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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투쟁할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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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2-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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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의 극복을 위한 어진 사람들의 방법… 원수를 향한 ‘동태복수법’을 넘어

마오는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을 구별한 뒤, 적대적 모순은 투쟁을 통해, 비적대적 모순은 화해를 통해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벗을 사랑하고 원수와 투쟁하라는 얘기다.

표현은 다르지만 공자와 노자 할아버지 시절에도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이 있었던 모양이다. 먼저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잘하는 사람을 나는 잘 대해준다. 잘 못하는 사람 또한 나는 잘 대해준다. 그럼으로써 잘함을 얻는다. 미더운 사람을 나는 믿는다. 미덥지 않은 사람 또한 나는 믿는다. 그럼으로써 미더움을 얻는다.”(善者, 吾善之; 不善者, 吾亦善之, 德善. 信者, 吾信之; 不信者, 吾亦信之, 德信. 49장) 노자는 또다른 곳에서는 “원수를 덕으로 갚으라”(報怨以德. 63장)고 말한다.

잘함을 얻고 미더움을 얻기 위하여


이 문제를 두고 누군가 공자에게 질문을 던진 모양이다. <논어>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남아 있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덕으로 원수를 갚으라’(以德報怨)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어떻습니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원수를 덕으로 갚는다면) 덕은 그럼 뭘로 갚을 텐가? 바름으로 원수를 갚고, 덕으로 덕을 갚을 것이다.”(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憲問> 36)

노자는 덕도 덕으로 갚고 원수도 덕으로 갚으라 말하고 있고, 공자는 이와 달리 덕은 덕으로 갚고, 원수는 ‘바름’(直)으로 갚으라고 말한다.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 조금 다른 시각의 기록이 <예기>(禮記)에 나온다. “덕을 덕으로 갚으면 백성들에게 권면할 바가 있다. 원수를 원수로 갚으면 백성들에게 징계할 바가 있다. (…) 원수를 덕으로 갚는 것은 자기 몸을 아껴 구차하게 어질다는 이름을 얻으려는 짓이며, 덕을 원수로 갚는 자는 참형을 받아 마땅한 백성이다.”(以德報德, 則民有所勸. 以怨報怨, 則民有所懲. …以德報怨, 則寬身之仁也. 以怨報德, 則刑戮之民也. <表記> 6)

<표기>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는 형식을 빌려 주로 ‘어짊’에 대해 논하고 있는 <예기>의 한장이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말을 공자의 말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이 기록은 “덕을 덕으로 갚는 것”, “원수를 원수로 갚는 것”, “원수를 덕으로 갚는 것”, “덕을 원수로 갚는 것”의 네 경우를 검토하고 있다. 덕을 덕으로 갚는 건 당연한 일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덕을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패륜적 행위에 대해 사회적인 징벌을 가하는 것 또한 일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경우는 “원수를 원수로 갚는 것”과 “원수를 덕으로 갚는 것”이다.

먼저 “원수를 원수로 갚는다”는 구절이다. 공자는 “원수를 덕으로 갚는 것”에 대해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원수를 원수로 갚으라”고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바름으로 원수를 갚으라”(以直報怨)고 했다. “원수를 원수로 갚는 것”은 이른바 동태복수법(lex talionis)의 잔재라 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동태복수법의 규정은 잘 알려진 바대로 서기 전 18세기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대왕이 만든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에 등장한다. 동태복수의 상징처럼 입에 오르내리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구절은 이 법전의 196조와 197조에 나온다. “사람이 사람의 자식의 눈을 멀게 하였을 경우에는 그의 눈을 멀게 한다.”(196조) “사람이 사람의 뼈를 부러뜨렸을 경우에는 그 사람의 뼈를 부러뜨린다.”(197조)

동태복수법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심성에 호소하는 법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를 통해 정의를 회복한다는 생각은 인류의 법 관념 가운데 가장 초기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에서 동태복수의 관념이 사라진 건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가령 서양에서 복수라는 관념은 중세기를 내내 사로잡았던 관념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의 <봉건사회>에 따르면 유럽의 중세는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사적 복수가 판을 치는 가운데 흘러갔다.” 다른 가문으로부터 상해를 당한 친족의 복수를 뜻하는 게르만어인 ‘페데’(Fehde)는 당시 어떤 도덕적 의무보다도 신성한 것이었다. 가령 다른 가문에 의해 살해당한 주검은 그에 대한 복수를 완수할 때까지는 떳떳이 묻힐 권리를 갖지 못하고 집안에 매달린 채 말라 비틀어져갔다. 근대국가가 성립하면서 개인의 사사로운 복수는 점차 금전적인 ‘보상’으로 대치되고, 나중에는 사적인 복수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사적인 보복이 횡행하면 국가 공권력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원수를 원수로 갚는다”는 말은 동태복수법에서 그리 멀리 않은 관념이다. “원수를 바름으로 갚으라”는 공자의 말은 이런 동태복수의 관념에서 한걸음 진화한 생각이며, 오늘날의 근대적인 법 정신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관념이다.

사적인 보복은 국가 공권력을 위협

다음으로, 노자처럼 “원수를 덕으로 갚는 것”에 대해 <표기>의 기록자는 “관신지인”(寬身之仁)이란 표현을 썼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학자마다 차이가 있다. 이 구절을 송대 이후의 유학자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뜻빛깔로 읽는다. 가령 주희보다 한 세기쯤 앞서 활동한 여대림(呂大臨, 1042∼1090) 같은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덕으로 원수를 갚는 일은 비록 관대함이 지나치지만 후함에 바탕하고 있으므로 어짊을 실천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以德報怨, 雖過於寬而本於厚, 未害其爲仁也. <禮記集解>) 그러나 이렇게 푼다면 “덕으로 원수를 갚는 것”에 반대한 공자의 생각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 대목에 관해서는 당나라 때의 대학자 공영달(孔穎達)의 풀이가 공자의 생각과 더 잘 어울리는 듯하다. 그는 관신지인의 ‘관’(寬)을 ‘아끼다’(愛)의 뜻으로 보아 이렇게 말한다. “(‘관신지인’이란) 몸을 아껴 원한을 그치게 하려는 것으로 올바른 예법은 아니다. 여기서 ‘어질다’는 표현 또한 마땅히 백성들로부터 그릇된 명성을 사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愛身以息怨, 非禮之正也. 仁亦當言民聲之誤. <禮記正義>) 덕으로 원수를 갚는 일은 몸을 사려 대충 넘어가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으며, 그런 사람이 얻은 어질다는 명성은 그릇된 허명이라는 얘기다.

이제 “원수는 바름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으라”고 한 공자의 말이 어디쯤 위치하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철학의 중심 개념은 ‘어짊’이지만, 그가 말하는 어짊이 무골호인의 어짊인 것은 아니다. 그는 “오로지 어진 사람이라야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으며, 사람을 미워할 수도 있다”(惟仁者, 能好人, 能惡人. <里仁> 3)고 말한다. <논어>에는 ‘미워함’에 대한 자공과 공자의 대화가 남아 있다. 자공이 먼저 물었다. “군자도 미워하는 일이 있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물론 미워하는 일이 있다. 남의 단점을 들춰내는 자를 미워하며, 자기가 아래에 처했다고 윗사람을 헐뜯는 자를 미워하며, 용기만 있고 예법이 없는 자를 미워하며, 과감하기만 하고 융통성 없이 꽉 막힌 자를 미워한다.” 이번엔 공자가 물었다. “사야, 너도 미워하는 일이 있느냐?” “남을 잘 살핌을 지혜로 여기는 자를 미워하며, 불손한 행동을 용감한 걸로 여기는 자를 미워하며, 남의 잘못을 들춰내는 걸 정직함으로 여기는 자를 미워합니다.”(<陽貨> 24) 어짊이란 사람을 널리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자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미워해야 한다. 위악을 행할 필요도 있다. 미워하는 것도 사랑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공자에게는 미워하는 것도 사랑(어짊)의 한 가지 수단이다. 그렇다면 노자는 <표기>의 기록자의 시각처럼 “자기 몸을 아껴 구차하게 어질다는 이름을 얻기 위해” “원수를 덕으로 갚으라”고 했을까. 좀더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원수를 덕으로 갚으라 한 까닭은…

“원수를 덕으로 갚을 것”이며 “잘하는 사람도 잘 대해주고, 잘 못하는 사람 또한 잘 대해주라”는 노자의 말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예수의 생각과 온전히 들어맞는다. 생각해보면, 사랑이란 원수에 대한 사랑이어야 의미가 있으며, 관용이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때에 의미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의 말씀이 가장 친절하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3∼48)

노자는 “잘하는 사람에게도 잘 대해주고, 잘 못하는 사람에게도 잘 대해줌으로써 잘함을 얻는다”고 말하고, 예수는 “네 이웃과 네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온전해지라”고 말한다.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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