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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숨어서 숨쉴 곳이 필요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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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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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길위에서 주운 한 마디]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인 이방인이 된다는 것”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때로 삶이 건네는 사소한 신호에 발목을 겹질릴 때가 있다. 길 위에 서 있을 때조차, 지금껏 견뎌오던 것들, 아무렇지 않게 감수하던 것들이 갑자기 참을 수 없어져, 다시 짐을 꾸리게 되는 것이다. 말하기 위해 침묵할 시간이 필요하듯,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해 혼자일 필요가 있듯, 사람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의 심연을 먼저 봐야 할 때가 있다. 때로는 세상 속에서, 세상과 격리된 채, 세상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마운트 아부에서 만난 자이아교 사원

그렇게 퍼내기 위해 고이는 시간이 요구될 때, 마운트 아부(Mt. Abu. 1200m)로 간다. 델리에서 특급 열차로 12시간을 달려가면 그레이트 타르 사막에 우뚝 솟은 아부산이다. 라자스탄주의 여름 휴양지이자, 인도인들의 신혼여행지로 인기 있는 곳. 이곳에는 길 잃은 여행자가 찾던 모든 것이 다 있다. 서늘한 바람의 손길에 몸을 떠는 나무들, 혼자서 고즈넉하게 걸을 수 있는 오솔길, 파란 하늘을 이고 선 키 큰 야자나무와 하루 종일 빛나는 따뜻한 햇살. 밤이 오면 호수 위로 내려앉는 뭇별들도 환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벗어나고 싶어져버린, ‘인도적인 것들’이 여기에는 없다. 끈끈이주걱처럼 질긴 호객꾼이 없고, 매연을 내뿜으며 질주하는 오토 릭샤가 없고, 경쟁적으로 경적을 울려대는 버스도 없다. 자비심을 시험하던 걸인들도, 미처 알아보지 못한 성자들도, 어설픈 사기꾼도 사라졌다. 고요함만으로 치자면 오르차보다도, 매클레오드 간즈보다도, 라다크보다도 앞서는 곳. 이 작은 마을에서 할 일이라고는 그저 걷고, 쉬고, 책을 읽고, 다시 걷는 것뿐이다.

사위는 고요하고 세상은 정지해 있다. 신이 손톱으로 호수를 팠다는 전설에서 이름을 딴 '손톱호수'

그렇게 게으르고 고요하게 늘어져 보낸 날들 끝에 약간의 자극이 필요해질 무렵이면, 느린 발걸음을 옮겨 자이나교 사원으로 간다.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Mahavira)는 돌과 먼지를 포함한 모든 사물이 영혼을 지닌 살아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평생을 나체로 떠돈 그는 단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엄격하게 아힘사(Ahimsa·비폭력)를 실천했다. 벌레라도 밟을까봐 비 온 뒤에는 절대로 밭을 거닐지 않고, 살상을 피할 수 없는 쟁기도 사용하지 않는 자이나교 신도들은 대부분 농사와는 상관없는 고리대금업이나 상업 등에 종사했다. 결과적으로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공동체가 된 게 바로 자이나교다. 지금도 독실한 자이나교 신자들은 보이지 않는 영혼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깃털솔로 앉을 자리를 털어내고,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리고 외출한다.

마운트 아부의 딜와라(Dilwara) 사원은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이나교 사원으로 꼽힌다. 11세기에 건축된 위말 와사히(Vimal Vasahi) 사원과 그보다 200년 뒤에 세워진 테이팔(Teipal) 사원은 모두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2500명의 인력이 15년 동안 만들었다는 대리석 조각의 정교함과 완벽한 대칭성은 말을 잃게 한다. 이토록 정교하고 섬세한 세공을 만들어낸 장인들의 솜씨는 다 같은 듯하면서도 조금씩 달랐다. 장인이 일을 하면서 만들어낸 티끌의 양에 따라 임금을 지급해 더욱 정교하게 조각하도록 북돋웠다더니, 벽마다 조금씩 ‘신의 손’과 ‘무딘 손’이 드러난다.

말없이 걷는 것은 최고의 호사

천장의 연꽃잎들은 얼마나 얇고 투명한지 손으로 건드리면 ‘똑’ 소리를 내며 부러질 것만 같다. 햇살에도 바스라질 것 같은 연꽃잎을 세며 사원의 귀퉁이에 조용히 앉아 있노라면, 시스티나 천장화를 그리는 동안 심각한 목디스크를 앓았다는 미켈란젤로의 경험이 내 것이 된다. 아름다운 것들이 주는 아릿한 슬픔, 그 통증에 젖어 돌아나오는 길, 사위는 여전히 고요하고 길 위에는 내 그림자뿐이다.

조용히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한 자이나교 신자. 보이지 않는 영혼을 다치지 않기 위해 깃털 솔로 앉을 자리를 털어낸다.

사원을 둘러보고 나와 다시 호수 주변의 산책로를 걷는다. 높지 않은 산에 둘러싸인 호수(Nakki Lake)- 신이 손톱으로 호수를 팠다는 전설에서 ‘손톱 호수’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주변에는 호젓한 산길이 제법 많다. 그 산길을 아침 저녁으로 걷다가 문득 호수로 눈을 주면 젊은 연인들이 뱃놀이를 즐기고 있다.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찾아왔을 젊은 연인들을 바라보며, 한때 내게도 눈앞에서 세상이 일순 정지하던 순간이 머물렀음을 돌아보는 일.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인 이방인이 된다는 것, 자신의 비밀을 간직한 채 지나는 사람들의 비밀을 상상하며 말없이 걷는 것은 최고의 호사 중 하나’라던 레베카 솔닛의 마음이 전해진다.

인도를 사랑한 이유이기도 했던 그 모든 무질서와 혼잡과 번잡함이 부담스러워질 때, 숨어서 숨쉴 곳이 필요해질 때, 마운트 아부는 완벽한 성이 되어줄 것이다. 단, 그대의 운이 아직 다하지 않아 10억 인도인들의 결혼 시즌(4~9월)을 피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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