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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카트만두의 동물원에서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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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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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 마디]

네팔 - “우린 잠시 스친 모습을 한 사람의 영원으로 간직하는 걸까”

▣ 김남희 /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동물원에 가자고 한 건 K였다. “난 동물원 정말 싫어해. 밖에서 기다릴 테니 들어갔다 와.”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들어가요. 금방 둘러볼게요.” 결국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동물원에 들어섰다. 비좁은 우리에 야생성을 잃은 동물들이 갇혀 있었다. “동물원은 인간이 만든 가장 잔인한 곳 중의 하나야. 여긴 서울대공원도 아니니 네가 동물원을 둘러볼 동안 가 있을 미술관도 없네.” 구시렁거리는 나를 달래며 K는 보고 싶었던 동물들을 하나씩 찾아갔다. 코뿔소 앞에서였다. 끝내 눈물이 터진 건. K를 불편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초점을 잃은 코뿔소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길들여진 것들을 대할 때의 불편함

짧은 만남 뒤의 긴 그리움. 서양인 여행자들이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를 잠깐이라도 대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길들여진 것을 보는 것. 그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길들여진 것들을 대하는 건 언제나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갇혀 있는 동물들, 자유롭게 비상하지 못하는 새들- 비록 그 자유의 비상에는 죽음의 공포가 따른다 해도, 체제와 사회에 길들여져 순해진 사람들을 보는 것. 자기 앞에 놓인 생에 대해 한번도 의문을 품지 않은 사람의 얼굴을 대하는 것. 그건 늘 나를 불안하고 불편하게 한다. 아직은 내가 자유의 깃발에 목숨을 걸기 때문일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다. “네가 나를 길들여줘”라고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그 길들인 것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래서 어린 왕자도 여우와 헤어진 뒤 조금 울지 않았던가. 이 끝없는 만남과 헤어짐의 길 위에서 나는 나를 울게 만들 위험이 있는 모든 길들여진 관계가 두렵고 무섭다. 정말이지 나는 동물원이 싫다. 다시는 동물원에 가지 않을 것이다. _2005년 어느 날의 일기에서, 카트만두

K를 만난 건 포카라에서였다. 히말라야의 흰 산이 그림처럼 호수 위로 내려앉는 곳. 그곳에서 사흘을 K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카트만두에서 다시 K를 만났을 때, K는 내게 물었다. “누나, 노트북에 담긴 노래, 자우림 말고 즐거운 노래 또 있어요?” 가만히 꼽아보니 <매직 카펫 라이드>와 를 빼면, 신나는 노래는 없는 것 같았다.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냥… 즐거운 노래도 많이 들으면서… 기쁘게 살라고요. 슬픈 노래만 들으면 더 슬퍼지잖아요.” “왜? 내가 슬퍼 보여? 난 내가 슬프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는데…. 물론 가끔씩 슬퍼지거나 쓸쓸해질 때는 있지만, 그건 그야말로 가끔씩인데.”

대화는 끊길 듯 말 듯 느리게 이어졌다. “그냥… 누나한테… 동질감을 느꼈어요.” K는 그게 어떤 종류의 동질감이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잘 말해지지도 않아요. 또 말은 오해의 소지도 많고….” 나도 더는 묻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음을 알기에. 말하려 하면 할수록 말의 감옥에 갇히고, 언어로 소통하려 하면 할수록 더한 단절을 느껴야 했던 순간은 나 역시 많았으니까.

K와 함께 음악을 듣던 카트만두의 두르바르 광장.

그 짧았던 며칠의 시간 동안 K가 들여다본 내 모습이 내 안의 수많은 나 중에 어떤 나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K는 그 수많은 나의 지극한 일부만을 보고, 나라는 사람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체 게바라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그랬다. 그가 본 것들. 동전의 앞면이 열번 나올 동안 한번밖에 나오지 않은 뒷면만을 본 것일 수도 있다고. 나는 어떤 사람에게는 슬픔의 정조를 가진 나로 비칠 수도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깃발처럼 가볍게 나부끼는 바람으로 다가갔을 수도 있고, 그 아닌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늘 없는 환한 햇살 한 자락이었을 수도 있겠지.

누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 누군가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 그건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어쩌면 우리는 여름날 오후의 한 자락 짧은 꿈처럼 그렇게 잠시 스친 모습을 한 사람의 영원으로 간직하는 건 아닐까. 짧았던 여행을 접고 제자리로 돌아간 K. 그가 내게 남겨놓은 것들. 까만 장정의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그리고 CD 한장 - 그 CD를 내게 주며 K는 당부했다. “12번 이후는 슬픈 노래니까 듣지 말아요”라고- 과 벽난로 앞에서 불러준 몇곡의 노래.

체 게바라와 CD 한장 남기고…

K가 떠난 뒤, 나는 조금씩 밝은 노래를 듣기 시작했고, 다시 체 게바라를 읽었다. 그리고 짧은 만남 뒤에 남겨지는 긴 그리움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있었다. 내가 K에게 남긴 것들은 무엇일까. 봄이 가고, 꽃이 지고, 비가 내리고, 여름이 끝날 무렵이면 어쩌면 서울의 거리에서 다시 K를 만날지도 모르겠다. 네팔에서 보낸 시간처럼 그렇게 따뜻하게 웃을 수 있는 여백이, K에게도, 나에게도 그때까지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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