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 마디]
“인생은 옛날의 폐허 속에서 새로운 폐허로 나아가는 것”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수치를 당하느니 죽음을 선택하는 라지푸트(Rajput)족의 기백과 신화를 기반으로 건설된 도시’. 사막의 모래바람에도 여전히 굳건히 서 있는 성과 신비한 이름의 궁전들, 유랑하는 악사와 춤꾼, 점치는 이로 이루어진 집시들의 고향. 선황색 터번을 두르고 수염을 기른 전사의 후예들이 물동이를 이고 모래언덕 뒤로 사라지는 사막의 여인들과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땅. 그렇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곳은 인도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신비한 곳, 왕들의 땅으로 불리는 라자스탄이다. 전사 집단 라지푸트족은 1천년의 세월 동안 중세 유럽의 기사도와 비슷한 명예 규정에 따라 이 지역을 통치했다. 승리의 희망이 없을 때는 집단 자살을 행할 정도로 자부심과 명예심을 최고 가치로 삼았던 라지푸트족은 결국 무굴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그때 수많은 여성과 어린이는 화장용 장작더미 위로 자신의 몸을 날렸고, 남자들은 말을 타고 적과 죽음을 향해 긴 옷자락을 날리며 달려갔다고 한다.
신비한 궁전들을 품고 있는 도시
전설처럼 오래된 이야기들이 아직도 들려오는 그 땅으로 가는 길은 자이푸르(Jaipur)에서 시작된다. 1876년 마하라자(라자스탄 지역의 군주를 칭함) 람 싱이 영국 황태자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분홍색으로 시가지를 칠한 이후 이 도시는 여전히 ‘핑크 시티’로 남아 있다. 궁전 여인들이 바깥을 내다보기 위해 지은 ‘바람의 궁전’, 마하라자의 후손이 살고 있다는 ‘달의 궁전’, 그리고 ‘환영의 궁전’과 ‘물의 궁전’ 등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신비한 이름의 궁전들을 돌아보노라면 도대체 이 땅이 얼마나 많은 궁전을 숨기고 있는 건지 문득 궁금해진다.
파란색 지붕의 집들로 인해 ‘블루 시티’라 불리는 조드푸르(Jodhpur). 험한 바위투성이 언덕에 우뚝 속은 메헤란가르(Meherangarh)성에 오르면 죽은 남편을 따라 집단 자살(사티)을 감행한 아내들의 손바닥 인장이 남아 있다. 1843년 마하라자의 화장용 장작더미 위로 몸을 던진 궁중 여인들의 손바닥 위에 아직도 누군가는 존경의 표시로 손을 대며 지나간다.
반짝이는 피촐라(Pichola) 호수 위에 지어진 하얀 궁전들이 눈부신 도시 우다이푸르(Udaipur). 달빛 가득한 하벨리의 정원에서 라자스탄의 민속춤을 즐기고, 다음날이면 언덕 위의 몬순 팔래스로 해지는 모습을 보러 간다. 폐허가 된 옛 궁전과 기우는 햇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산. 언제나 마음을 뒤흔드는 건 폐허, 그리고 폐허가 남기는 상상과 여백이다. 인생은 옛날의 폐허 속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폐허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위치우위가 말했다. 나라는 존재가 지상에서 사라지고 난 뒤 남을 폐허, 그 적막한 사막을 상상하며 돌아오는 길, 마음의 결은 미세하게 떨려온다. 그런 날이면 숙소의 옥상에라도 올라 미풍에 몸을 맡기고, 만월의 살찐 달에 눈을 두고, 아득히 들려오는 음악 속으로 귀를 연 채 늙은 도시를 바라보며 오래 오래 앉아 있자.
넉넉한 등이 하나 있어도 좋겠다
마지막 종착지는 사막에 솟아 오른 벌꿀색 도시 자이살메르(Jaisalmer). 이곳으로 오는 동안 풍경은 조금씩 나무와 숲, 사람의 마을이 사라지면서 황량하고 건조한 사막의 그것으로 변해간다. 자이살메르의 구시가지는 동화의 세계에서나 나올 것 같은 풍경이다. 미로처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의 모퉁이마다 오래되었거나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숨어 있고, 수백년의 세월을 견뎌온 돌들이 반짝이며 박혀 있는 좁은 도로에는 소들이 좌선 수행 중이고,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뛰어놀다가 “헬로우, 원 루피!”를 외치며 손을 내민다. 이곳은 박제처럼 남아 있는 죽은 도시, 역사의 유적지로 변해 사라져간 성이 아니라 여전히 사람들이 숨쉬고 먹고 마시며 사랑하고 미워하며 살아가는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어쩌면 인도에서 가장 매력적인 성이 아닐까. 이 작은 성벽 도시가 뿜어내는 매력에 사로잡히면 여행자는 오랫동안 짐을 꾸리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사막의 도시를 돌고 나면 마침내 낙타를 타고 모래사막 속으로 떠나는 일이 남는다. 두 발로 걸어 세상과 대면하는 방식을 선호해온 내게 무엇인가의 등에 올라타 세상을 건너가는 일은 여전한 부담스러움이다. 내 몸을 의탁해야 하는 그 무언가가 말이든, 자동차든, 자전거든 간에. 그러나 사막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낙타 등에 몸을 실어야만 한다. 때로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도 있는 법이니까. 생의 사막을 건너갈 때에도 내 곁에 손 잡아줄, 지친 얼굴을 묻고 잠시 울 수 있는 넉넉한 등이 하나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사막처럼 메마른 삶에 내리는 단비, 그건 어쩌면 사람의 얼굴인지도 모르겠다.

인도 라자스탄은 '왕들의 땅' 이라 불린다. 피촐라 호수 위에 떠 있는 궁전들.

남편을 따라 집단 자살을 감행한 마하라자 아내들의 손바닥 인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