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마디]
네팔 - “나를 버렸잖아? 내가 왜 만나야 해? ”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그녀는 입양아였다. 여섯살 때 북유럽의 어느 나라로 입양됐다고 한다. 한국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한국에 대한 기억 역시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러나 생김새만은 한국의 처녀 그대로인 스물여덟의 유럽인이었다. 그녀를 만난 곳은 인도 보드가야의 명상센터. 보름달이 환하게 뜬 밤, 법당에서 나오다가 그녀와 마주쳤다. 열흘간 침묵수행이었던 탓에 그때까지 눈인사만 주고받던 사이였다. 그 밤, 우린 자발적으로 침묵을 해제하고 법당 앞에서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린 시절은 행복했어?”라는 내 물음에 그녀는 간단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완벽한 유럽인이 아니었구나…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불행히도 내 양부모님은 좋은 분들이 아니셨어.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그 집에 도착하고 나서 석달 만에 그 나라 말을 다 하더래. 어린 나이에도 생존에 대한 절박함이 나를 그렇게 몰아갔나봐.” 그녀가 자란 작은 마을에서는 모두들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사춘기를 별다른 방황 없이 넘겼다. 스무살, 그녀가 영국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그녀의 국적을 알게 되면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고 질문을 이어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정체성의 분열과 혼란을 겪기 시작했다. 완벽한 유럽인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생김새만으로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아시아인으로 규정되는 일을 겪으며 그녀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모국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열흘의 명상 과정이 끝난 뒤에도 우리는 센터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느 밤, 저녁을 먹고 난 뒤 그녀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있어. 편지가 왔었거든. 만나고 싶다고. 나를 고아원에 보낸 건 내가 태어난 뒤 바로 엄마가 돌아가시고, 내 위로 형제들이 셋이나 있어서 나를 키울 수가 없어서였대.” 왜 답장을 하지 않았냐는 내 말에 그녀는 거칠게 항변했다. “나를 버렸잖아? 나를 고아원에 보내고, 끝내는 남의 나라로 떠나게 만든 사람인데, 내가 왜 만나야 해? 이제 와서, 이렇게 나타나서 아버지라고 그러면, 반갑게 달려가 맞아야 되는 거야?” 늘 다소곳하고 조용조용하던 그녀가 그렇게 감정적인 반응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너희 아버지… 너를 고아원에 보낸 이후 단 한번도 편한 잠을 주무시지 못하셨을 거야. 우리 엄마만 해도 그래. 내가 일년에 두어달 집에 돌아가면 혼잣말로 중얼거리시거든. 이제 발 뻗고 잠 좀 자겠네라고. 그게 부모야. 너를 고아원에 보낼 수밖에 없던 그때, 아버지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봐. 이제 너희 아버지가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시겠니? 죽기 전에 네 얼굴 한번 보고 죽는 게 마지막 남은 소원이실 거야.” “싫어. 내 삶을 이렇게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몰고 가놓고, 이제 겨우 살아갈 만하니까 나타나서 내 삶을 흔들어놓다니! 만약에 우리가 만났는데 서로에게 부담과 상처만 되면 어떻게 해? 내가 만약 아버지를 좋아할 수 없다면? 아버지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면? 그럼 더 힘들지 않겠어?”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도 그녀를 안고 함께 울었다.
며칠 뒤 그녀와 함께 네팔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카트만두에는 내가 좋아하는 언니가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고, 나는 언니에게 양해를 구해 그녀를 데리고 그 집으로 갔다. 그녀에게 한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이고 싶었다. 일주일간 포카라에 다녀온 걸 제외하고는 우리는 내내 카트만두에 머물며 매끼 한식으로 밥을 먹었다. 그녀는 김과 고구마와 김치를 낯설어하지 않았고, 어렸을 때 먹었던 것 같다며 기억을 살려내기 시작했다. 그곳에 머물렀던 보름간, 그녀는 한국인의 ‘정’이라는 것에 감동하기도 하고, 부담스러워하기도 했다. 헤어지던 날, 그녀가 내게 말했다. “어쩌면 내년쯤 석사 끝내고 한국에 갈지도 모르겠어. 이번에 가게 되면 한국말도 배울게. 고마워. 나에게 이런 기회를 갖게 해줘서.” “그때 오면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거지?.” 그녀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그녀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결국 아버지를 만나게 될 것임을.
카트만두에서 한국의 정을 느끼다
그녀는 나에게 온 최초의 입양아 친구였다. 입양아들이 한국에 대해 갖는 마음이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다. 국민소득 1만5천달러를 자랑하며 여전히 아이를 해외로 수출하는 내 조국에 대해, 우리의 어려웠던 시절은 어느새 잊은 채 아시아인들을 핍박하고 차별하는 내 나라 사람들에 대해, ‘재미동포’와 ‘조선족’이라는 한 핏줄에 대한 이중의 호칭을 쓰는 이 나라에 대해, 자랑스러움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서는 나는, 정말 모르겠다. 자신을 버린 조국을 왜 그리워하는지, 기른 정을 두고도 왜 낳은 정을 찾아오는지, 핏줄과 조국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정말이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저 남의 땅에서, 남의 음식을 먹으며, 남의 말을 쓰며, 그렇게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준 그녀가, 성숙한 세계시민으로서의 한 존재가, 고맙고 미더울 뿐이다.
나는 완벽한 유럽인이 아니었구나…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불행히도 내 양부모님은 좋은 분들이 아니셨어.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그 집에 도착하고 나서 석달 만에 그 나라 말을 다 하더래. 어린 나이에도 생존에 대한 절박함이 나를 그렇게 몰아갔나봐.” 그녀가 자란 작은 마을에서는 모두들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사춘기를 별다른 방황 없이 넘겼다. 스무살, 그녀가 영국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그녀의 국적을 알게 되면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고 질문을 이어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정체성의 분열과 혼란을 겪기 시작했다. 완벽한 유럽인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생김새만으로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아시아인으로 규정되는 일을 겪으며 그녀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모국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입양아들에게 자신을 낳아준 존재에 대한 그리움은 근원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주고 있는 딸. (사진/ 김남희)

양지바른 곳에서 햇볕을 받고 있는 카트만두의 가족들. (사진/ 김남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