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 마디]
네팔- “천상의 풍경이 지상으로 내려앉는 곳, 산사람들의 낙원”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좀솜에서 마르파로 넘어가는 길. 해가 지고 나자 보름달이 떠올랐다. 크고 둥근 달이 설산 위로 떠올라 길을 환히 비추어주었다. 강물은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길게 늘어진 우리들 그림자가 말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이효석의 소설에 나오는 장돌뱅이라도 된 듯, 헐거워진 마음으로 그득한 달빛을 따라 걷는 길이었다. 소금을 뿌린 듯 하얗게 빛나는 메밀꽃은 없었지만, 내 곁에는 1930년대 이전의 트로트만 골라서 불러주는 일찍 늙어버린 한 남자가 있었고,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 온기가 전해지는 따뜻한 여자, 아직은 세상이 만만해 호기와 열정이 넘치는 청년이 함께 걷고 있었다.”
“‘타토파니’는 네팔어로 ‘뜨거운 물’이라는 뜻. 이름처럼, 마을의 온천은 뜨거웠다. 해발고도 2천m가 넘는 곳에 자리잡은 온천이었다. 탕 속에 몸을 담그고 눈을 들면 파란 하늘 끝자락에 한두 조각 흰구름이 게으르게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가끔씩 바람이 불어와 희롱하듯 나뭇잎들을 물 위로 떨구고 지나가기도 했다. 탕 안의 커다란 바위 위에 책을 올려놓고 연암 박지원을 읽었다. 책 읽기가 지겨워지면 나무에서 갓 딴 오렌지로 즙을 낸 주스를 시켜 마시거나, 멀리 보이는 흰 산에 오래오래 눈을 두었다. 그리고 온천 물만큼이나 따뜻한 여자와 모국어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 - <산행 일기> 가운데
긴 휴가를 위한 ‘안나푸르나 라운딩’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네팔은 지상의 낙원이다. 이 땅에는 지구 위의 8천m급 봉우리 14개 중에 여덟 봉우리가 있고, 셀 수도 없는 6천∼7천m급 산들이 도열하듯 늘어서 있다. 1960년대부터 밀려든 서양의 산사나이들이 닦아놓은 트레일에는 두어 시간마다 찻집과 게스트 하우스가 있고, 해발고도 5천m에서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는 곳. 최소한의 경비로 최대한의 편리를 보장받으며, 최상의 풍경을 접할 수 있는 땅이다. 네팔에 머물렀던 6개월 동안 나는 미친 듯 산을 찾아 헤매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이 위안해주지 못하는 것을 산에게 위무받기 시작한 이후, 산은 가장 신성하고 은밀한 귀의처가 되어주었다.
네팔이 품고 있는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를 훑고 지나가보자. 우선은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가 있다. 자신의 체력적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은 사람들, 긴 휴가를 산에 할애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트레킹. 길은 끝이 없고, 험하고, 그만큼 아름답다. 다양한 풍경과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길. 5416m의 토롱 라를 넘어 묵티나트로 내려서는 8시간의 긴 육체적·정신적 한계에 대한 도전의 장이다. 최소 보름을 예상해야 하는 이 길을 뚝 잘라 절반만 하면,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다녀갔다는 ‘로열 트레일-좀솜 트레킹’을 하는 셈이 된다.
그리고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손에 잡힐 듯 뚜렷하게 다가오는 안나푸르나 연봉을 즐길 수 있는 길. 비교적 쉬운 난이도에 비해 화려한 전망을 자랑하기에 가장 사랑받는 트레일. 짧게는 5박6일, 넉넉하게 일주일이 소요된다. 군에서 갓 제대한 대한의 청년들은 이 길을 3박4일에 끝냈다고, 혹은 ‘쪼리’ 신고 반바지 입고 장비 없이 올라갔다고 전설처럼 자랑하기도 한다. 겁 없는 청년들이여, 부디 명심하기를. 산은, 특히나 4천m가 넘는 고산 트레킹은 경보 경기장이 아니라는 것을, 순간에 표정을 바꾸어 표독한 얼굴을 들이대기도 하는 것이 산임을 잊지 말자.
세 번째는 랑탕과 고사인쿤드를 함께 묶은 트레킹. 아, 단언하건대 4월에 이 트레킹을 할 수 있는 이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다. 네팔의 국화인 랄리구라스가 지천으로 피어나 꽃터널을 이루는 4월. 가도 가도 끝없는 꽃길을 혼자 걷다 보면 두고 온 얼굴 하나가 걷잡을 수 없이 다가와 문득 서러워지기도 하는 길. 붉은 등을 내건 초록 나무들의 사열 속에 천계에 와 있다는 착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네 번째는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트레킹. 에베레스트. 지칠 줄 모르고 이어져온 인류의 도전과 성공, 참혹하고 아름다운 실패를 담고 있는 산. 인간을 전진케 하는 ‘격렬한 희망’에 대해, 그 희망 끝에 도사리고 앉은 절망의 무게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길.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을 만나기 위해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한겨울 폭설에 시달리며 이 길을 걷다 보면 복장과 위생 상태를 극한의 상황까지 밀고 가는 실험을 하게 된다. 어려운 만큼 감동 폭은 깊고, 자연의 야생성과 광활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길이다.
격렬한 희망, 에베레스트 트레킹
그 밖에도 최소의 시간으로 최대의 것을 보려는 욕심 많은 이들을 위해 카트만두 주변의 나갈곳, 포카라의 사랑곳, 혹은 푼힐 트레킹이 있다. 우뚝 솟은 히말라야의 연봉을 멀리서나마 감상하고 그럴듯한 증명사진도 찍을 수 있어서 ‘중턱 산악회’ 회원들에게 사랑받는 코스. 8천m 봉우리 14개의 정상을 밟지는 못해도, 14좌의 베이스 캠프까지만 다녀오는 트레킹도 범인들에게는 충분한 도전이자 의미 있는 ‘원정’이 된다. 일생에 꼭 한번 네팔의 산길을 걸을 수 있다면, ‘한생 잘 살았다 간다’고 말할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주장해본다.
긴 휴가를 위한 ‘안나푸르나 라운딩’

5월, 안나푸르나 라운딩 중에 내린 폭설이 바위산과 절을 하얗게 뒤덮고 있다.

보름달이 설산을 비추고 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트레킹 중 바라본 설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