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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줄레! 묻어버리고 싶었던 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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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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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 마디]

인도 라다크 - “세월이 남기는 것들, 거두어가는 것들”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그곳에서 시간은 서늘한 기쁨으로 차올라서 달콤한 외로움으로 지고는 했다. 달이 뜨고, 별들이 쏟아져나오는 밤은 늘, 아름다웠다. 뺨을 스치는 바람은 맑고도 서늘했고,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외출하는 어린 연인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발걸음으로 어두운 거리는 조금씩 소곤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면 문득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한때 내게도 함께 늙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고, ‘당신과 오래도록 살고 싶어지는 부신 봄날’이라고 맺은 편지를 쓰던 날들이 있었는데…. 한여름밤의 꿈처럼 짧게 지나가버린 시간들. 묻고 싶었다. 당신들에게도 햇볕 아래서 왈칵 눈물 쏟아지게 하는 아픈 이름이 있는지, 있다면, 만약 남몰래 품은 이름 하나 있다면, 이런 밤 당신들은 어떻게 견디는지, 묻고 싶었던 날들. 환한 달빛 아래 혼자 서 있는, 서럽지는 않았던 밤이, 그곳에서는 느리게 느리게 지나갔다.


<오래된 미래>의 고향

사막과 같은 황량함 속에 인간이 만든 초록의 물결. 샨티 스투파에서 내려다보는 라다크 풍경. (사진/ EPA)

이 세상에는 그런 곳이 있다. 순간의 마주침을 영원 속의 기억으로 남겨놓는 곳. 햇볕에 탄 따끔거리는 피부가 뜨거웠던 여름을 떠올리게 하듯, 청춘의 열정이 사라진 뒤에도 상흔은 오래 남아 버석거리듯, 지나가버린 것들, 잊혀졌다고 믿었던 것들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살려내는 곳이 있다.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눈에, 마음에, 몸에 박혀 새삼스레 두리번거리게 되는 곳. 몸이 떠난 뒤에도 마음 한 자락은 두고 온 것만 같아,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곳.

그곳으로 가는 길은 일년에 여름 한철, 석달만 열린다. 아주 아주 높은 도로(타글랑 라, 5328m)를 통과하는 멀고 험한 길. 그곳에 발을 디디면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파란 하늘이 우선 그대를 맞는다. “줄레!”(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면 환한 미소를 되돌리며 손을 흔드는 친절한 사람들. 티베트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티베트어의 방언을 쓰며, 척박한 환경에도 불평 없이 강인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땅이다. 해발고도 3505m의 하늘 아래 첫 동네. 여름에는 세상 곳곳에서 밀려온 관광객으로 북적거리고, 겨울이면 텅 비어버리는 곳. 한여름에도 일사병과 동상을 동시에 걸릴 수 있는 유일한 땅. 그곳의 이름은, 라다크(Ladakh)라고 한다.

스웨덴 출신의 언어학자 헬레나 호지의 책, <오래된 미래>로 전세계에 알려진 곳. 그녀는 라다크가 외부세계에 문을 연 1975년부터 16년간 이곳에 거주하며 깊은 애정과 통찰력으로 라다크의 변화와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 뒤 긴 세월이 흘렀다. 여전히 자신의 문화와 공동체를 지켜가기 위한 라다키들의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비닐봉투라고는 한장도 볼 수 없는 그곳에선 왠지 차를 타기보다는 걸어야 할 것 같고, 버리기보다는 다시 써야 할 것 같고, 새것을 구입하기보다는 가진 것을 더 충실히 사용해야 할 것만 같았다. 말을 하기보다는 들어야 할 것 같고,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스스로 답을 구해야 할 것 같아, 자꾸 머뭇거리게 되는 곳이었다.

전통의상을 입은 라다크 여인. (사진/ EPA)

내가 품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라다크에서 내가 본 게 희망만은 아니었다. 그해는 12년마다 돌아오는 헤미스 곰파의 축제가 열리는 해였다. 가면을 쓴 승려들이 엇비슷한 동작을 되풀이하며 느린 춤을 추는 종교의식. 정작 축제보다 내 눈을 끌었던 건 작은 절마당과 건물 옥상과 주변 바위산 언덕까지 가득 메운 사람의 물결이었다. 축제의 주인공은 더 이상 라다키들이 아니었다. 그들만의 평화롭고 신성한 종교적 제의였을 축제는 이제 이름을 얻은 대신, 소란스러워졌다. 돈을 내고 자리를 예약한 외국인들은 옥상과 2층에서 편안히 ‘이국적인’ 축제를 즐기는 데 비해, 라다키들은 자리를 잡기 위해 주변에 텐트를 치고 밤을 새워야 했다. 원숭이 가면을 쓰고 승복을 입은 스님들은 외국인들에게 집요하게 기부를 요구하고 있었다. 20루피짜리 지폐를 거부하고, 100루피 지폐만을 받아들던 스님의 손. 눈이 아파왔다.

그렇게 라다크는 내게 세월과 그 세월이 남기는 것들, 또 거두어 가버리는 것들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만들었다. 시간과 함께 현명해지기도 하는 대신, 그만큼 어리석어지기도 하는 게 사람이라는 것을, 살아가는 일은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의 경계를 나누는 고된 과정임을, 일깨우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라다크를 찾게 되는 날, 그때 그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을 것들은 무엇일까. 그 세월에서 비껴서지 못한 내가 버리지 못하고 품고 있을 것들은 또 무엇일까. 라다크를 떠날 때, 답을 얻지 못한 물음들이 자꾸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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