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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크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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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2-06 00:00 수정 :

크게 작게

상반상성의 사고에 이르는 노자의 목소리… 시간과 공간의 분할면을 넘어서야 가능

노자는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데서 추함을 보았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잘한다고 여기는 데서 잘 못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축복이라고 여기는 데에 재앙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았고, 세상 사람들이 재앙이라 여기는 데에 축복이 깃들어 있음을 보았다. 그는 어떻게 이런 상반상성의 사고에 이를 수 있었을까.

아마도 이 문제는 “크다”는 표현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노자에게 “크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태 가운데 하나다. 그는 “길에 억지로 이름을 붙이자면 ‘크다’고 할 수 있다”(强爲之名曰‘大’. 25장)고 했다. 이때의 크다는 건 작음에 대해 상대적으로 큰 것을 말하는 건 아니다. <노자>에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지니고 있는 덕이 충분히 클 때, 그 덕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다. 노자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삶의 체험에 드러나는 역설적인 상황


“크게 깨끗한 것은 때묻은 듯하다.”(大白若辱.)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은 듯하다.”(大器晩成. 이상 41장. ‘대기만성’의 해석에 대해서는 <한겨레21> 294호 50쪽 참조.)

“크게 이뤄진 것은 무언가 빠진 듯하다.”(大成若缺.)

“크게 가득 찬 것은 텅 빈 듯하다.”(大盈若沖.)

“크게 곧은 것은 굽은 듯하다.”(大直若屈.)

“크게 빼어난 솜씨는 서툰 듯하다.”(大巧若拙.)

“크게 말을 잘하는 사람은 더듬는 듯하다.”(大辯若訥. 이상 45장)

노자에 따르면 ‘깨끗함’, ‘이룸’, ‘가득 참’, ‘곧음’, ‘빼어남’, ‘말을 잘함’ 등의 미덕이 극한적으로 클 때, 그 미덕은 마치 정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참으로 깨끗한 사람은 뭔가 때묻은 듯하고, 크게 이뤄진 일은 뭔가 덜된 듯 헐렁헐렁하며, 정말 속이 가득 찬 사람은 텅 빈 듯 어떤 사태를 만나더라도 선입견 없이 대한다.

우리는 문학 작품을 통해, 또는 삶의 체험을 통해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더러 만난다. 가령 청소년 시절 셸 실버스타인의 그림 동화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잃어버린 자기 조각을 찾아 험한 세상을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어떤 조각은 너무 크고 어떤 조각은 너무 작다. 그러다 마침내 자기에게 꼭 맞는 조각을 찾는다. 이 빠진 동그라미는 뛸 듯 기뻐했지만, 막상 꽉 차고 나니 도리어 뭔가 허전하다. 깊은 생각에 잠겼던 이 빠진 동그라미는 살그머니 자기 조각을 내려놓고 이 빠진 채로 다시 세상을 향해 굴러간다. 이 짧은 동화는 “크게 이뤄진 것은 뭔가 빠진 듯하다”는 노자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생각을 담고 있다.

우리는 또 피카소의 그림이나 추사 김정희의 글씨에서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서툰 듯하면서도 어른으로서는 도저히 흉내내기 어려운 고졸미(古拙美)를 느낀다. 일찍이 추사는 난을 그리는 일을 두고 “교묘하게 잘 꾸미려 하면 도리어 졸렬해진다”(欲巧反拙)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정신은 “크게 빼어난 솜씨는 서툰 듯하다”는 노자의 말과 잘 통한다.

“크다”는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참으로 어떤 사태의 본디 모습에 충실한 것은 그 사태와 정반대인 것처럼 보인다고 노자는 말한다.

“밝은 길은 어두운 듯하다.”(明道若昧.)

“나아가는 길은 물러나는 듯하다.”(進道若退.)

“평탄한 길은 울퉁불퉁한 듯하다.”(夷道若뢰.)

“높은 덕은 낮은 골짜기 같다.”(上德若谷.)

“넓은 덕은 모자라는 듯하다.”(廣德若不足. 이상 41장)

만일 쪽박 찬 하느님을 만났다면…

길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어딘가 바보처럼 보이고 뭔가 손해보며 사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 까닭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밝은 길이 어둡게 보이고, 나아가는 길이 도리어 물러나는 길로 보이며, 평탄한 길이 울퉁불퉁 험하게만 보인다. 그래서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훌륭한 선비는 길에 대해 들었을 때 이를 열심히 실천할 것이다. 중간치 선비는 이를 반신반의할 것이고, 가장 수준이 낮은 선비는 길에 대해 듣자마자 크게 비웃을 것이다. 만약 이런 수준 낮은 선비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면 그건 길이 되기에 부족한 것이다.”(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41장) 예수는 목마른 거지에게 숭늉 한 대접 대접해 주었다면 그게 바로 하느님을 영접한 일이라고 말했다. 만약 거지를 박대해 쪽박까지 깨며 내쫓았다면 그건 자기에게 찾아온 하느님을 두들겨패서 내쫓은 거나 다름없다. 길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길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을 때, 내 마음이 움직여 그걸 받아들였다면 천만다행스런 일일 따름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길에 대해 말해주었을 때, 큰 소리로 껄껄대고 비웃으며 “정신차려, 이 친구야! 이 험한 세상에서 그따위 말이 무슨 소용이야? 그래가지고 밥 빌어먹겠어?” 했다면, 우리는 바로 노자가 말한 “가장 수준이 낮은 사람”처럼 군 것이며, 한갓 그 친구의 말이 바로 길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구실밖에 하지 못한 셈이다. 바라건대는, 우리가 쪽박을 차고 오신 걸인 차림의 하느님을 만났을 때 그에게 따듯한 밥 한끼를 정성껏 대접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가 길에 대해 들었을 때 온전히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더라도 그걸 소리내어 비웃는 경망스런 인간이 되지 않기를!

노자의 글에서 어떤 사태가 충분히 클 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정반대의 모습으로 비칠 뿐 아니라 지극히 역설적인 상황을 불러일으킨다. 노자의 말을 더 들어보자.

“크게 반듯한 네모에는 모서리가 없다.”(大方無隅.)

“큰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는다.”(大音希聲.)

“큰 모습은 어떤 꼴이 없다.”(大象無形. 이상 41장)

노자의 이런 사유는 형식논리학에서 볼 때 허용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로 반대되는 성질이 동시에 동일한 대상에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고 말한다. 가령 네모란 네개의 변과 네개의 모서리를 가진 평면체를 말한다. 네모가 아무리 크더라도 네모는 네개의 모서리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노자 할아버지는 진지하게 “크게 반듯한 네모에는 모서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노자 두 사람의 발언은 각각 다른 위치에 놓인 문법, 다른 논리학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태를 ‘크게’ 바라보았을 때 왜 우리는 역설적인 상황에 빠지는 걸까. 아마도 크게 볼 때만이 하나의 사태에 내재하는 대립자의 양쪽 면을 모두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호에서 예로 든 변방의 늙은이는 시간적으로 크게 보았기 때문에 재앙 속에 축복이 깃들어 있으며 축복 속에 재앙이 숨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노자가 말하는 “크다”는 것은 바로 이처럼 시간과 공간의 분단된 한계 안에서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분할면을 넘어서서 사유할 때 얻어지는 시각일 것이다.

착취당하는 인민의 고통에 깊이 공명

삶의 작은 무게에도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작은 슬픔과 작은 기쁨에도 일희일비하는 우리에게 노자의 말은 너무도 먼 세계의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노자에 관한 사람들의 오해의 대부분은 그가 이처럼 세상을 초연하게 바라보며 고고하게 구름 위에서 살다 간 사람으로 여기는 데서 비롯한다. 노자는 이처럼 “크다”는 관점에서 세상 일에 대해 말했지만, 세상사를 등지거나 혼자서만 마음의 평안을 얻길 추구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사회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착취당하는 인민의 고통에 깊이 공명했으며, 생명을 해치고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침략전쟁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는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윗사람들이 세금을 지나치게 긁어 쳐먹기 때문”(民之饑, 以其上食稅之多. 75장)이라 목청을 높였고, “화려한 옷을 입고 예리한 칼을 차고 싫증이 나도록 쳐먹고 마시고도 창고마다 재화가 가득가득한 자들을 일러 도적의 우두머리라 한다”(服文綵, 帶利劍, 厭飮食, 財貨有餘, 是謂盜과. 53장)고 외치기도 했다. 그는 또 “무기란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상서롭지 못한 것”(夫佳兵者, 不祥之器. 30장)이므로 “부득이 그것을 쓸 뿐”(不得已而用之. 31장)이지, “군사력으로 천하를 강하게 해서는 안 된다”(不以兵强天下. 30장)고 말한다.

세상사의 모순을 초연해 구름 위로 올라간 것처럼 보이는 노자의 상반상성의 논리에서 어떻게 이렇게 강한 사회비판의식이 나올 수 있었을까.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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