬 것이다.” ‘진리는 하나’라는 명제는 항상 옳은가 이제 다시 첫 번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진리는 오류를 관용해야 하는가. 인류는 역사 속에서, 종교적 신념과 사회과학적 진리는 물론 자연과학적 진리마저도, 명백히 오류라고 여겨지는 논리에 대해서조차 일단은 관용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자연과학적 진리라고 해서 절대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가령, 뉴턴의 역학에 기초해 세워진 근대적 우주관은 19세기까지는 진리로 받아들여졌지만, 오늘날 뉴턴의 역학만으로 우주의 생성과 운동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자연과학자는 없다. 하물며 사회과학적 진리는 말할 것도 없다. 사회과학에서 자신의 이론만을 진리라고 고집한 대표적인 예는 마르크스주의이다. 엥겔스가 다른 사회주의 이론을 모두 ‘공상적 사회주의’라 폄하하고, 자신들의 이론을 ‘과학적 사회주의’라 명명한 데서부터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교조’(dogma)로 변할 씨앗을 품고 있었다. 미셸 푸코는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가 당신들을 비난하는 것은 당신들이 마르크시즘(…)을 과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 말하며, “과학”이라는 주장에서 “권력의 야망”을 읽어낸다.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이고 다른 이론은 ‘공상’이라면, 둘 사이의 관계는 이미 대화나 토론의 상대가 아니라 ‘교정’과 ‘훈육’이 필요한 관계로 변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념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불행하게도 인류는 아직 종교적 신념의 진위를 판단할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판단기준은 아마도 영원히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판단기준을 넘어선 가르침을 펴는 게 종교의 본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서로 다른 종교적 신념 사이에는 흔히 공통의 판단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쑤 “진리는 하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명제는 서로 동의할 수 있는 판단기준을 공유하고 있는 제한된 상황에서만 참이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셋”임을 고집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관용해야 하느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답은 물론 “관용해야 한다”일 것이다. 서로 판단기준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와 대화와 토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협박하거나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게 관용의 정신과 역사의 가르침이다. 만약 판단기준이 서로 다르다면, 우리는 먼저 판단기준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 판단기준이 다른 경우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니라 “셋”일 수도 있고 “넷”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오류를 관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진리가 오류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보다 훨씬 더 인류의 사유와 문화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진리가 오류를 가르쳐야 한다”고 믿을 때, 서로 다른 종교와 관습을 지닌 문화권은 피비린내 나는 쟁투를 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진리가 오류를 관용해야 한다”고 여길 때, 사람들은 새로운 사유의 길을 찾아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이미 이뤄진 자기 마음(成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어리석은 사람 또한 이런 스승은 있는 법이다.”(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無師乎? …愚者與有焉. <齊物論> 3) 관용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를지라도 장자에 따르면,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은 모두 ‘성심’(成心)일 뿐이다. ‘성심’이란 “이미 자기 마음 속에서 이뤄진 어떤 견해”를 뜻한다. 종교적 신념이든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이론이든 장자가 보기엔 모두 ‘성심’의 갈래일 뿐이다. 이런 성심을 가지고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래서 장자는 자기 마음을 스승 삼지 말라고 말한다. 이런 ‘성심’을 ‘진리’라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의 두뇌 속을 바꾸려고 강압과 폭력을 가하는 건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기괴한 독단이다. 폴 발레리의 다음 발언은 장자의 생각과 잘 통한다. “참으로 자유로운 정신은 결코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지 않는다. 만일 정신이 그 자신의 마음 속에서 견해가 생기는 것을 억제할 수 없다면, 그 정신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내심의 현상에 저항한다.” 두 번째 문제는 관용의 한계와 관련한 문제이다. 유럽 사람들은 관용을 무한정 용인하면 결국은 관용을 위협하는 사태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지점이 바로 관용의 한계이다. 예수와 노자의 관용은 바로 이런 관용의 한계를 넘어선 관용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leess@hani.co.kr

아마도 대화를 통해 내가 알고 있는 명명백백한 진리를 그에게 나눠주는 게 도리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방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는 내가 명명백백한 오류에 빠져 파멸의 구렁텅이로 들어가고 있다며 내 생각을 바꾸라고 설득한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럽인들이 이렇게 ‘진리’가 서로 양립할 때의 문제를 심각하게 깨달은 건 16세기 즈음의 일이다. 광기의 소용돌이 안에 있을 때는 냉정한 눈으로 사태의 진실을 바라보기 어렵다. 가령 보스니아 바깥에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는 가톨릭과 이슬람교도들이 서로의 피를 피로 씻는 일이 어리석게만 보인다. 그러나 광기의 소용돌이 안에 휘말려 있는 사람들은 그런 시야를 얻기가 지극히 어렵다. 종교개혁의 시기인 16세기,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이 유혈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광기의 시공간 안에 함께 있으면서 이성의 눈빛을 잃지 않은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파리 시의원이던 안 뒤 부르란 사람이 그 한 예이다. 당시 가톨릭이 지핀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 죽어가는 위그노들도 예수의 이름을 불렀고, 위그노들의 손에 살해당하는 가톨릭들도 예수의 이름을 불렀다. 둘 사이에 대체 뭐가 다르기에 서로의 생명을 영원히 앗아가는 테러를 자행해야 하는가. 그는 왕과 의회의 개신교 박해에 반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불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비는 사람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은 경솔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발언 때문에 체포되어 유죄선고를 받은 뒤 그 자신이 장작더미 위에 올라가야 했다. 그는 장작에 불이 붙기 직전, “주여, 제가 당신을 포기하지 않도록 저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했다.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의 칼뱅에게 화형당한 지 6년 뒤인 1559년의 일이다. 이들의 죽음은 이성의 죽음이자 희망의 죽음이기도 했다. 우리는 유럽의 이런 역사를 읽으며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네 이웃을 사랑할 것은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요구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 사이에서 어떻게 이런 잔혹극이 연출될 수 있었을까. 그 이론적인 근거는 서기 5세기의 성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강권”을 동원하는 일까지도 정당화했다. 그가 근거로 삼은 성경 말씀은 천국에 대한 예수의 우화이다. 예수는 천국을 여러 비유를 통해 묘사했다. 그 가운데 천국을 잔칫집에 비유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부자가 성찬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했으나, 사람들은 자기 일이 바빠 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 부자는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누가> 14:23)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말씀을 근거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강권”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한 선의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겠으나, 그의 논리는 불행하게도 16∼18세기 광기의 시대에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에 대해 휘두른 폭력의 근거로 쓰였다. 이 논리를 확대한다면,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하는 사람들은 잠시도 지체말고 사람들의 영혼을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 이교도들을 지구마을에서 소탕하기 위한 성전을 벌여야 할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우리는 그게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의 참뜻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18세기 프랑스의 잡학박사 볼테르는 신의 이름으로 이웃을 학살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하느님이 종교를 만드셨다면, 하느님은 그대가 없어도 그것을 지탱시킬 것이다.” ‘진리는 하나’라는 명제는 항상 옳은가 이제 다시 첫 번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진리는 오류를 관용해야 하는가. 인류는 역사 속에서, 종교적 신념과 사회과학적 진리는 물론 자연과학적 진리마저도, 명백히 오류라고 여겨지는 논리에 대해서조차 일단은 관용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자연과학적 진리라고 해서 절대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가령, 뉴턴의 역학에 기초해 세워진 근대적 우주관은 19세기까지는 진리로 받아들여졌지만, 오늘날 뉴턴의 역학만으로 우주의 생성과 운동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자연과학자는 없다. 하물며 사회과학적 진리는 말할 것도 없다. 사회과학에서 자신의 이론만을 진리라고 고집한 대표적인 예는 마르크스주의이다. 엥겔스가 다른 사회주의 이론을 모두 ‘공상적 사회주의’라 폄하하고, 자신들의 이론을 ‘과학적 사회주의’라 명명한 데서부터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교조’(dogma)로 변할 씨앗을 품고 있었다. 미셸 푸코는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가 당신들을 비난하는 것은 당신들이 마르크시즘(…)을 과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 말하며, “과학”이라는 주장에서 “권력의 야망”을 읽어낸다.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이고 다른 이론은 ‘공상’이라면, 둘 사이의 관계는 이미 대화나 토론의 상대가 아니라 ‘교정’과 ‘훈육’이 필요한 관계로 변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념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불행하게도 인류는 아직 종교적 신념의 진위를 판단할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판단기준은 아마도 영원히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판단기준을 넘어선 가르침을 펴는 게 종교의 본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서로 다른 종교적 신념 사이에는 흔히 공통의 판단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쑤 “진리는 하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명제는 서로 동의할 수 있는 판단기준을 공유하고 있는 제한된 상황에서만 참이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셋”임을 고집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관용해야 하느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답은 물론 “관용해야 한다”일 것이다. 서로 판단기준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와 대화와 토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협박하거나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게 관용의 정신과 역사의 가르침이다. 만약 판단기준이 서로 다르다면, 우리는 먼저 판단기준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 판단기준이 다른 경우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니라 “셋”일 수도 있고 “넷”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오류를 관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진리가 오류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보다 훨씬 더 인류의 사유와 문화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진리가 오류를 가르쳐야 한다”고 믿을 때, 서로 다른 종교와 관습을 지닌 문화권은 피비린내 나는 쟁투를 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진리가 오류를 관용해야 한다”고 여길 때, 사람들은 새로운 사유의 길을 찾아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이미 이뤄진 자기 마음(成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어리석은 사람 또한 이런 스승은 있는 법이다.”(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無師乎? …愚者與有焉. <齊物論> 3) 관용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를지라도 장자에 따르면,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은 모두 ‘성심’(成心)일 뿐이다. ‘성심’이란 “이미 자기 마음 속에서 이뤄진 어떤 견해”를 뜻한다. 종교적 신념이든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이론이든 장자가 보기엔 모두 ‘성심’의 갈래일 뿐이다. 이런 성심을 가지고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래서 장자는 자기 마음을 스승 삼지 말라고 말한다. 이런 ‘성심’을 ‘진리’라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의 두뇌 속을 바꾸려고 강압과 폭력을 가하는 건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기괴한 독단이다. 폴 발레리의 다음 발언은 장자의 생각과 잘 통한다. “참으로 자유로운 정신은 결코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지 않는다. 만일 정신이 그 자신의 마음 속에서 견해가 생기는 것을 억제할 수 없다면, 그 정신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내심의 현상에 저항한다.” 두 번째 문제는 관용의 한계와 관련한 문제이다. 유럽 사람들은 관용을 무한정 용인하면 결국은 관용을 위협하는 사태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지점이 바로 관용의 한계이다. 예수와 노자의 관용은 바로 이런 관용의 한계를 넘어선 관용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leess@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