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위에서 주운 한 마디]
“여기 주인 너무너무 좋아요”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델리에서 남쪽으로 6시간을 내려가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비포장도로를 6시간 더 달려가면 카주라호가 나온다. 에로틱한 조각이 가득한 신전으로 유명한 곳. 사진과 엽서를 통해 자주 본 조각임에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느낌은 경이로웠다. 황폐한 동쪽 사원군과 공원처럼 깔끔하게 복원, 정리된 서쪽 사원군을 돌아보는 동안 궁금증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야한’ 조각들을 사원 벽에 새겼을까? 이 사원이 지어진 10세기경에는 이런 성애들이 일상에서 가능했던 걸까? 정말 인도인들은 신에게 이르는 이런 길도 있다고 믿었던 걸까? 답 없는 물음을 품어가며 사원을 돌아보고 나면 이 작은 마을에서 더 이상 할 일은 없다. 그때는 이 마을 구석구석을 걸어서 탐험하는 일만 남는다.
같은 사람에 대한 엇갈린 평가들
돌아보니, 이 작은 마을에는 놀랍게도 인도인이 운영하는 한국식당이 세개나 있었다. 지나가던 한국인 여행자들이 요리를 가르치고, 가게 이름을 지어주고, 간판과 메뉴판까지 만들어줘 운영되는 작은 가게들이다. 그 식당의 이름은 제각각 ‘전라도 밥집’과 ‘총각 식당’과 ‘아씨 식당’. 그 중에 ‘전라도 밥집’이 내 주의를 끌었다. 숙소의 바로 옆 건물이라는 지리적 이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얼마 전에 읽은 고종석의 책 <서얼단상>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육류요리를 제외하고는 그 집에서 가장 비싼(40루피. 우리돈 1천원) 요리인 ‘백반’을 주문하니 감자조림과 총각김치, 계란국과 계란말이가 나왔다. 여기가 인도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조미료를 비롯한 모든 재료가 철저히 인도산이라는 것도 넣고, 마지막으로 가격까지 생각한다면, 음식은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후식으로 바나나 라시를 시켜놓고 이 집의 주인이자 주방장이자 유일한 종업원이기도 한 짜투에게 가게 이름의 의미를 아느냐 물었다. 그는 “한국에서 음식이 가장 맛있는 지역이 바로 전라도”라고 답했다. 한국에서 가장 맛있는 전라도 음식이 인도의 변방에서 고생을 좀 하고 있는 것 같긴 했다.
카주라호에 머물렀던 일주일 동안 세번쯤 전라도 밥집을 찾았다. 그때마다 짜투가 자랑스레 내민 방명록- 당연히 한국인 여행자들이 남긴 글이다- 을 조금씩 읽었다. 여행자들이 숙소나 식당에 남겨놓은 글을 읽다 보면 그들의 단순함과 소박한 믿음에 가끔 웃음이 나고는 한다. “여기 주인 너무너무 좋아요” 혹은 그 반대의 이야기들. 같은 장소, 같은 사람에 대한 엇갈린 평가들. 사기꾼에서 천사로, 다시 성자에서 사악한 놈으로 추락과 상승을 반복하는 현지인들. 어쩌면 그리 쉽게 누군가를 판단할 수 있을까? 아니, 세상 모든 일은 어차피 주관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으니 그건 남겨두고, 그 판단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의 기준은 뭘까? 내게 잘해주는 사람이 결국 좋은 사람인 걸까? 세상이 그렇듯 단순하게 내 편과 네 편으로 구분될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완벽한 악인과 완벽한 선인으로 나뉜다면, 얼마나 살기 편할까? 동시에 얼마나 지루한 세상이 될 것인가? 그러고 보니 나도 20대에는 세상의 정면만을 바라봤다.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그 이면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세상에 대한 저토록 명확하고 단순한 시선은 어쩌면 20대의 무기이자 상처로 남겨두어야 할 몫인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어쨌든 짜투를 대할 때마다 나는 그가 선하고 순박한 인간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방명록에서 한국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착하고 친절하고 순박한 짜투’가 아니라 내게는 그저 돈을 벌어 성공하고픈 욕망에 가득한, 좀 조급하기까지 한 젊은이로 다가왔을 뿐이다. 식당을 찾을 때마다 짜투는 방명록에 남겨진 글들을 해석해달라거나, 벽에 한글로 몇 가지 글을 써달라거나, 새로운 한국 요리를 가르쳐달라는 식의 요구를 했다. 그 바지런함이 결코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음을 알지만, 그래도 좀 씁쓸하기는 했다.
카주라호를 떠나던 날. 식대를 지불하기 위해 짜투를 찾다가 부엌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인도에서 절대로 궁금해하지 말아야 할 곳이 부엌임은 본능에 가까운 금기였는데, 우연히, 그야말로 우연히, 부엌에 들어선 셈이었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그 어두운 부엌의 풍경을 들여다보는 순간, 나는 그동안 먹은 음식 전부를 게워낼 것만 같은 욕지기를 느꼈다. 역시 세상에는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요한 일들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달은 순간이었다. 우리가 한 나라 혹은 한 사람과 맺는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에 대한 조급한 판단과 섣부른 기대는 늘 서로에게 상처와 실망을 남기는 법이다. 때로는 판단의 칼날을 버리고, 기대와 환상 역시 저 멀리 치워놓고,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저 심상한 마음으로 내게 다가오는 것들을 바라볼 필요도 있다. 기대가 없는 곳, 환상이 자라지 않는 자리에 뜻밖의 발견과 자잘한 기쁨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사람에 대한 기대와 집착에서 벗어나 적당한 거리를 두는 여유가 필요하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조금 떨어져 앉을 수 있도록 고안된 카주라호 서쪽 사원군의 의자.

다양한 성애 장면이 조각된 카주라호의 신전 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