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 마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 인도=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서울에 이태원이 있다면 인도의 수도 델리에는 파하르간즈가 있다. 전세계에서 몰려든 배낭족들로 밤낮 없이 북적거리는 곳. 온갖 오물과 쓰레기 냄새가 코를 찌르고, 악다구니를 쓰는 노점상들 곁에서는 비좁은 거리를 점령하고 좌선 중인 소들. 정신 사납기로 이보다 더한 곳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좁고 더러운 골목에는 배낭족을 위한 싸구려 숙소- 단언컨대 이곳의 방들은 창고에 가깝다- 와 여행사, 식당이 틈도 없이 들어찼다. 택시를 타고 파하르간즈로 오던 밤, 택시 기사는 내가 가자는 호텔은 문을 닫았으니 다른 곳으로 안내하겠다며 뻔한 사기를 치려 들었다.
무능이 죄가 되지 않는 곳 다음날 아침, 동네 구멍가게에서 휴지를 고를 때 좀더 좋은 휴지가 없느냐고 묻는 내게 주인은 색깔만 다른 휴지를 건네며 아무렇지도 않게 더 비싼 값을 불렀다. 느물거리는 눈빛과 기름이 잔뜩 낀 목소리로 “헬로 마담!”을 속삭이며 접근해오는 젊은 놈들- 한눈에도 놈팽이임이 드러난다- 로 인해 단 몇 발짝도 편하게 걸을 수 없는 곳. 그래서 혼자 이 거리를 걸을 때면 사정없이 얼굴을 구겨 최대한 험악한 인상을 만들어 온갖 음충맞은 눈빛과 노골적인 구애와 끝도 없는 사기 행각을 차단해야만 한다. 다시는 찾지 않으리라 거듭 결의하지만, 인생역전이라도 하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또 찾게 되는, ‘외국인 저예산 여행자들’을 위한 거리이다.
그 거리 한 귀퉁이에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쉼터가 하나 있으니, 바로 그 이름부터가 ‘쉼터’인 작은 식당. 식당에 들어서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붉은색 문구가 우선 눈에 띈다. “쉼터 좌우명: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도덕주의자들 혹은 인생의 타이머를 완벽하게 작동시키고 사는 부지런한 이들이 들으면 “이 천하에 게으른 놈들!”이라고 불호령을 날릴 말. 내일이 지구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사과나무라도 한 그루 심고야 말겠다는 자세로 전진하던 예전의 나였다면 그저 게으른 자들의 잠언으로 치부했으리라.
하지만 기약 없는 여행길에 오른 이후 심하게 말한다면 나는 좀 망가져버렸다. 수첩에 “오늘 할 일”을 번호 매겨가며 써놓고 하나씩 해치울 때마다 줄을 그으며 살던 습관- 사실 그 습관도 치열함 때문이 아니라 남다르게 타고난 건망증에 기댄 바가 컸다- 은 이미 버렸다. ‘오늘 할 일’도 ‘내일 할 일’도 오직 ‘노는 일’밖에 없는 한량이 되어버린 탓에 한없이 게을러만 졌으니. 이곳저곳 일 없이 기웃거리고 어슬렁거리며 노니는 일을 2년 동안 하다 보니 이 격문은 더없는 감동의 물결로 밀려들었다.
더구나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인도.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능이 죄가 되지 않고 삶을 한번쯤 되물릴 수 있는 그곳”인 것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 아니라 다음 생으로 미룬다 해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곳. 이곳이라고 왜 전쟁같이 치열하고 살벌한 일상이 없겠냐마는- 아니, 사실은 지독한 가난과 희망 없는 삶의 모습이 아프게 발목을 잡는 곳이 인도이다. 그리고 그 가난과 불행은 개인적 자질 문제가 아닌 카스트 제도와 같은 구조적인 모순에서 비롯되는 면이 크다- 그런데도 지나가는 이방인들에게는 게으름과 무능, 그것을 합리화하는 온갖 기발한 변명과 거짓말이 판을 치는 곳으로 먼저 다가온다. 그러니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라는 격문의 느낌 또한 새로울 수밖에.
통쾌한 반역적 사고가 아닌가. 하늘이 열두쪽 나고 땅이 무너져도 마음먹은 일은 오늘 끝내야 하고, 세상이 내일 끝장난다 해도 한치의 후회가 없도록 현재에 충실하자는 교훈에만 둘러싸여 살아왔는데 말이다. 인생의 계획서를 여백도 없이 빽빽하게 채워넣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엔 불안해하며 그렇게 살아온 지난 세월. 스물 몇살에 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입사 몇년이면 대리를 달고, 결혼 10년 내에 서울 근교에 30평대 아파트를 장만하고, 아이들 교육을 위한 적금을 붓고, 그렇게 전진하고 또 전진하기만 하는 삶. 이 삶의 길에서 내가 행복한지, 이렇게 ‘올인’해도 괜찮은 건지,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정녕 내가 원하던 길인지, 이 길 말고는 없는 건지 돌아볼 틈도 없이 그렇게 우리는 밀려가고 있는 게 아닐까.
벗어나자, 속도전의 강박에서
어쩌면 우리는 자신을 몰아가며 버거운 삶을 자초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과정이야 어떻든 무조건 정해진 시간 안에 결과를 얻어야만 하는 그런 삶의 방식이 결국엔 부실공사를 낳고, 부실한 삶을 낳는 게 아닐까.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 마음의 속도를 늦추는 것. 오늘 해야만 된다고 믿는 일을 내일로 미루고 잠시 숨을 고르는 일일지도 모른다. 자, 벗어나자, 속도전의 강박에서. 그리고 미뤄보자,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당당하게!
무능이 죄가 되지 않는 곳 다음날 아침, 동네 구멍가게에서 휴지를 고를 때 좀더 좋은 휴지가 없느냐고 묻는 내게 주인은 색깔만 다른 휴지를 건네며 아무렇지도 않게 더 비싼 값을 불렀다. 느물거리는 눈빛과 기름이 잔뜩 낀 목소리로 “헬로 마담!”을 속삭이며 접근해오는 젊은 놈들- 한눈에도 놈팽이임이 드러난다- 로 인해 단 몇 발짝도 편하게 걸을 수 없는 곳. 그래서 혼자 이 거리를 걸을 때면 사정없이 얼굴을 구겨 최대한 험악한 인상을 만들어 온갖 음충맞은 눈빛과 노골적인 구애와 끝도 없는 사기 행각을 차단해야만 한다. 다시는 찾지 않으리라 거듭 결의하지만, 인생역전이라도 하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또 찾게 되는, ‘외국인 저예산 여행자들’을 위한 거리이다.

델리의 대표적인 관광지 ‘붉은 성’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

아래는 인도인들이 휴식을 취할 때 즐겨 마시는 차 ‘짜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