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루어진다. ”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살구꽃이 눈처럼 흩날리며 지는 자리에 복사꽃과 사과꽃이 피어나고 있던 훈자의 봄. 야스민을 만난 건 훈자로 올라가는 버스에서였다. 그는 남편, 두 아들과 함께 여행하고 있었다. 남편이 내게 명함을 주며 놀러오라는 인사를 건넸다. 그의 학교를 찾아간 건 훈자에 머문 지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는 ‘카리마바드 걸스 칼리지(우리나라의 여고)’의 교장이었다. 나이 서른에 교장이 된 그는 나와 동갑이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말이 통했다. 훈자를 떠나기 전까지 그와 나는 매일 만났다. 그의 학교가 끝나는 오후 2시쯤 만나 동네를 산책한 뒤 어둠이 내려서야 헤어지는 건 우리의 일과가 되었다. 그는 남성 위주의 이슬람 사회에 분노하고 절망하고 있었다. 똑똑하고 독립적이고 강인해 보이는 그.
‘Korean Scholarship’ 만들던 날
수도에서 일하는 남편과 떨어져 두 아이를 키우며 성공적으로 교장직을 수행해온 그는 그 땅의 현실을 갑갑해했다. 그의 집에서 자고 오던 밤, 그는 내게 말했다. “파키스탄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아.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어. 거기서라면 이렇게 남의 눈을 의식하거나 남의 손가락질을 겁내지 않고, 더 용감하고 당당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여긴 날 숨 막히게 해.” 스카프를 쓰지 않으려는 일상의 사소한 부딪힘부터, 자유롭게 입고 여행하고 이야기할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야스민은 눈물겨운 싸움을 계속해왔다.
나는 그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뿐 아니라 공부하고 싶어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서, 남몰래 꿈을 품은 파키스탄의 소녀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싶었다. 야스민의 학교에 ‘Korean Scholarship’을 만들기 위해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공립학교인 그곳의 1년 등록금은 1200루피(한화 2만원). 성적 우수자 10명과 가난한 집안의 학생 10명, 이렇게 스무명의 학생에게 1년치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주고 싶었다. 1만원에서 100만원까지, 벗과 선후배들이 밥값과 술값을 아껴 뜨거운 마음을 보태준 덕에 9년간 장학금을 줄 수 있는 돈이 모였다.
야스민은 학교 행사에서 장학금 수여식을 행하자며 짧은 연설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한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사양했지만, 또 다른 교사인 파잘(야스민과 파잘, 우리는 모두 70년생 동갑으로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가 되었다)은 나를 설득했다. 그는 학부모들에게 되묻고 싶어했다. ‘이 땅의 딸들의 교육에 외국인이 애정과 관심을 쏟는데, 우리는 어떠한가?’라고. 여성의 식자율이 남성의 절반이고,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30%를 넘지 않고(이곳 산간마을인 훈자의 경우는 더 심해 15% 미만의 여성이 상급학교에 진학한다), 아직도 1년에 1천건의 명예살인(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남편이나 아버지, 남자 형제들이 아내나 딸, 여동생을 살해하는 행위)이 일어나는 이 땅의 끔찍한 현실에 대해, 파잘은 남자이지만 진정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그릇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여성의 입을 막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현실을 가슴 아파하고 부끄러워했다. 그는 말했다. 지구상의 모든 가난한 나라들은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나라들이라고.
남자들의 사회에서 꾸는 꿈
훈자를 떠나기 며칠 전 야스민의 학교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생일을 기념하는 종교 행사가 열렸다. 야스민은 이 행사의 특별 손님으로 나를 초대했다. 어린 여학생들이 무함마드의 권능과 위대함을 찬양하는 종교적 시와 노래를 읊었다. 그 행사의 끝에서 야스민은 내게 연설을 부탁했다. 그날 학교에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과 파키스탄이 식민지를 겪었다는 점에서, 가족을 중요시하고 연장자를 공경하는 점에서 닮았다는 것, 그리고 두 나라 모두 남성 위주의 사회임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나와 친구들이 모은 이 적은 돈은 한국에서 일하는 파키스탄 노동자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자, 가난했던 시절에 우리가 받았던 이웃 나라의 도움에 대한 되갚음이라고, 언젠가 다시 파키스탄을 찾을 때,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여러분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덧붙였다. 내가 좋아하는 파울로 코엘료의 말 - 한 사람이 간절한 꿈을 품으면 온 우주가 그 꿈을 이뤄주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을. 적은 돈이었지만, 우리가 모은 마음이 어린 소녀들의 가슴에 환한 꿈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그래서 몇몇 얼굴들이 나의 조국을 따뜻한 마음으로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우리는 오래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지구의 절반인 여성들이, 어머니가 되어 다음 세대를 낳고 키울 파키스탄의 여성들이, 차별과 억압을 딛고 당당하게 설 수 있기를,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일굴 수 있기를 꿈꾸어본다.

눈 쌓인 설산 아래서 환하게 웃고 있는 야스민. (사진/ 김남희)

'캬비마바드 걸스 칼리지' 의 학생들과 교사 파잘이 월요일 아침 조회를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