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 마디]
파키스탄 -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해 왜 타인들이 함부로 평가하는지”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페어리 메도(Fairy Meadow)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로 꼽힌다. 해발고도 3천m에 펼쳐진 초원과 호수, 그리고 호수에 그림처럼 내려앉는 산 낭가파르바트(8천m). 그곳에 가기 위해 나는 4월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더는 기다리기 힘들어진 5월 초, 짐을 꾸렸다. 지난 겨울의 폭설로 무너진 길이 복구되려면 아직 보름이나 있어야 했다. 차로 올라가는 길을 걸어가기로 작정하고 나선 길이었다. 훈자에서 만난 한국인 스님과 함께였다.
M을 멋대로 해석했었구나… M을 만난 건 중간 기착지로 하루를 머물러야 했던 길기트의 게스트 하우스에서였다. 1년 넘게 장기여행 중인 그와는 벌써 인도와 네팔, 파키스탄에서 몇번을 마주쳤으며 며칠씩 함께 트레킹을 하기도 했다. 사놓은 버스표까지 취소하고 그가 페어리 메도를 가겠다고 나섰을 때 나는 솔직히 반갑지 않았다. 그와는 이야기를 나눌수록 평행선을 달리는 듯한 거리감이 일었다. 그는 나를 모든 사람에게 잘하고자 하는 ‘적당한 문화인’이라 평했고, 나는 그가 선택했다는 자발적 가난이 한번도 치명적인 가난을 겪어보지 못한 이의 철없는 이상주의라고 폄하했다. 다음날 아침 페어리 메도를 향해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해 왜 타인들이 함부로 평가하는지 모르겠다며 자신의 삶을 옹호했다. 그 어떤 문화적인 것 혹은 교양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이 더 이상 자신의 삶에 자극이 되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늘 자기 모멸적인 농담과 가벼운 이야깃거리를 즐기던 그였는데, ‘제도’ 바깥에서 가난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두 시간의 버스 여행 뒤 라이콧 브리지에 내려 걷기 시작했다. 그늘 한점 없는 길을 가는 땡볕 트레킹이었다. 지프로 30분이면 올라가는 절벽길을 우리는 몇 시간 동안 걸었다. 사위가 어두워질 무렵, 페어리 메도를 30분쯤 남겨놓은 곳에서 길이 사라졌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온 터였는데 결국 우리는 돌아서야 했다. 밤이 내리자마자 기온은 급강하해 흠뻑 젖은 몸으로 추위가 달라붙고 있었다. 오르는 길에 봐둔 오두막으로 와 잠긴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그 좁고 더러운 오두막 안에는 기적처럼 장작과 난로가 있었다. 장작을 떼서 언 발을 녹이고 미리 사온 빵으로 요기를 했다. 엉성한 나뭇조각을 모아 잠자리를 만들 때 두 남자는 내게 조금이라도 편한 잠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이런 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사람의 체온이 이렇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스님과 나를 배려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내 멋대로 그를 해석하려 한 지난 시간이 미안했다. 그는 따뜻하고 섬세한 마음의 결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 밤,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이해할 것만 같았다. 새벽녘, 볼일을 보기 위해 오두막을 나섰을 때,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우리가 눈앞에 두고 돌아선 산 낭가파르바트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4명의 아내를 자랑하던 ‘물라’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왔다. 마른 빵으로 아침을 먹고 하산을 시작했다. 라이콧 브리지에 내려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동네 남자들이 다 모여들었다. M은 예의 그 성교육(그는 파키스탄을 여행하는 내내 남자들에게 피임을 위해 콘돔을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을 시작했다. 직업이 ‘물라’(사원에서 기도를 이끄는 사람)인 남자 아따울라는 아내가 4명이라며 내게 자랑했다. 파키스탄 남자와 결혼하면 어떠냐는 그의 제안에 대번에 비명을 지르며 “노! 노! 노!”라고 소리를 질렀다. 왜 싫으냐는 말에 “스카프 뒤집어쓰고 부엌에서 평생을 보내라고?” 반문하니 다들 웃는다. 보고 있던 M이 거든다. “한국에서는 여자들이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고, 남자보다 돈을 더 잘 버는 여자도 많아서 결혼 안 하는 여자들이 많아.” 물라는 지지 않았다. “파키스탄 여자도 남편과 같이 여행 다닐 수 있어.” 종교를 묻는 그의 질문에 없다고 하자 코란과 마호메트의 생애를 읽어보라고 권한다. 이미 읽고도 이슬람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잘못 읽은 거라고, 다시 읽으라고 강요하는 그. 자기가 나고 자란 좁은 마을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그의 모습이 짜증스러웠고, 편협한 그에게서 종교적 가르침을 받을 파키스탄 사람들이 염려스러웠다. 문득 M을 판단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잠시 들여다본 그의 한 면을 전부라고 믿었던 나.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M과 다시 길 위에서 만날 일은 좀처럼 없을 것 같았다. 페어리 메도 트레킹에서 페어리 메도는 보지 못했지만 나는 M의 다른 면을 보았고, 그것만으로 내게는 충분했다. 북미 인디언 샤이엔족에게는 이런 말이 전해져온다. “다른 사람의 모카신을 신고 두달 동안 걸어보지 않고서는 그를 판단하지 말라.” 세상을 다 둘러보고도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가 들여다본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새삼스러운 확인이었다.
M을 멋대로 해석했었구나… M을 만난 건 중간 기착지로 하루를 머물러야 했던 길기트의 게스트 하우스에서였다. 1년 넘게 장기여행 중인 그와는 벌써 인도와 네팔, 파키스탄에서 몇번을 마주쳤으며 며칠씩 함께 트레킹을 하기도 했다. 사놓은 버스표까지 취소하고 그가 페어리 메도를 가겠다고 나섰을 때 나는 솔직히 반갑지 않았다. 그와는 이야기를 나눌수록 평행선을 달리는 듯한 거리감이 일었다. 그는 나를 모든 사람에게 잘하고자 하는 ‘적당한 문화인’이라 평했고, 나는 그가 선택했다는 자발적 가난이 한번도 치명적인 가난을 겪어보지 못한 이의 철없는 이상주의라고 폄하했다. 다음날 아침 페어리 메도를 향해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해 왜 타인들이 함부로 평가하는지 모르겠다며 자신의 삶을 옹호했다. 그 어떤 문화적인 것 혹은 교양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이 더 이상 자신의 삶에 자극이 되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늘 자기 모멸적인 농담과 가벼운 이야깃거리를 즐기던 그였는데, ‘제도’ 바깥에서 가난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페어리 메도로 가는 버스가 주차해 있는 정류장. 버스로 두시간가량 달려가면 라이콧 브리지에 도착한다. (사진/ 김남희)

페어리 메도로 가는 절벽길. 페어리 메도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로 꼽힌다. (사진/ 김남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