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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셰자드 아저씨의 ‘빗장 푸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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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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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 마디]

파키스탄 - “어려웠던 시절은 다 지나갔다”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인도의 암리차르에서 육로로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들어섰다. 힌두 문명권에서 이슬람 문명권으로 넘어가고 나니 거리의 간판 글씨도 달라졌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변했으며, 마주치는 여행자 수도 급격히 줄었다. 무엇보다 거리에서 여성을 보기 힘들다는 것, 어쩌다 보이는 여성들마저 스카프 혹은 부르카로 얼굴을 가린 모습이 낯설었다. 인구의 절반이 담장 안으로 사라져 세상과 격리되고, 거리엔 온통 남자들뿐이라는 사실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새로운 땅에 들어설 때면 내 안에 물처럼 가득 차오르던 설렘과 흥분 대신에 알 수 없는 당혹감으로 인해 나는 곤욕스러워했다.


스카프로 얼굴을 가려야 하는 당혹감

그런 파키스탄에서 페샤와르는 유난히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도시였다. 우리 역시 스카프로 머리와 가슴, 엉덩이를 가리고 다니며 위약한 남성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셰자드 아저씨를 만난 건 페샤와르의 동네 사진관에서였다. 이란 비자를 받기 위해 스카프로 머리를 가린 사진을 찍으러 간 길이었다. 적십자의 운전기사로 일한다는 아저씨는 영어를 조금 할 수 있었다. 사진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차를 대접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포즈를 취한 셰자드 아저씨 가족. (사진/ 김남희)

다음날 저녁, 아저씨네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 (사실은, 가끔씩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뻔뻔스러워지는 내가 떼썼다. 아저씨 집에 놀러 가면 안 되냐고. 손님 접대를 최고의 의무로 여기는 파키스탄 남자가 거절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작업을 한 셈이었다. 당연히 아저씨는 몹시 기뻐하며 우리를 초대했다.) 우리는 결명자차 한 봉지와 귤을 사들고 신이 나서 숙소를 나섰다. 아저씨네 집은 밀수꾼들이 거주했다는 동네에 있었다.

놀랍게도 셰자드 아저씨는 5대째 내려오는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이슬람이 국교인 파키스탄에서 기독교도로 살아가기 어렵지 않냐고 물으니, 어려웠던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샤한(15), 샤할란(12), 막내딸 카이나트(9)를 둔 아저씨 가정은 단란해 보였다. 기독교 학교에 다니는 샤한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했지만 어른들 대화에 끼어드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가 어설픈 영어로 힘들어하는 순간에도, 아버지가 묻기 전에는 나서지 않고 바른 자세로 지켜만 보고 있었다.

파키스탄의 경제활동은 철저하게 남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폐샤와르 거리의 노점상.

가족 소개가 끝난 뒤 우리는 셰자드 아저씨의 형제들 집을 방문했다. 형제들은 모두 반경 100m 이내에 모여살고 있었다. 셰자드 아저씨가 열두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저씨가 어린 동생들을 부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형제들은 우애가 깊었다. 우린 아저씨의 남동생인 나자르 아저씨 집을 시작으로, 여동생 부부 비너스와 할리드 집, 또 다른 여동생 노미와 수헬 부부의 집 등 형제들 집을 한번씩 다 방문해야 했다. 가정 방문의 순서와 내용은 늘 같았다. 음료와 다과를 대접받고, 온 집안 식구를 소개받고, 가족 앨범을 들여다보며 적절한 궁금증과 관심을 표명하며, 예의 바른 손님 역할을 충실히 했다. 밤 9시가 넘어서야 아저씨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전날부터 뭘 대접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는 아저씨의 아내 나지마는 탄두리 치킨과 난, 달, 볶음밥으로 이루어진 파키스탄 음식을 내왔다. 고기를 안 먹는 나였지만 아저씨가 살을 발라 밥 위에 놓아주는 닭고기를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다. 식사 전에 마신 몇잔의 차와 음료, 다과로 인해 우린 이미 배가 부른 상태였기에 저녁밥을 먹는 건 거의 고문에 가까운 노동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다시 아저씨의 형제, 자매, 그들의 딸, 아들들이 거실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샤니와 샤한이 가무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스카프를 쓰지 않은, 꽃처럼 아름다운 스무살 안팎의 여자들이 사랑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내 동행자 혜준이가 답가로 <사공의 노래>를 불렀다. 밤은 그렇게 이슥해져갔다.

페샤와르의 전통적인 빵집. 화덕에서 '난'을 구워내고 있다. (사진/ 김남희)

“우리의 사랑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셰자드 아저씨의 남동생인 나자르 아저씨의 딸 라일라, 올해 스무살인 의대생. 그가 물었다. 남자친구가 있느냐고. 지금은 없지만 여럿(?) 있었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남자친구가 여럿일 수 있냐고 묻는 그들에게 되물었다. “음식도 이것저것 먹어봐야 맛있는 걸 아는 것처럼, 남자도 여럿 만나봐야 좋은 남자를 찾아낼 수 있지 않아?” 집을 나서기 전, 라일라가 우리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가족 몰래 사랑하는 남자가 있으니, 우리의 사랑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그 순간, 어린 연인들의 사랑을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셰자드 아저씨네 집을 나선 건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아저씨는 이웃의 차를 빌려 우리를 숙소까지 태워다주었다. 훈자에 올라갔다 내려오면 꼭 다시 들러달라는 당부와 함께. 사람과의 인연, 마음이 오가는 단 한번의 만남이 한 나라에 대한 인상을 결정지을 수도 있음을 셰자드 아저씨는 상기시켜주었다. 그날 밤, 낯설고 곤욕스럽기까지 했던 땅, 파키스탄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의 빗장이 스스로 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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