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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옛 꿈에 갇힌 에스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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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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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 마디]

이란- “마침내 페르세폴리스에 왔다”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내 상상력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들 앞에 설 때면 나는 말을 잃고 한숨이 앞서는 습관이 있다. 이란을 여행하는 동안, 나는 자주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이란에 들어설 때만 해도 이 땅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에 대한 특별한 기대는 없었다. 내가 가진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일천했기에, 기대가 들어설 틈도 없던 거였다. 하지만 야즈드와 시라즈, 에스파한과 테헤란을 거치는 동안 나는 이 나라가 품고 있는 문화유산에 대해 경의와 찬탄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400년의 세월을 건너온 돌다리들

그중에서도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그 앞에 섰을 때, “마침내 페르세폴리스에 왔다” 이 말만 앞서고, 다른 말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 3세가 스물두살의 나이로 5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 대왕의 제국을 치기 위해 소아시아의 연안을 출발하던 BC 334년 봄. 그 봄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페르세폴리스의 아름다움은 알렉산더 대왕까지 흔들어, 그는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운 뒤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뜨거운 햇살 아래 거대한 석회암 기둥들이 보는 이를 압도하며 서 있던 그곳. 다리우스 대왕의 왕궁 벽의 부조는 그 옛날 찬연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말없이 증거하고 있었다. 아득하게 사라진 제국의 영광을 품고 있는 돌들. 거기 숨겨진 이야기들, 무너지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 말하지 못하는 것들은 여전히 나를 눈물나게 했다.

에스파한의 오래된 돌다리들 밑에는 찻집이 있었다. 찻집에서 물담배를 피우며 쉬는 사람들. (사진/ 김남희)

페르시아 문화의 보석 에스파한.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꼭 한번 여기에 와봐야 하리라. 와서, 인간이 만든 건축물이 어떻게 인간의 삶 속 깊이 들어오는 공간이 되는지 보고 배워야 하리라.’ 중얼거리게 되던 곳. 그 도시의 이맘 광장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광장이라고 했다. 시내를 걸어 광장에 들어섰을 때 나는 망연히 서서 내 눈앞에 펼쳐진 광장을 바라봐야 했다.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았던 멋진 광장이었다. 그 광장의 귀퉁이에는 오래된 찻집들이 있었다. 찻집에서는 사람들이 광장을 내려다보며 차를 마시고 물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광장의 또 다른 끝에는 사원과 궁궐이 서 있었다. 아름다운 건물들이었다. 푸른색 타일이 박힌 벽이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다운지 나는 차가운 타일을 손으로 짚어가며 자주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하지만 이란에서 내가 가장 사랑한 것은 에스파한의 다리들이었다. 강변을 따라 걷는 녹음 우거진 길. 그 길에는 오디를 줍는 여인들과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벤치에는 지나가버린 청춘을 돌아보는 노인들이 조각처럼 앉아 있고는 했다. 초록이 이미 짙어가고 있는 그늘로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오세 다리를 지나 추비 다리를 건너, 카주 다리까지 이어지는 길. 그건 에스파한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던 길이었다. 다리 밑 그늘 어디에선가 현악기의 선율에 맞춰 노래하는 젊은 목소리들이 실려오던 길. 400년의 세월을 건너온 돌다리들은 파리나 베니스 혹은 유럽의 그 어떤 도시의 다리보다 더 어여뻤다.

에스파한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카주 다리 밑을 걷고 있는 이란 여성들. (사진/ 김남희)

세월의 흔적에 닳아 반짝반짝 빛나는 돌다리들 밑으로는 찻집들이 있었다. 다리 밑 찻집에서 뜨거운 차 한잔을 시켜놓고 장자를 읽다 보면, 책에서 눈을 들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자면, 문득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가 아득해지고는 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검은 차도르를 쓴 여인들이 남자들과 함께 물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아득한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마음밭을 적시는, 햇살 환하던 5월의 오후. 강변의 녹음 우거진 길을 따라 다리를 건너다니며 일없이 소일하는 일. 역사적, 문화적 공간이 즐비한 에스파한에서도 놓쳐서는 안 되는 일.

차 한잔 앞에두고 장자를 읽다

에스파한의 곳곳에는 몇백년 된 식당과 찻집이 즐비했다. 비둘기를 키우기 위한 비둘기집조차 예술작품처럼 짓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삶을 즐기고 여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고, 이방인에게 여유롭고 친절했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노라면 여자들이 눈을 빛내며 다가와 묻고는 했다. 어디서 왔느냐고, 어디로 가느냐고. 그리고 그들은 말없이 내 찻값을 내고 사라지고는 했다. 검은 차도르를 끌면서. 그토록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했던 사람들의 후손, 그들의 현재는 수많은 제약 속에 갇힌 삶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 간극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에스파한은, 아니 이란 땅 전체는 옛 꿈에 갇힌 사람들이 자유로운 미래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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