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노자가 설파한 구원의 사유… 원수를 덕으로 갚기 위한 실천적 지침
“네 원수를 사랑하라”(Love your enemies)는 예수의 말과 “원수를 덕으로 갚으라”(報怨以德)는 노자의 말을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웃 사랑조차 쉽지 않은 중생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건 성인(聖人)이 되라는 요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와 노자의 말이 ‘좋은 말씀’이긴 하지만 ‘현실성’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세계가 진보하지 못하는 까닭은 이런 자기변명적인 현실주의가 우리 발목을 잡기 때문이 아닐까. 율곡은 이렇게 말한다. “배움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사람은 먼저 모름지기 자기 뜻을 세우되 반드시 성인이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할 것이다. 한 터럭이라도 자기 그릇을 스스로 작다고 여겨 발을 뒤로 빼거나 핑계를 대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初學先須立志, 必以聖人自期. 不可有一毫自小退託之念. <擊蒙要訣> 1)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리고 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고양이나 그리겠다고 마음먹는다면, 호랑이는커녕 고양이 근처에도 가기 어려운 법이다.
성인의 말씀으로 간직하기보다는 실천을…
비유럽 지역의 사상을 논할 때, 서양의 용어로 설명해야 좀더 현실적으로 와닿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그만큼 서양의 논리에 더 친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의 주제도 마찬가지다.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덕으로 갚는 일이 반드시 비현실적인 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그래야만 지구마을이 유지될 수 있는 ‘근본적인 관용’에 대한 요구이다. 이 문제는 여기서 좀더 충분히 논의하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다.
프랑스의 대학 수학능력 평가시험인 바칼로레아에 “참을 수 없는 것은 참아야 하는가”란 문제가 나온 적이 있다. 따지자면 이 질문은 동어반복(tautology)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아무리 참으려고 노력해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그걸 참는 데 성공한다면, 그건 본디 참을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동어반복인 듯한 질문이 성립하는 까닭은,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타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참을 수 있는 것과 내 이웃이 참을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치약을 어디서부터 짜는가 따위와 같은 사소한 습관의 차이 때문에 치명적인 ‘장미 전쟁’을 벌여 끝내 갈라서고 말았다는 부부싸움 이야기를 드물지 않게 듣는다. 하물며 서로 다른 종교나 문화를 가진 겨레 사이에서 참을 수 있는 것과 참을 수 없는 것 사이의 거리는 극과 극을 오갈 수도 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그야말로 “타인은 지옥”인지도 모른다. 가령 우리에게 친숙한 마늘이나 청국장 냄새가 유럽인들에겐 거의 독가스다. 독일의 한국 유학생에게 들은 농담이다. 그는 독일에서 교통경찰에게 잡히면 생마늘을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은 뒤 마늘 냄새를 펄펄 풍기면서 대꾸를 한다고 한다. 그러면 경찰은 혼미해져오는 정신을 가누려 애쓰다 대충 보내준다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참아야 하는가”란 문제의 출제자가 물은 것은 아마도 이런 상황일 것이다. 자기 문화권 안에 갇혀 있을 때는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야 하는 역설의 진실을 깨닫기 어렵다. 그러나 두 문화가 만났을 때, 서로 대화하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관용이다. 종교적 정치적 신념이나 문화적 배경과 관습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야만인 취급하거나 악한 취급하는 일은 그 사람 또는 그 문화권의 정신적 미성숙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관용(tolerance)의 정신은 근대 유럽인이 발전시킨 중요한 사상의 하나다. 관용이란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용인하고 견디는 것”을 말한다. 이는 그가 아무리 자기가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그르다는 확신을 갖고 있더라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뜯어고치려 들거나 저주하는 대신, 그의 생각을 그대로 용인하는 태도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타인의 생각을 용인하는 것이므로 무관심이나 수수방관이나 자포자기와는 유를 달리한다.(필리프 사시에, <왜 똘레랑스인가>) 다른 생각을 용인하고 견뎌내는 미덕 관용의 정신은 피로 피를 씻는 종교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등장했다. 가까이는 16세기 종교개혁기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고, 더 멀리는 로마제국까지 올라간다. 본디 로마제국은 관대한 종교정책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으나, 기독교를 국교화하면서 종교적 불관용이 사회를 위협했다. 기독교도인 원로원 의원들은 시저가 지은 의사당 안에 400년 이상 서 있던 승리의 여신상을 ‘우상’이라는 이유로 철거했다. 이 때문에 로마 국교도와 기독교도는 날카롭게 대립했다. 대세는 이미 기독교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국교도인 원로원 의원들 몇몇은 유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때 로마의 집정관을 지낸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시마쿠스는 관용의 정신사에 길이 남을 명문을 남겼다. “왜 우리 이교도와 기독교도는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 수 없는가? 우리는 같은 별을 바라보며, 같은 행성 위에 있는 동료 여행자들이며, 같은 하늘 아래서 살고 있다. 각 개인들이 궁극적인 진리를 찾기 위해 어떤 길을 걸어가는가가 왜 그리 중요한가? 해답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하나이어야 한다고 말하기에는 존재의 수수께끼가 너무나 크다.”(헨드릭 반 룬, <똘레랑스>) 이 길뿐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존재의 수수께끼”가 너무나 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류의 역사에는 이 “존재의 수수께끼”를 완벽하게 풀었노라고 확신한 사람들이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등장했다. 더 불행한 일은 그런 확신범들이 종종 권력을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했을 때 벌어졌다. 더욱 불행한 일은 이 진리와 권력을 둘 다 손에 넣은 자들이 이웃에까지도 자신의 ‘진리’를 전파하고 싶어졌을 때 벌어졌다. 중세의 종교전쟁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스탈린주의의 공포정치는 권좌에 오른 ‘진리’가 남긴 잔혹극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억압받는 자리에 있을 때는 관용의 정신을 소리높여 요청하다, 권좌에 오른 뒤 불관용의 화신으로 표변한 경우도 있다. 종교개혁가 칼뱅이 대표적이다. 그는 가톨릭의 탄압을 받을 때는 교황청에 종교적 관용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근대 유럽에서 관용에 관한 논의는 그의 이 편지에서 비롯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제네바에 근거지를 마련하자마자 종교적 불관용의 화신으로 변했다. 그가 자크 그루에와 미셸 세르베투스의 학살을 주도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스페인 출신의 자유주의 신학자 세르베투스는 이른바 ‘삼위일체’라는 정통신앙에 회의를 품었다. 그는 종교개혁을 주창한 칼뱅을 대화상대로 믿은 나머지 그에게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칼뱅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세르베투스를 잡아죽여야 할 ‘이단자’로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당시 로마 가톨릭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지만, 세르베투스를 잡아들이기 위해서는 가톨릭과 공조체제를 폈다. 가톨릭쪽은 칼뱅이 제공한 세르베투스의 자필 원고를 근거로 세르베투스를 리옹에서 체포했다. 세르베투스가 리옹을 탈출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으나, 그는 자신이 칼뱅 때문에 체포당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제네바로 향했다. 대화하기 위해 찾아온 순진한 세르베투스를 칼뱅은 감옥에 가두고 70일 동안 심문을 벌인 끝에 “기독교의 근본에 위배되는 이단”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는 외국인이었으므로 추방령을 내리는 게 관례였으나 칼뱅은 그런 관용을 베풀지 않고 장작더미를 준비했다. 화형당하던 날 아침까지도 세르베투스는 칼뱅과 좀더 대화하기를 원했다. 칼뱅이 지하감옥으로 세르베투스를 찾아간 건 이 순진한 영혼에 그가 베푼 최대의 관용이었다. 세르베투스가 하늘나라로 돌아가기 한 시간 전에 나눈 대화에서 이성을 잃고 새파랗게 질린 칼뱅은 “죄값이다, 이 고집불통 불한당아! 불에 타죽는 저주를 받아라!”라고 소리지름으로써 대화를 마쳤다. 진리에 대한 극단적 확신은 경계해야 1553년 초겨울 제네바에서 벌어진 세르베투스 화형 사건은 당시 지식사회에 큰 충격을 던진 만행이었다. 그것은 1983년 1월27일 붉은 여단 로마지부의 활동가들이 제르마나 스테파니니라는 여성 교도관을 ‘처형’한 일 만큼이나 부당하고 어이없는 학살극이었다. 스테파니니는 장애인 특례로 교도관에 취업했으며, 그가 감옥 안에서 한 일이란 수감자들에게 소포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붉은 여단은 그에게 “수감되어 있는 공산주의자 프롤레타리아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억압적 직무를 수행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은 어떤 경우 끔찍한 테러리즘으로 전화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얻은 진리가 사실은 그를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회의해야 한다. 칼뱅의 친구였으나 세르베투스 사건 이후 그와 결별한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옹은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인들이 조금이라도 스스로에게 회의적이었다면, 역사에 등장한 그 모든 살인 행위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관용의 철학은 보복과 저주와 독단과 피의 바다에 빠진 인류를 건져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구원의 사유이다. 그리고 예수와 노자는 매우 급진적인 방식으로 관용의 철학을 제시한 사람들이다. leess@hani.co.kr

프랑스의 대학 수학능력 평가시험인 바칼로레아에 “참을 수 없는 것은 참아야 하는가”란 문제가 나온 적이 있다. 따지자면 이 질문은 동어반복(tautology)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아무리 참으려고 노력해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그걸 참는 데 성공한다면, 그건 본디 참을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동어반복인 듯한 질문이 성립하는 까닭은,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타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참을 수 있는 것과 내 이웃이 참을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치약을 어디서부터 짜는가 따위와 같은 사소한 습관의 차이 때문에 치명적인 ‘장미 전쟁’을 벌여 끝내 갈라서고 말았다는 부부싸움 이야기를 드물지 않게 듣는다. 하물며 서로 다른 종교나 문화를 가진 겨레 사이에서 참을 수 있는 것과 참을 수 없는 것 사이의 거리는 극과 극을 오갈 수도 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그야말로 “타인은 지옥”인지도 모른다. 가령 우리에게 친숙한 마늘이나 청국장 냄새가 유럽인들에겐 거의 독가스다. 독일의 한국 유학생에게 들은 농담이다. 그는 독일에서 교통경찰에게 잡히면 생마늘을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은 뒤 마늘 냄새를 펄펄 풍기면서 대꾸를 한다고 한다. 그러면 경찰은 혼미해져오는 정신을 가누려 애쓰다 대충 보내준다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참아야 하는가”란 문제의 출제자가 물은 것은 아마도 이런 상황일 것이다. 자기 문화권 안에 갇혀 있을 때는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야 하는 역설의 진실을 깨닫기 어렵다. 그러나 두 문화가 만났을 때, 서로 대화하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관용이다. 종교적 정치적 신념이나 문화적 배경과 관습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야만인 취급하거나 악한 취급하는 일은 그 사람 또는 그 문화권의 정신적 미성숙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관용(tolerance)의 정신은 근대 유럽인이 발전시킨 중요한 사상의 하나다. 관용이란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용인하고 견디는 것”을 말한다. 이는 그가 아무리 자기가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그르다는 확신을 갖고 있더라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뜯어고치려 들거나 저주하는 대신, 그의 생각을 그대로 용인하는 태도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타인의 생각을 용인하는 것이므로 무관심이나 수수방관이나 자포자기와는 유를 달리한다.(필리프 사시에, <왜 똘레랑스인가>) 다른 생각을 용인하고 견뎌내는 미덕 관용의 정신은 피로 피를 씻는 종교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등장했다. 가까이는 16세기 종교개혁기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고, 더 멀리는 로마제국까지 올라간다. 본디 로마제국은 관대한 종교정책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으나, 기독교를 국교화하면서 종교적 불관용이 사회를 위협했다. 기독교도인 원로원 의원들은 시저가 지은 의사당 안에 400년 이상 서 있던 승리의 여신상을 ‘우상’이라는 이유로 철거했다. 이 때문에 로마 국교도와 기독교도는 날카롭게 대립했다. 대세는 이미 기독교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국교도인 원로원 의원들 몇몇은 유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때 로마의 집정관을 지낸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시마쿠스는 관용의 정신사에 길이 남을 명문을 남겼다. “왜 우리 이교도와 기독교도는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 수 없는가? 우리는 같은 별을 바라보며, 같은 행성 위에 있는 동료 여행자들이며, 같은 하늘 아래서 살고 있다. 각 개인들이 궁극적인 진리를 찾기 위해 어떤 길을 걸어가는가가 왜 그리 중요한가? 해답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하나이어야 한다고 말하기에는 존재의 수수께끼가 너무나 크다.”(헨드릭 반 룬, <똘레랑스>) 이 길뿐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존재의 수수께끼”가 너무나 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류의 역사에는 이 “존재의 수수께끼”를 완벽하게 풀었노라고 확신한 사람들이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등장했다. 더 불행한 일은 그런 확신범들이 종종 권력을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했을 때 벌어졌다. 더욱 불행한 일은 이 진리와 권력을 둘 다 손에 넣은 자들이 이웃에까지도 자신의 ‘진리’를 전파하고 싶어졌을 때 벌어졌다. 중세의 종교전쟁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스탈린주의의 공포정치는 권좌에 오른 ‘진리’가 남긴 잔혹극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억압받는 자리에 있을 때는 관용의 정신을 소리높여 요청하다, 권좌에 오른 뒤 불관용의 화신으로 표변한 경우도 있다. 종교개혁가 칼뱅이 대표적이다. 그는 가톨릭의 탄압을 받을 때는 교황청에 종교적 관용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근대 유럽에서 관용에 관한 논의는 그의 이 편지에서 비롯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제네바에 근거지를 마련하자마자 종교적 불관용의 화신으로 변했다. 그가 자크 그루에와 미셸 세르베투스의 학살을 주도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스페인 출신의 자유주의 신학자 세르베투스는 이른바 ‘삼위일체’라는 정통신앙에 회의를 품었다. 그는 종교개혁을 주창한 칼뱅을 대화상대로 믿은 나머지 그에게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칼뱅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세르베투스를 잡아죽여야 할 ‘이단자’로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당시 로마 가톨릭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지만, 세르베투스를 잡아들이기 위해서는 가톨릭과 공조체제를 폈다. 가톨릭쪽은 칼뱅이 제공한 세르베투스의 자필 원고를 근거로 세르베투스를 리옹에서 체포했다. 세르베투스가 리옹을 탈출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으나, 그는 자신이 칼뱅 때문에 체포당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제네바로 향했다. 대화하기 위해 찾아온 순진한 세르베투스를 칼뱅은 감옥에 가두고 70일 동안 심문을 벌인 끝에 “기독교의 근본에 위배되는 이단”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는 외국인이었으므로 추방령을 내리는 게 관례였으나 칼뱅은 그런 관용을 베풀지 않고 장작더미를 준비했다. 화형당하던 날 아침까지도 세르베투스는 칼뱅과 좀더 대화하기를 원했다. 칼뱅이 지하감옥으로 세르베투스를 찾아간 건 이 순진한 영혼에 그가 베푼 최대의 관용이었다. 세르베투스가 하늘나라로 돌아가기 한 시간 전에 나눈 대화에서 이성을 잃고 새파랗게 질린 칼뱅은 “죄값이다, 이 고집불통 불한당아! 불에 타죽는 저주를 받아라!”라고 소리지름으로써 대화를 마쳤다. 진리에 대한 극단적 확신은 경계해야 1553년 초겨울 제네바에서 벌어진 세르베투스 화형 사건은 당시 지식사회에 큰 충격을 던진 만행이었다. 그것은 1983년 1월27일 붉은 여단 로마지부의 활동가들이 제르마나 스테파니니라는 여성 교도관을 ‘처형’한 일 만큼이나 부당하고 어이없는 학살극이었다. 스테파니니는 장애인 특례로 교도관에 취업했으며, 그가 감옥 안에서 한 일이란 수감자들에게 소포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붉은 여단은 그에게 “수감되어 있는 공산주의자 프롤레타리아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억압적 직무를 수행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은 어떤 경우 끔찍한 테러리즘으로 전화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얻은 진리가 사실은 그를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회의해야 한다. 칼뱅의 친구였으나 세르베투스 사건 이후 그와 결별한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옹은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인들이 조금이라도 스스로에게 회의적이었다면, 역사에 등장한 그 모든 살인 행위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관용의 철학은 보복과 저주와 독단과 피의 바다에 빠진 인류를 건져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구원의 사유이다. 그리고 예수와 노자는 매우 급진적인 방식으로 관용의 철학을 제시한 사람들이다. leess@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