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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무슨 상관이죠? 나는 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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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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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 마디]

네팔 - “한국 사회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인도의 사르나트에서 그와 스친 뒤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J는 양팔을 가득 벌려 포옹하며 뜻밖의 만남을 기뻐했다. 그건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인사법이었다. 타멜에서 저녁을 함께 먹으며 물었다. “넌 뭘 해서 먹고사니?” “저… 음악해요.” “무슨 종류의 음악이야?” “아마 누나는 모를 거예요. 하드코어거든요. 작사, 작곡해요.” “음악해서 먹고살 수 있어? 이렇게 여행 다닐 수 있을 만큼 벌려?” (이런 질문을 주고받는 걸 끔찍해하는 나였지만 그 순간 호기심은 이성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당연히 음악만 해서는 못 살죠. 중학교 때부터 쭉 음악을 해왔고, 이게 가장 좋아하는 일이니까, 계속하고는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할 거고. 하지만 곡 팔아서, 연주해서 버는 돈은 그야말로 입에 겨우 풀칠할 수 있는 수준이고요, 이렇게 여행 나오려면 노가다 뛰어야 해요.”


눈물 나는 인사 “밥 먹었어?”

자유롭고자 하는 열망은 삶의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행의 길을 선택하게도 한다.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에 서 있는 고행 수도승. (사진/ 김남희)

“하드코어라… 그거 순 마니아들만 듣는 음악이잖아. 견딜 만해? 음악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뭐든 들어주고, 봐주고,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신이 나는 거잖아.” “저, 첫 콘서트 할 때 몇명 온 줄 알아요? 열두명. 그 중에 두명은 내 친구. 그 열명이 어디에선가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오직 내 음악을 듣기 위해 거기까지 찾아왔다는 것. 그게 얼마나 나를 감동시켰는지 알아요? 이 세상에 내 음악을 듣기 위해 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게 몇명이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아. 나 역시 내가 소통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하니까.”

서울이 고향인 그가 부산에서 혼자 산다고 했을 때, “왜 부산에서 살아?”라는 내 물음에 그는 되물었다. “누나는 왜 세계를 떠돌아요?” “그야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 “저도 그래요. 부산에 송정이라는 제가 좋아하는 바닷가가 있거든요. 그 바다를 자주 보고 싶어서 아예 그리로 옮겼어요. 근데 이번에 들어가면 이사할 거예요. 경주 안압지 알죠? 그 안압지를 가까이 두고 살 수 있는 곳으로 가려고요.” 놀라운 건 J가 그 바다를 보기 위해 부산으로 이사한 게 중학교 3학년 때였다는 사실. 그래서 J는 고등학교를 부산에서 혼자 다녔다. 한국에서 삶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 그것도 그 어린 나이부터 자기 삶을 그렇게 스스로 결정하고 살 수 있다는 것, 내게는 충격에 가까웠다. 분명 J가 스스로 결정한 삶의 부분들은 단순히 어디에 몸을 내려놓을까 하는 문제만은 아니었으리라.

열살 연상의, 푸른 눈의 여자와 8년째 사귀고 있는 J. 그녀 나이 스물일곱, J 나이 열일곱에 그녀를 만난 이후 그녀는 J의 최초이자 유일한 여자로 지금껏 남아 있다. 한국말을 배운 그녀가 어느 날 프랑스에서 전화를 걸어 “밥 먹었어?”라는 말을 해왔을 때, J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고 했다. “누나, 알죠? 밥 먹었니라는 말이 품고 있는 그 겹의 의미. 그 사람에게는 그게 그냥, 그야말로 밥 먹었냐는 확인이었을지 몰라도 우리에게 그건 단순한 인사만은 아니잖아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남자의 모국어를 배워 그 모국어로 인사를 해온 여자. 만 리 밖에서 전화선을 타고 전해진 밥 먹었니, 너 잘 살고 있니, 네 삶은 평안하니 라는 인사에 흔들렸을 그의 마음. 나 역시 길 위에 선 이후 누가 ‘너 밥은 잘 먹고 다니니?’ 하고 물어오면 그 물음에 괜히 서러워지고, 눈물 나는 그런 날이 있곤 했으니까.

내 안의 벽들을 넘을 수 있을까

J가 6개월의 여행을 나온 건 사진도 찍고, 작곡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가 바라나시로 향하는 기차에서 노트북과 MP3, 디지털 카메라가 든 가방을 소매치기 당했다. “다 잃어버리고 나니까 차라리 속이 시원하더라고요. 근데 나중에 여행 마치고 들어가는 사람들에게서 MP3도 얻고, 카메라도 얻었어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아무런 조건 없이 줄 수 있다는 것. 제게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건 나눠주면서 다녀요.” J는 떠나기 전날, 트레킹 갈 때 입으라며 내게 스키바지와 파카를 남겼다.

네팔 여인들이 집에서 키운 귤을 시장에 나와 팔고 있다. 카트만두의 아산 시장. (사진/ 김남희)

사르나트에서도, 카트만두에서도, 나는 J의 이름을 잘못 부르고 있었다. 그걸 알게 된 건 그 애와 헤어지는 날, 숙소의 방명록을 보고 나서였다. “너, 왜 그동안 내가 네 이름 잘못 부를 때마다 그냥 있었어?” “그게 뭐 중요해요? H든 J든 이름 따위야 무슨 상관이에요? 뭐라고 불리든, 난 그냥 나인 건데…,” 스물네살의 J. J는 여러 면에서 나보다 자유로웠다. 그리고 그 자유로움은 단지 젊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끙끙거리는 나에 비해 J는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J를 보며 내가 깨지 못하는 벽, 아직도 넘어서지 못한 틀을 다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쯤 나는 내 안의 벽들을 가볍게 넘어설 수 있을까? 나를 부끄럽게 만든 J. J가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기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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