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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내게 ‘빈대짓’을 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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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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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우린 너한테 많이 배웠어”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터키의 이스탄불로 건너가는 ‘트랜스 아시아 익스프레스’(Trans-Asia Express) 열차는 목요일 오후, 기적을 울리며 출발했다. 같은 칸을 쓰게 된 그들, 모즈간, 네가르, 마리얌. 스물에서 스물넷, 아직 세상 어디에도 집을 짓지 않아 아름다운 나이였다. 이들의 종교는 바하이. 이란에서 가장 박해받는 종교 바하이즘은 1840년대에 이슬람 시아파가 만든 개혁 종파로 모든 인류의 조화와 평등을 주장하는 엄격한 평등주의로 유명했다. 그 평등주의로 인해 바하이는 대학에 갈 수도 없고, 직업을 얻을 수도 없는 차별을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바하이들이 유엔의 도움으로 망명을 떠나왔고, 모즈간과 마리얌 자매 역시 대학에 가기 위해 터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을 가는 길이었다(대학에 가기 위해 일정 기간 삶을 유보해야 하는 우리, 나고 자란 땅을 버리고 유배를 떠나야 하는 그들. 어느 쪽이 더 불행한 것일까).

나를 위해 바하이 성서를 읽어주다


이란에서 여성으로, 바하이로 산다는 건 이중의 차별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일이라고 한숨을 내쉬면서도, 공부를 마치면 돌아오겠다는 그들이었다.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방문을 닫고 커튼을 친 뒤, 스카프를 벗어던지고, 긴 검은 옷을 벗고, 반팔의 티셔츠 차림으로 날렵하게 변신한 그들과 3박4일의 이동을 시작했다. 다음날은 바하이들의 종교기념일이었다. 여기저기서 성서를 읽거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모즈간이 나를 위해서라며 성서 한장을 눈으로 읽었다. 그 마음이 어여뻐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밤 마리얌은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었다. 동생인 모즈간이 언니를 안고 위로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를 조국을 떠나는 이 어린 처녀들의 마음을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트랜스 아시아 익스프레스'에서 3박4일을 함께했던 마리얌, 모즈간, 네가르(왼쪽부터). 이들의 종교는 박해받는 바하이였다. (사진/ 김남희)

서글픈 현실에 비해 차창 밖 풍경은 싱그러웠다. 붉은 양귀비꽃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들판, 초원 위에서 풀을 뜯는 양떼들과 흰 구름이 어슬렁거리는 푸른 하늘, 그리고 바다처럼 넓고 푸른 호수가 그림처럼 펼쳐지고는 했다. 그 기차 안에서 내 정체성은 철저한 ‘빈대’였다. 나는 늘 다른 이들이 준비해온 야채와 빵, 치즈, 차 등으로 차려낸 식탁에 빈대를 붙었다. 옆 칸의 베흐남 부부, 모즈간, 마리얌, 네가르와 매끼를 함께했다. 동행 내내 그들은 식당칸과 나를 강제 격리시키고, 가져온 모든 음식을 서로 나누며, ‘친절한 이란인’을 몸으로 증거하고 있었다.

터키의 작은 도시에서 모즈간과 마리얌이 내릴 때, 그들이 말했다. “넌 참 좋은 여자야. 우린 너한테 많이 배웠어. 화장하는 법(기초 화장품만 대충 두드리고 마는 내 화장법은 늘 친구들의 우려와 비웃음을 사곤 했는데!), 방을 깨끗하게 정돈하는 법, 환경을 생각하는 것….” 내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더 좋은 여자야. 내가 오히려 너희들에게 많이 배웠어. 남을 배려하는 법, 손님을 환대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법. 이런 소중한 경험을 하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키스를 나누고 헤어진 뒤에도 그들은 다시 기차에 올라왔다 내려가고, 열차가 떠날 무렵 창문을 두드리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기차에서의 마지막 밤. 이란 청년들이 음주가무를 즐기기 위해 식당칸으로 몰려갔다. 베흐남 부인과 네가르는 혼자 자는 나를 걱정했지만, 처음 만나는 자유의 맛에 이미 중독된 열혈 청년들이 이국의 30대 여자에게 관심을 쏟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들과 마지막 아침을 나눌 때, 혼자 6시간을 더 가야 하는 나를 위해 베흐남 부인은 점심거리를 따로 싸주었다.

터키 가족과의 상봉은 눈물 바다

기차가 스키나이역에 도착하기 전부터 네가르는 울고 있었다. 그의 가족들은 모두 터키에 거주하고 있었고, 그만 남편과 야즈드에서 살고 있었다. 1년에 한번 만나는 가족들이었다. 열차가 플랫폼에 진입할 때, 가족들이 그를 발견하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채 멈추지도 않은 열차로 뛰어올라와 그를 끌어안고, 키스하며,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 앞니가 다 빠진 그의 늙은 아버지가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을 본 순간, 나도 울었다. 그를 마중 나온 친척들의 숫자는 휠체어에 앉은 소년까지 모두 스물여덟명. 두어명의 늙은 여자들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스카프를 쓰고 있지 않았다. 딱 붙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그들의 모습은, 수녀복처럼 검은 옷을 입은 네가르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빼곡히 둘러싸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가슴이 아릿아릿해지는, 따뜻하고 슬픈 풍경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배로 갈아타고 있는 승객들. 기차가 지나가는 곳마다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사진/ 김남희)

그 3박4일의 시간 동안 나는 단 한번도 식당칸에 가보지 못했다. 그때마다 내 팔을 잡아끌며 말리는 그들의 힘은 너무 셌다. 그 힘과 의지로 그들이 이란에서, 미국에서 씩씩하게 살아남기를 나는 빌었다. 테헤란을 떠난 지 71시간 만에 기차가 이스탄불에 들어섰을 때, 내가 본 첫 풍경은 플랫폼에서 뜨겁게 키스하는 한쌍의 연인이었다. 그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광경에 왜 눈물이 났을까. 세상의 모든 사랑하는 이들이 그 사랑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지구 위의 모든 여자들이 자유롭게 입고, 행동하며, 꿈꾸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제발 이슬람 국가들이 허락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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