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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길이 황홀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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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1-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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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언어로 포착하기 힘든 길에 관한 사유…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길의 작용 방식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 것”을 권유했다. 노자 할아버지도 “길을 길이라 말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왜 노자 할아버지는 침묵하지 않고 오천자의 <도덕경>을 남겼을까. 그의 발언은 ‘말할 수 없는 사태’에 대해 성공적으로 발언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노자 할아버지는 모순에 빠진다. 만약 그가 ‘길’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면, “길에 대해 말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라고 한 자신의 명제와 어긋난다. 만약 그가 언어로 표현한 게 ‘길’의 모습이 아니라면, <도덕경>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노자 할아버지가 남긴 말조차 인간의 언어로 구성된 이상 “늘 그러한 길”이 아니지 않은가.

이런 물음을 던졌을 때 노자 할아버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이런 이율배반을 선선히 긍정할 것이다. “그래, 내가 한 말도 늘 그러한 길일 수 없지.” “그런데 왜 글을 남기셨습니까?” “…….”

그 길을 길이라 하면 길이 아니다?


노자 할아버지가 말하는 길이란 인간의 언어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형용을 동원하더라도 그것은 길의 본디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를 거쳐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가령 잠자리의 겹눈은 사물을 모자이크 방식으로 감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인간이 사유라는 매개를 통해 우주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란, 잠자리가 겹눈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물을 모자이크처럼 감지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우리는 길에 대해 말하면 할수록 길과 멀어진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승들은 “입만 뻥긋하면 이미 글러버린 거다!”(開口則錯)라고 말하고, 노자는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 56장)고 말한다.

그럼에도 노자는 인간의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길에 대해 글을 남겼다. 그런 작업이 이율배반적이고 자가당착적임을 노자가 몰랐던 것은 아니다. <도덕경>을 읽는 매력 가운데 하나는,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세계를 가능한 한 가장 핍진한(veri similis) 언어로 그려내려는 고심을 거기서 발견하는 일이다. <도덕경> 전편에 흐르는, 절대적인 각성의 고독과 지적 겸손의 긴장감은 여기서 나온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길’은 길의 이름인가, 길의 이름이 아닌가. “길은 늘 이름이 없”거나 “이름 없음 뒤에 숨어 있”는데, 어떻게 ‘길’이 길의 이름이 될 수 있는가. (여기서 앞의 ‘길’이란 노자가 <도덕경>에서 쓴 ‘道’라는 글자를 말하고, 뒤의 길이란 그가 ‘道’라는 글자를 통해 나타내려 한 ‘어떤 것’을 뜻한다.) 길이란 그 ‘어떤 것’의 이름이 아니라 자(字)이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해 그것에 자를 지어 ‘길’이라 하고, 억지로 거기에 이름을 붙여 ‘크다’고 한다네.”(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25장) ‘길’이라는 것은 길의 이름이 아니라 자이다. 그것은 우리가 “정약용 선생의 호는 ‘다산’이고 자는 ‘미용’이다”라고 말할 때의 바로 그 ‘자’를 말한다. 정식 이름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을 지칭하기 위해 붙인 가외의 이름이란 뜻이다. 만약 그것에 대해 억지로 이름을 지어 부르자면, 어떤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가 거기 가까울 따름이다. 그래서 노자는 “억지로 거기에 이름을 붙여 ‘크다’고 한다”고 했다. 길은 매우 큰 어떤 것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는 노자의 논리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진술 가운데 하나이다.)

길은 매우 크기도 하고 또 매우 작기도 하다. 온 우주와 한덩어리이기 때문에 길은 크다. 그것은 겨자씨나 티끌보다 작은 어떤 것에도 내재해 있다. 길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길이 하는 작용이나 의도는 너무도 미세하여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늘 하고자 하는 바가 없으니 작다고 이름할 수 있고, 온갖 것이 그에게 돌아가지만 주인노릇 하려들지 않으니 크다고 이름할 수 있다.”(常無欲, 可名於小;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34장) 길은 무엇을 하고자 하지 않는다. 어떤 공간을 차지하려 하지도 아니하고, 심지어는 존재하고자 하지도 아니한다. 그것은 ‘없음’(無)이다. 그럼에도 어떤 작용이 있다. 그 작용으로 인해 세상의 생성변화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온갖 것들이 스스로 그러하도록 내버려둘 뿐, 인격신처럼 명령하고 주재하지 아니한다. 우리가 앞에서 ‘양가론자’의 하나로 다뤘던 혜시의 말투를 빌리자면, 길은 바깥이 없을 만치 큰 어떤 것(至大無外)이고, 또한 그것은 안이 없을 만치 작은 어떤 것(至小無內)이다.

쪼개지지 않는 길을 어찌 말하랴

노자가 길에 대해 말하는 태도는 단정적이지 않고 유보적이며 방편적이다. 그는 우선 길은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잡아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보아도 드러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夷)’라 하고, 귀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하고, 잡아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미(微)’라 한다.”(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 14장) 이(夷), 희(希), 미(微)는 길을 방편적으로 형용하는 또다른 말들이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기관의 주파수대역을 벗어나 있으며, 인간의 이성으로도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노자는 “따져물어 알 수도 없다”(不可致詰. 14장)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이지 쪼개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앞서도 말한 바 있지만, 인간의 언어는 쪼갤 수 없는 우주를 잘게 낱개로 쪼개어 거기에 각각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우주적 사태에 대해 인간적인 이해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수단이다. 그러나 길은 그렇게 쪼개지는 게 아니다. 노자는 길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므로 이름을 붙일 수 없다”(繩繩不可名. 14장)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사태로 한정지어지지 않는 사태”(無狀之狀)이며 “어떤 것도 없는 모습”(無物之象)이다. 급기야 노자는 길의 모습이 “황홀하다”(惚恍!)고 말한다. “길이라는 것은 황(恍)하기만 하고 홀(惚)하기만 하여라. 홀하구나, 황하구나! 그 안에 모습이 있어라. 황하구나, 홀하구나! 그 안에 어떤 것이 있어라. 그윽하고 어둡구나. 그 안에 고갱이가 있어라. 그 고갱이가 매우 참되구나. 그 가운데 미더움이 있어라.”(道之爲物, 惟恍惟惚.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窈兮冥兮, 其中有精, 其精甚眞, 其中有信. 21장) 그는 조심스레 화엄의 세계에 접근하듯 이 아름다운 철학시에서 “황홀하다”는 표현을 후렴처럼 거듭 되풀이하고 있다. 대체 그가 깨달은 길이란 어떤 것이기에 “황홀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을까. 아마도 노자는 길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또 사색하다 어떤 삼매(三昧)의 황홀경을 맛보았을지 모르겠다.

‘황(恍)’이란 “없는 듯 있는 것”이며, ‘홀(惚)’이란 “있는 듯 없는 것”이다. 14장에 대해서는 왕필과 왕부지의 풀이가 친절하다. 먼저 왕필은 이렇게 말한다. “없다고 말하려 해도 온갖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생성한다. 있다고 말하려 해도 그 모습을 볼 길이 없다.”(欲言無邪, 而物由以成. 欲言有邪, 而不見其形. <老子注>) 또 왕부지는 이렇게 말한다. “사물에는 틈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 틈을 알지 못하여 그것을 함부로 뭉뚱그리거나 멋대로 쪼갠다. 그래서 사물이 근심덩이로 변한다. 길은 틈이 없지만 사람들은 억지로 거기에 틈을 나누어 그것을 자의적으로 파악하거나 멋대로 분별한다. 그래서 길이 다만 빈 이름으로 전락하고 만다.”(物有閒, 人不知其閒; 故合之, 背之, 而物皆爲患. 道無閒, 人强分其閒; 故執之, 別之, 而道僅爲名. <老子衍>)

없음과 빈곳, 길의 쓰임을 감지하는 통로

노자에 따르면 길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길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길에 대한 바른 설명이 아닌 듯하다. 왜 그런가. 길은 없음을 통해 작용하고, 길의 작용은 자취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노자는 말한다: “진흙을 빚어 질그릇을 만들 때, 그릇의 빈곳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문을 내고 들창을 뚫어 방을 만들 때, 그 방의 빈곳에 방의 쓰임이 있다.”(연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유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11장) 사람들은 그릇의 빔 때문에 그릇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릇의 빈곳이 소중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다만 당연하다고 여길 뿐이다. 길이 세상에 작용하는 방식은 그릇의 빔과도 같다. 우리는 길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길의 고마움을 모른다.

노자가 말하는 없음(無)이나 빈곳(虛)은 인간이 길의 쓰임을 감지하기에 좋은 접근통로이다. 그는 이 없음과 빈곳을 길을 형용하는 데에만 쓴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없음과 빈곳의 논리를 당대의 논쟁에 끌어들여, 통치계급을 향해 ‘함이 없음(無爲)의 정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제부터는 노자가 전제로 삼은 논리학은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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