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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모르의 투쟁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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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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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길위에서 주운 한 마디]

“한국 사회에서 다르게 산다는 것”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모르’를 만난 건 우기가 시작된 다르질링에서였다. 설사와 감기로 담요를 세개씩 덮고 잠들던 날이어서 마음까지 추웠다. 같은 숙소에 머문 인연으로 사흘을 함께 보낸 모르. 그를 만난 뒤, 찬비 내리던 다르질링은 더운 숨결로 내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모르는 나보다 아홉살이 어렸다. 그가 궁금해지기 시작한 건 내 방의 풀벌레를 밖으로 내보내달라고 부탁했을 때였다. 모르는 그 커다란 벌레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을 걸고 있었다. “놀라지 마. 나는 너를 해치려는 게 아니야. 내 손 위로 올라올래? 공포는 잠깐이란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벌레를 안아- 그건 집었다기보다는 안았다는 표현이 정확한 동작이었다- 창밖으로 내보냈다. 모르는 세상 모든 생명체들의 삶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아이였다.


정말 미칠뻔 했던 군대시절

영민한 모범생이었던 그가 공부와 담을 쌓기 시작한 건 중학교 2학년, 삶의 무상함을 느껴 동양철학에 심취하면서였다. (혹은 동양철학에 심취하면서 삶의 무상함을 느끼기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건 나보다 한참 조숙했다는 거다.) 스스로 선택해서 간 상고 시절, 주변 친구들이 박탈감을 폭력으로 풀어내고 있을 때, 그는 간섭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자유를 즐기며, 도서상품권을 타기 위해 부지런히 독후감을 써내며 학교를 마쳤다. 라즈니시의 명상센터에 다니며 명상에 심취하기 시작한 것도 그 시절이었다.

거리에서 사색하는 노인.

삶의 첫 위기는 군대로 찾아왔다. 철저한 채식주의자인 그가 육식을 해야 했던 것도 힘들었지만 위기는 다른 방식으로 그를 강타했다. 경계 근무 중 장시간의 명상으로 인해 혼절한 뒤 깨어나니 정신병동이었다. 이미 라즈니시와 명상에 심취했다는 이유로 과분한 관심을 받고 있었는데다, 틈틈이 써온 추상적인 시들이 그의 정신상태를 의심하는 척도로 작용했다. 그는 몸의 상태가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내보내줄 것을 요구했으나, 환자로 취급되어 강제로 약을 투여당하는 격리 생활이 시작됐다. 약으로 인한 부작용- 무기력해지고, 눕고만 싶고, 온몸이 떨려온다- 은 무섭도록 심각했다.

가장 끔찍하고도 행복한 시간은 화장실에 갈 때였다. 자해 방지를 위해 둘씩 가야만 했던 화장실은 쇠창살이 박힌 좁고 더러운 공간이었다. 약에 취해 똑바로 앉지 못하는 이들로 인해 변기에는 오물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그 변기 위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단지 누울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해하던 시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과 고독에 취한 그에게 무생물이 말을 걸어오는 환각이 시작됐다. 화장실 타일이 따뜻한 미소를 건네는 식이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미쳐서 정신병동에서 삶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그때부터 군의관에게 복종하기 시작했다. 미쳤음을 인정하고, 묻는 질문에는 큰 목소리로 대답하고, 시키는 대로 반성문을 써내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면 명상을 통해 깨어 있으려고 노력했다. 마침내 “정상” 판정을 받고 한달 뒤 부대로 돌아왔지만 내무반에서의 생활은 더 혹독했다. 결국 의무대에서 석달을 지낸 뒤 불명예제대로 군생활을 마감했다. 모르는 제대 뒤 반년을 충격 속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그가 처음 한 일은 인도 여행이었다. 9개월간 명상센터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명상은 마음을 다스려 심신을 치료한다. 인도의 명상센터의 수련 모습.

모르의 대학은 국립도서관

모르에게 대학은 서초동 국립도서관이었다. 전태일과 김용옥, 비트켄슈타인과 화이트 애드, 콜린 윌슨과 카잔차키스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을 흔든 이들을 만난 곳도 도서관이었다. 혼자서 좌충우돌하며 이 책 저 책 닥치는 대로 파고들던 시절, 책 읽기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오죽했으면 어려운 책을 읽던 중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네’라고 중얼거리다가 그의 아이디를 ‘모르’로 지었을까. 결국 동양철학에서 인문과학, 사회과학으로 이동하며 세상을 인식했다. 처음에 그는 개인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었으나, 자신의 무관심이 결국 부당한 일들에 대한 책임이 됨을 깨닫고 사회적 참여를 시작했다. 피자 배달을 하며 양심수 석방운동을 하고- 피자 한판을 배달할 때마다 양심수 석방 스티커도 끼워서 줬다-, 홍대 앞 클럽에서 일하며 각종 시사 문제에 관한 퍼포먼스를 했다.

모르는 가끔 자신을 칭찬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오는 동안 어려움을 잘 극복했고, 스스로 선택한 길이 맞았다고 생각하기에. 그때 명상으로 군대 정신병원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국립정신병원에서 일생을 보내며 <그것이 알고 싶다>같은 프로에나 출연하고 있었을 것이라며 웃던 모르. 대학도 안 나오고, 주민증에 빨간 줄도 있는 그가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우리 사회는 모르 같은 이들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을까. 모르는 지금도 피자를 배달하고 있을까? 혹시라도 피자 한판에 시국 관련 스티커를 끼워주는 청년을 만난다면 환한 미소를 건네주시길…. 모르! 아자, 아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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