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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신이여, 와인을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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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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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 마디]

포르투갈-“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종교에 관한 한 나는 늘 태도가 어정쩡했다. 알 수 없는 죽음 저편의 세계,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영원한 삶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 싶어서였을까.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본능이 철든 이후 내 삶을 지배해왔다. 포르투갈의 ‘종교도시’ 브라가에서 사흘 밤과 나흘 낮을 머무는 동안 ‘종교적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포르투갈에는 대표적인 도시들을 둘러싼 농담이 있다. “리스본은 통치하고, 포르토는 일하고, 브라가는 기도한다”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인 리스본, 경제의 중심지인 포르토, 종교 중심지인 브라가의 성격을 빗대어 하는 농담이다).


연좌제에 소급까지 거는 신이라니

브라가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 작은 마을에 교회가 서른다섯 개가 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많은 교회를 필요로 했을까?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라는 세(Se) 성당을 둘러볼 때 질문이 일었다.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힌 예수상을 보며, 우리의 죄를 대속했다는 그를 보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우리가 지은 죄가 얼마나 위중하기에 그는 우리 대신 저렇게 잔인하게 죽어야 했을까? 언제인지도 모르던 그 옛날, 철모르던 최초의 인류가 저지른 죄로 인해 온 인류가 수천, 수만 대에 걸쳐 회개해야 하다니!(그 모든 일들이 사실이라면!) 이렇게 잔인한 징벌을 두고 두고 내리는 분이 신이라니! 그럴 리가 없다. 이건 어쩌면 인간이 신에 대해 지니고 있는 오해인지도 모른다. 성경의 가르침을 딱 한 줄로 요약한다면, 내 미천한 이해의 수준에서 그건,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다. 그런 사랑을 가르친 신이 연좌제에 소급까지 걸어 인간을 벌하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브라가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기독교의 원죄의식은 여전히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브라가의 수많은 교회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봄 지저스 도몬테 교회. 종교적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진/ 김남희)

종교도시 브라가를 거쳐 상업도시 포르토로 넘어왔을 때 그곳의 세속적인 분위기는 나를 즐겁게 했다. 거긴 빛이 넘치고, 어디에나 와이너리가 있었고, 사람들이 활기차게 살아가는 도시였다. 포르토는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와인 ‘포르토’의 원산지였다. 때는 17세기, 오랜 견원지간 영국과 프랑스가 다시 냉전에 들어갔다. 단단히 토라진 프랑스는 영국에 와인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와인의 공급지를 새로 구해야 했던 영국이 찾아낸 곳이 바로 포르투갈. 하지만 포르투갈에서 영국까지의 항해는 한 달이 걸렸고, 그사이 와인은 초가 되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와인에 브랜디를 넣어 숙성시킨 포르토 와인이다. 스페인을 거쳐 포르투갈로 넘어오는 동안 나는 조금씩 와인의 맛에 길들여졌다. 포르토에서 내가 즐겨 한 일은 날마다 새로운 와이너리를 찾아가 공짜 시음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식당에서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시키고(잔으로도 판다는 걸 깜빡하고, 한 병을 시켜버렸다) 저녁식사를 주문했다. 식당의 주인장이 추천한 음식을 시켜놓고 홀짝거리며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잠시 뒤 요리가 나왔다. ‘아로즈 데 룰라스 감바스’라는 낯선 이름의 요리. 아, 그건 오징어찌개에 밥 말아놓은 거였다. 눈물이 날 뻔했다. 새우, 조개, 오징어, 홍합이 들어간 해물탕. 매운 맛이 살짝 도는 그 뜨거운 찌개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워내며 나는 좀전까지의 외로움을 잊고 여행을 계속해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밥 한 그릇의 힘! 그 치유의 힘은 놀라웠다. 뜨거운 해물국밥 한 그릇을 배부르게 먹고 났더니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와인 두 잔에 얼굴도 붉게 달아올라 숙소로 돌아오는 길, 아스팔트가 슬쩍슬쩍 일어서고 있었다.

포트투의 400년 된 와이너리에서 와인을 시음 중인 관광객들. 포르투갈의 와인과 예술의 나라다. (사진/ 김남희)

슬픈 파두의 도시, 큄브라

포르토를 거쳐 다음 도시는 포르투갈의 옥스퍼드로 불리는 대학도시 큄브라였다. 큄브라는 포르투갈의 전통음악 ‘파두’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의 파두는 리스본의 파두와 달리 오직 남자들만이 부를 수 있었다. 운명적인 사랑의 비극을 노래한 파두는 애조 띤 곡조부터 가슴을 뒤흔드는 노래였다(언젠가 집에서 베빈다가 부르는 파두를 듣고 있을 때, 엄마가 말했다. “그렇게 슬픈 노래는 그만 듣는 게 낫겠구나.”). 큄브라에서는 카페에서도, 대학의 교정에서도, 가정집에서도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는 파두가 흘러나왔다.

굳이 리스본을 말하지 않더라도 포르투갈은 이미 유럽의 숨은 보석이다. 여름, 특히 8월에 포르투갈을 방문하면 뜨거운 태양이 당신의 지적 호기심과 열정까지 다 태워버릴 수 있으므로(게다가 피서철이라 모든 곳의 가격이 오르고, 서비스는 형편없어지고,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여름을 피해 포르투갈을 찾아가자. 세속과 종교의 삶이 어긋나지 않는 땅, 와인과 예술의 나라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마디’는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김남희씨의 보람찬 세계여행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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