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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내 인생 최초의 양성애자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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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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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 마디]

이란- “내 삶에서 여자들과의 관계는 늘 고통스러웠어”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영국인 에밀과 프랑스에서 온 세바스티앙을 만난 건 야즈드에서였다. 우린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었고, 셋 다 혼자 여행하던 터라 금세 친구가 되어 어울렸다. 게다가 에밀은 경주에서 1년간 영어강사를 했고, 세바스티앙 역시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어 한국이라는 나라에 조금은 익숙했다. 그 약간의 지식은 서로의 국적과 이름을 나눌 때부터 드러났다. “너희 영국과 프랑스도 별로 사이 좋은 나라는 아니지?”(영국인은 개구리 요리를 먹는 프랑스 사람들을 ‘개구리’(Frog)라고 부르며 폄하하고, 프랑스인은 영국 사람들을 ‘구운 소고기’(Roast beef)라며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여왔다)라고 건넨 농담에 둘은 동시에 대답했다. “안 좋긴 한데, 한국과 일본만큼은 아니야.”


여자들과는 재미로 섹스를 한다…

페르세폴리스의 오래된 옛 목욕탕을 개조한 식당에서 차를 마시며 쉬는 여행객 에밀, 알렉산더, 세바스티앙(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사진/ 김남희)

‘바게 돌랏 아바드’라는 이름의 정원으로 차를 마시러 간 저녁. 꽃과 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정원 곳곳에 페르시안 카펫을 깐 평상이 놓여 있어 안락하고 푹신한 쿠션에 기대거나 누워서 차를 마시며 물담배를 피우는 곳이었다. 다들 돌려가며 물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에밀이 물었다. “한번 안 피워볼래?” “내 인생에 가까이 안 하는 것 여섯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담배야.” “나머지 다섯 가지는 뭔데?” “술, 커피, 도박, TV, 그리고 남자야.” “너… 완전히 수녀네. 이제부터 널 ‘여행하는 수녀’라고 부르겠어.” 에밀이 별명을 붙이더니 말을 이어간다. “한번 피워봐. 나도 평상시엔 담배를 안 피우는데, 이건 문화적 경험으로 피워보는 거야. 과일향이 나는데다 폐 안에 쌓이지도 않아. 그냥 내뿜는 거니까.” 결국 못 이기는 척 나도 물담배를 건네받았다.

정말 담배에선 달콤한 사과향이 났다. 무엇보다 연기를 빨아들일 때 나는 그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재미있었다. 세바스티앙이 말을 받았다. “그 여섯 가지 중에 나머진 다 괜찮은데, 웬만하면 남자는 가까이하며 살아라.” “안 돼. 남자가 제일 골칫거리야.” “남자도 문화적 경험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프랑스 남자와의 문화적 경험 어때?” “어림없는 소리.” 눈을 흘기며 물담배를 뻐끔거리던 나(나이 들어가는 일의 미덕 중의 하나는 이렇게, 이십대의 나였다면 얼굴을 붉혔을 성적인 농담에도 비교적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다는 게 아닐까). 어디에선가 장미향이 바람에 실려 날아오는 아름다운 봄밤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페르세폴리스를 보기 위해 함께 떠났다. 페르시아 제국의 옛 영광이 잔해로 남은 페르세폴리스를 둘러보고 나오던 길. 마지막 코스로 들른 곳은 박물관이었다. 그곳에서 세바스티앙에게 물었다. “그래, 도대체 네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와 자봤는데?” “솔직히 말하면 4년 전까지는 오직 여자만 찾았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한동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당황해하는 에밀의 표정과 비교적 태연한 세바스티앙의 얼굴을 번갈아 들여다보다가, 한참 만에야 뜻을 알아챘다. 머리에 돌을 맞은 듯 멍했다. “내 삶에서 여자들과의 관계는 늘 너무 고통스러웠어. 난 지금 남자들과 훨씬 잘 지내고 있고, 편안해. 여자들과는 가끔 재미로 섹스를 할 뿐이야.” 돌에 맞은 곳을 다시 또 얻어맞은 듯했다. “그러니까, 너….” “그래, 난 양성애자야.”

자신의 성적 정체성은 ‘호모섹슈얼’인데, 여자들과 즐기기 위해 섹스를 하기도 하는 ‘바이섹슈얼’. 너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워 세바스티앙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몰랐다. 내가 그런 사적인 질문을 “사적인 걸 물어도 돼?”라고 허락을 받은 뒤 물었던 건, 프랑스 남자들에 대해 사람들이 지닌 여러 가지 편견을 에밀과 함께 이야기하던 끝이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남자들. 가장 자주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아내나 남편 외에도 정부가 있고, 그걸 묵인하는 사회.’ 세바스티앙 역시 ‘원 나잇 스탠드’의 경험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곤 했다. 내가 입은 심리적 부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세바스티앙이 물었다. “네가 충격받은 게 내가 게이라는 것 때문이야, 아니면 여자들과 재미로 섹스를 한다는 것 때문이야?” “둘 다야. 처음엔 게이라는 게 충격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재미로 여자들과 섹스를 한다는 게 더 충격적인 것 같아. 우리 사회에서 바이섹슈얼은 변태로 여기거든.”

페르세폴리스 박물관에서 깨달은 나의 위선

그날 페르세폴리스 박물관에서 깨달은 건 나의 한계와 위선이었다. 나는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이 하나도 없다고, 그건 그저 담배를 피우고 안 피우는 것처럼 성적 기호의 문제일 뿐이라고, 그러니 그들의 권리와 자유는 똑같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늘 주장해왔는데, 너무나 멀쩡해 보이는 세바스티앙이 게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던 거다. 내 안에도 게이나 레즈비언은 어딘가 음충맞은 눈길에 음험한 냄새를 슬금슬금 풍기는 인물일 거라는 편견이 깔려 있었던 걸까? 아니, 동성애자는 괜찮지만 양성애자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내게 세바스티앙은 말했다.

거대한 원주들이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곳. 페르세폴리스는 사라진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이다. (사진/ 김남희)

“괜찮아. 넌 그래도 나은 거야. 넌 네가 충격받았다는 걸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내고 솔직하게 말하잖아. 사람들은 겉으로는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 그리고 점점 거리를 두는 거지.” 어색하던 분위기는 금세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웃고 떠들며 영국인과 프랑스인, 한국인과 일본인을 안주로 올려놓고 신나게 도마질을 했다. 박물관을 나와 점심을 먹던 중, 에밀이 물었다. “그런데 오늘 페르세폴리스 박물관의 소장품들이 뭐였는지 기억나는 사람?” 우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어쨌든 페르세폴리스 박물관은 그렇게 내 인생 최초의 양성애자 친구를 선물처럼 남겨주었다(그러고 보니 나는 여전히 세바스티앙을 거쳐간 여자들의 수를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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