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 마디]
유럽 - “벌을 받게 마련인 광기”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이란을 떠나던 날, 트랜스 아시아 익스프레스 열차에 오르며 나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지난 2년 동안 난 아시아를 떠돌았어. 그 땅에서 나는 늘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내가 세상을 관찰하기보다는 세상이 나를 관찰했지. 이제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누구도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쳐다보지 않아서, 완벽한 익명의 섬으로 떠오를 수 있는 땅으로 가는 거야.’
모나리자가 있는 ‘남대문시장’ 그렇게 유럽 땅에 들어섰다. 꼭 10년 만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나는 살아갈 일이 막막해 배낭을 꾸려 유럽으로 갔다. 내 인생의 첫 해외여행, 67일의 시간은 내 삶을 바꾸었다. 그때 내가 유럽에서 본 것들. 늘 그렇듯 나를 흔든 건 사소한 것들이었다. 담배를 물고 거리를 지나가는 여자들, 자기 몸을 행위예술의 오브제로 내어놓은 젊은이들로 가득 찬 도서관(공부와는 담 쌓은 듯 보이는 외양을 배신하는 풍경!), 거리의 악사들, 그 몸에 밴 자신감과 당당함. 누구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제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삶. 그때 내 눈에는 유럽이 가진 장점만 보였다. 사람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남들 사는 대로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구나. 세상에는 그렇게 다양한 방식의 사는 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건 내가 처음 맛본 자유였다. 그 불온한 자유의 맛에 끌린 나는 결국 두해 뒤,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스물다섯의 여름부터 스물여섯 가을까지 나는 영국에서 청춘의 절정기를, 그게 절정이라는 인식도 없이 맞고 있었다. 1년3개월의 짧은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무렵, 나는 유럽의 빛뿐 아니라 어두움도 볼 수 있는 눈이 생겨 있었다. 그 뒤 해마다 한번도 빠짐없이 남의 나라를 여행했지만, 유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유럽을 떠난 지 꼭 10년 만에 다시 이 땅에 들어서니, 카뮈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의 젊음의 고장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스무살 적에 사랑했거나 강렬하게 즐겼던 것을 마흔살에 다시 살아보겠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광기, 거의 언제나 벌을 받게 마련인 광기다.” 내 나이 이제 서른여섯. 빠르게 마흔이 다가오는 나이에, 청춘의 빛나던 시절에 내가 사랑했던 곳, 강렬하게 살아 있었던 곳으로 돌아왔다. 추억이라 이름 붙은 기억을 품고 있는 그 도시들은 내게 어떤 표정을 지어줄 것인지. 그곳에서 내가 돌려받을 것이 오직 ‘벌’뿐이라 해도, 그 벌조차 나는 달콤하게 받아들이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들어선 파리에서 내가 처음 찾은 곳은 루브르 박물관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재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루브르의 비극’이었다. 무엇보다 ‘너무나’ 많은 명작들이 ‘너무나’ 거대한 공간에 모여 있는 탓에 ‘너무너무’ 유명한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관객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는 게 첫 번째 비극이었다. 모나리자의 예를 들자면, 루브르 곳곳에는 모나리자가 전시된 방으로 가는 화살표가 붙어 있고(이건 분명 10년 전에는 없었다), 그 화살표만 따라가면 모나리자의 방에 이른다. 그곳에는 공항이나 은행처럼 줄을 세우는 라인이 늘어서 있고, 엄청난 인파의 사람들이 잘 보이지도 않는 그림에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며 사진을 찍고 있다. 가까이서 모나리자의 미소를 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루브르 방문객의 절반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와서 모나리자만 본 뒤에 돌아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남대문 시장보다 어지럽고, 붐비는 방. 슬픈 모나리자여.
루브르의 비극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루브르를 돌아보는 동안 내 감정의 물결은 슬픔에서 질투를 넘어 마침내 분노로 널을 뛰고 있었다. 이집트관 못지않게 나를 화나게 한 건 1층의 메소포타미아, 이란관이었다. 바로 며칠 전 테헤란의 국립박물관의 빈약한 소장품, 함무라비법전의 카피본(그 밑에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프랑스 고고학팀이 함무라비법전의 해독을 위해 프랑스로 이 돌을 가져간 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카피본만을 돌려보냈다고)을 보고 온 뒤여서 더 그랬을 것이다. 특히 수사의 다리우스 황제의 궁 벽장식을 그대로 뜯어와 진열해놓은 12번 방은 경악 그 자체였다. 채색 부조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벽들이 통째로 걸려 있었다.
이란 국립박물관보다 훌륭하다니!
이란의 국립박물관에서도 파손된 부품으로밖에 보지 못했는데, 루브르에는 그야말로 흠 없이 완벽한 ‘마스터피스’들만이 모여 있었다. 아파다나궁의 석주 기둥머리 같은 것도 이란에서 본 어떤 것보다 상태가 완벽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 작품들 앞에서 사진을 찍는, 스카프 쓴 이란 여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았다. 페르세폴리스에 있어야 할, 이란 국립박물관에 있어야 할, 가장 값어치 있는 작품들이 전부 그곳에 모여 있는 걸 보는 내 기분은 한마디로 ‘더러웠다’.
이란 국립박물관의 소장품보다도 루브르 ‘이란관’의 소장품이 더 다양하고, 질적으로도 더 훌륭하다니! 정말이지 이란이나 이집트에 갈 필요가 없다. 루브르 혹은 대영박물관에 와서 보면 그만인 것을! ‘서양인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동양에 진 빚을 인식하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라고 한 서양인이 그의 책에서 고백했다. 그렇게, 다시 찾은 유럽의 첫 얼굴은 동양에 빚진 자로서의, 갚을 길 없는 막막한 채무자의 슬픈 표정이었다.
모나리자가 있는 ‘남대문시장’ 그렇게 유럽 땅에 들어섰다. 꼭 10년 만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나는 살아갈 일이 막막해 배낭을 꾸려 유럽으로 갔다. 내 인생의 첫 해외여행, 67일의 시간은 내 삶을 바꾸었다. 그때 내가 유럽에서 본 것들. 늘 그렇듯 나를 흔든 건 사소한 것들이었다. 담배를 물고 거리를 지나가는 여자들, 자기 몸을 행위예술의 오브제로 내어놓은 젊은이들로 가득 찬 도서관(공부와는 담 쌓은 듯 보이는 외양을 배신하는 풍경!), 거리의 악사들, 그 몸에 밴 자신감과 당당함. 누구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제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삶. 그때 내 눈에는 유럽이 가진 장점만 보였다. 사람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남들 사는 대로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구나. 세상에는 그렇게 다양한 방식의 사는 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건 내가 처음 맛본 자유였다. 그 불온한 자유의 맛에 끌린 나는 결국 두해 뒤,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스물다섯의 여름부터 스물여섯 가을까지 나는 영국에서 청춘의 절정기를, 그게 절정이라는 인식도 없이 맞고 있었다. 1년3개월의 짧은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무렵, 나는 유럽의 빛뿐 아니라 어두움도 볼 수 있는 눈이 생겨 있었다. 그 뒤 해마다 한번도 빠짐없이 남의 나라를 여행했지만, 유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페르시아 제국의 사라진 영광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더 쉽게 확인된다. 이란 페르세폴리스의 유적들. (사진/ 김남희)

이란 국립박물관에 있는 함무라비법전의 카피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