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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사랑하는 건 흔적을 남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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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1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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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마디]

파키스탄 - “스러지는 것들의 슬픔을 알아버린 나이”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훈자의 봄은 무참했다. 눈을 두는 골짜기마다 살구나무들이 몸살을 앓으며 꽃망울을 밀어올리고 있었다. 아침이면 살구꽃이 몸을 부풀려 눈처럼 피어 있곤 했다. 그 꽃이 피고, 지고, 다시 또 일제히 피어났다가 스러져버릴 걸 생각하니, 눈이, 마음이 젖어왔다. 어쩌다 나는 꽃 피기도 전에 스러지는 것들의 아픔을 알아버린 나이에 접어들어 한창 피는 꽃을 봐도 가슴이 저려오는 걸까? 세상 모든 피어나는 것들의 아득한 슬픔, 그 비릿한 슬픔의 내음이 훅 끼쳐오던 훈자의 봄.


일본인의 죽음을 기념하는 학교

그곳에서 머문 한달 반 동안 나는 속절없이 시간을, 봄을,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아침이면 자리를 들고 나가 살구꽃들을 보다가, 먼 산에 눈을 두다가, 책을 읽다가, 저녁 북풍이 몰려올 무렵이면 자리를 걷고 숙소로 돌아오는 단순한 생활의 반복이었다. 졸음이 슬슬 밀려와 한숨 자고 나면 그 사이 눈앞의 벌판, 색이 달랐다. “세상은 사흘 보지 못한 동안에 벚꽃이라네.” 일본의 하이쿠가 생각나던 곳. 가끔씩 동네 할아버지가 말린 살구와 살구씨를 접시에 담아나와 머물다 가기도 했다.

동네 꼬마들이 꽃 핀 살구나무 아래서 놀고 있다. (사진/ 김남희)

살구꽃 터지는 소리에 귀가 먹먹한 날들이었다. 이 마을, 저 마을,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말린 살구를 얻어먹고, 더운 차나 한끼 밥을 대접받는 생활.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해가 질 무렵이면 사원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그건 파키스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였다. 거리의 불이 켜질 무렵, 신과 대화하기 위해 사원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은 늘 경건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느린 걸음으로 동네를 산책하던 중이었다. 늘 지나치던 ‘하세가와 메모리얼 스쿨’이라는 이름이 발목을 붙잡았다. 엽서를 부치기 위해 우체국으로 가던 길이었다. 우체국 뒤에 있는 학교에 들어서니 선생님과 아이들이 친절하게 나를 맞아주고, 학교를 둘러보라고 권했다. 학교 앞 건물 벽에 동판이 있었다. 동판의 주인공, 쓰에노 하세가와는 일본인 등반가였다. 그때까지 아무도 오른 적이 없던 울타르 피크(Ultar Peak)를 오르다가 산사태를 만나 산에서 죽었다. 그리고 역시 등반가였던 그의 아내와 친구들이 뜻과 돈을 모아 이 학교를 세웠다. 그의 무덤은 아직도 울타르 베이스 캠프 밑에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일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게 나를 눈물나게 했다. 복도를 걷고, 과학실이며 컴퓨터실이며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아이들이 체육 하러 나간 빈 교실에 들어가 봤다. 교실은 작았다. 검은 칠판, 작은 책상과 의자들, 마룻바닥에는 아이들의 가방이 놓여 있고, 교실 뒷벽에는 아이들 그림이 걸려 있기도 했다. 가만히 의자 위에 앉아봤다. 책상과 의자가 얼마나 작은지 장난감 같았다. 나도 한때는 이렇게 작은 의자에 앉아 옆자리 짝과 다투기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산을 사랑해서 산에서 죽은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그 사람의 아내와 친구들이 만든 학교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꿈을 엮어가고 있었다. 세상을 떠난 사람의 흔적이 그렇게 아이들의 영혼 속에 살아 있었다. 내 마음이 따뜻하게 젖어오는, 자꾸만 이유를 알 수 없이 눈물이 나는, 따뜻한 만남이었다. 꽃이 지고 난 뒤에도 한동안 잔향은 남듯, 사람 역시 죽음 뒤에도 산 사람의 기억 속에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훈자에서 산책을 하다 보면 동네 사람들이 손을 잡아끌고 집으로 불러들이곤 한다. 그렇게 들어간 집 부엌의 풍경이다. (사진/ 김남희)

살구꽃 피는 마을, 향기를 남기고 싶다

훈자는 일본의 영화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무대가 된 곳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일본인들이 즐겨 찾았다. 가게마다, 식당마다 일본어로 된 안내문들이 있었고, 여행자들의 절반 이상이 일본인이었다. 길을 걷다 보면 동네 사람들이 한두 마디의 일본어 인사말을 건네며 “아리가토!”(고마워요)라고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일본인들이 그곳에 남긴 도움의 손길 덕분이었다. 학교와 다리와 수로, 전기와 도로 등등 훈자의 모든 기간산업에 일본인들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름다움에 비해 몹시 척박한 환경인 훈자는 물과 장작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장이었다. 그 치열한 생존의 몸짓에 일본인들은 뜨겁게 화답하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흔적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 봄에 살구꽃 망울이 부풀어 오르듯, 나도 날마다 벗들의 친절과 사랑으로 몸을 불려가고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마을의 풍경처럼 그곳 사람들과 보낸 시간 역시 꿈처럼 짧고 강렬했다. “피르 밀레게!”(또 만나요)라고 말하면 “인샬라!”(신이 허락한다면)라고 답하던 사람들. 당신과 나의 만남, 그건 어쩌면 신의 뜻일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인연을 뜨겁게 껴안고 살아가자. 신이 허락해야 다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곧 스러질 우리들의 운명, 향기는 남기고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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