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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침묵의 언어로 소통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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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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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내면에서 타인으로 향하는 확충의 논리… “덕의 소리에 귀기울이라”

이 연재에서 ‘공자의 정명론’을 다루기 시작할 즈음, 자신을 ‘논변가’(Rhetorician)라고만 밝힌 이로부터 메일이 왔다. 메일 주소로 보아 그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풀러턴에 있는 이라는 점만 알 수 있었을 뿐 그 이상의 신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가 제기한 문제를 검토하면서 공자의 정명론을 마무리하기로 하자. 그가 제기한 문제의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이국땅 논변가의 이의제기

“‘달변가치고 어진 놈 없다’는 (공자의) 말은 논리적으로 참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말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가지고 그의 인성을 논하는 것은 잘못이다. 달변은 좋은 인간에 의해 좋은 의도로 쓰일 수도 있고, 나쁜 인간에 의해 나쁜 의도로 쓰일 수도 있다. 당신은 공자를 옹호하기 위해 이 말을 인용했는가, 아니면 공격하기 위해 인용했는가. 내가 볼 때 당신의 글에서 당신의 관점이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난 당신이 공자를 옹호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당신은 그(공자)와 그의 태도를 전혀 비판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 메시지를 보낸다.”


이에 대해 이렇게 답신했다. “공자를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이것이냐, 아니면 저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해선 단답형으로 답하기 어렵다. 난 누구라도 전적으로 옹호하거나 전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논어>에서 공자의 어떤 말은 마음에 들다가도 다른 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 구절이 이중적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달변가치고 어진 놈 없다’는 말이 그런 경우다. 사실 이 구절에 대해 나는 양가적(ambivalent)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달변가치고 어진 놈 없다’는 판단은 논리적으로는 물론 참이 아닌 명제이다. 그러나 공자의 이 말을 두고 논리적으로 참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인 해석이다.”

이 답신 이후 풀러턴의 레토리시안은 더이상 메일을 보내오지 않았다. 아마 공자를 옹호하는 어떤 인간에 대해 크게 실망한 듯하다.

“말 잘하는 놈치고 어진 놈 못 봤다”는 말은 오늘날 감각으로 읽을 때 대단한 ‘언어 폭력’이다. 그 레토리시안의 지적처럼 논리적으로 우선 참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공자도 할말이 없지는 않다. 우선 ‘말’에 대한 공자의 생각이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니다. 그는 된사람이라면 그의 입에서 자연히 향기로운 말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을 하지만, 훌륭한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덕이 있는 건 아니다. 어진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지만,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어진 사람인 것은 아니다.”(有德者必有言, 有言者不必有德. 仁者必有勇, 勇者不必有仁. <憲問> 5)

내면에 덕이 있으면 반드시 훌륭한 말이 거기서 흘러나오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혀 놀림이나 울대의 떨림 대신 내면 깊은 곳에서 덕이 내뱉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 사람이다. 그가 미워한 것은 민첩한 혀 놀림에 기대어 세상을 살아가려는 말재간꾼들이었다.

성대 울리는 소리와 덕이 내뱉는 말

공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군자는 말을 잘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들어 쓰지 아니하고, 사람이 문제가 있다 해서 그의 좋은 말을 버리지 아니한다.”(君子不以言擧人, 不以人廢言. <衛靈公> 22)

말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므로 당연히 말 잘한다고 해서 그를 중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좀팽이거나 질이 나쁘다 하더라도 그의 말이 옳다면 또한 받아들인다는 얘기다.

이를 보면 공자가 미워한 것은 ‘말재주’(녕)이지 ‘말’(言) 자체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는 말을 매우 아끼는 사람이기도 했다. “더불어 말할 만한데도 더불어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는 것이요,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아니한데도 더불어 말한다면 말을 잃는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사람을 잃지도 아니하고 또한 말을 잃지도 아니한다.”(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知者, 不失人, 亦不失言. <위령공> 7)

더불어 말하는 행위는 당연히 의사소통의 수단이지만, 더불어 말하지 아니하는 것 또한 의사소통의 한 가지 방편이다. 오쇼 라즈니쉬는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우문에 예수가 답하지 않은 일을 두고, “어리석은 대답을 하는 것보다는 십자가형을 받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혀를 깨물지언정 말을 아끼는 편이 더 적확한 언어의 구사가 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침묵도 파홀(parole)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가르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가르침이다”(予不屑之敎誨也者, 是亦敎誨之而已矣. <告子> 下-16)라고 말한다.

침묵의 언어는 동아시아의 철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전통이다. 가령 <채근담>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고작 유자서(有字書: 글자 있는 책)나 읽을 줄 알았지 무자서(無字書: 글자 없는 책)를 읽을 줄은 모르며, 유현금(有絃琴: 줄 있는 거문고)이나 뜯을 줄 알았지 무현금(無絃琴: 줄 없는 거문고)은 뜯을 줄 모른다.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아니하고 껍데기만 쫓아다니는데 어찌 거문고와 책의 참맛을 알 도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일찍이 서화담은 줄 없는 거문고를 가까이 두고 거기 이런 글을 새겨두었다. “소리를 통해 듣는 것은 소리 없는 데서 듣는 것만 같지 못하며, 모습을 즐기는 것은 모습 없는 데서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음악이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聽之聲上, 不若聽之於無聲; 樂之形上, 不若樂之於無形. …音非聽之以耳, 聽之以心. <無絃琴銘>)

중국 고전에 대한 주희의 주석을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논어>에 대한 그의 주석 가운데 마음에 드는 구절이 하나 있다(정확하게 말하자면 주희의 말이 아니라 그의 스승 이연평의 말이다). 공자가 그의 수제자 안회를 평하는 대목(<爲政> 9)의 주석에 나오는 “묵식심융”(默識心融)이란 말이 그것이다. “묵묵히 이해하고 마음으로 깨닫는다”는 뜻이다. “요란한 빈깡통”과 맞서는 말이다.

침묵의 언어, 가르치지 않음 속의 가르침, 글 없는 글, 현 없는 현악기, 그리고 묵식심융! 저마다 자기 발언권을 내세우며 쟁명하는 인터넷의 시대, 말의 대홍수 시대에 이런 얘기는 시대에 뒤떨어져도 한참 뒤떨어진 백일몽의 잠꼬대처럼 들린다. 무엇보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모호하다. 가령 침묵의 언어를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는다니, 거기서 발생하는 자의적 해석의 폐단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침묵의 언어는 과연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어인가?

공자는 이런 힐난에 대해 “능근취비”(能近取譬)의 유비 논리학을 제시할 것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 능히 뭇사람들을 건지면 어질다고 하겠습니까?”(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라고 묻자 공자는 “어질다뿐이겠는가? 그런 사람은 반드시 성인일 것이다. 요순도 그걸 어렵게 여겼을지니!”라고 답한 뒤 이렇게 덧붙인다. “무릇 어질다는 것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이르고자 하면 남을 이르게 해준다. 가까운 데서 비유를 취할 수 있다면 어짊을 실천하는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雍也> 28)

자공이 너무 원대한 포부를 말하자, 공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살피라고 말한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바를 거울 삼아 이를 가까운 이들에게 베풀어나가면 어짊을 이룰 수 있을 뿐 아니라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들을 건지는”(博施濟衆) 성인의 덕에까지 확충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거꾸로 선 지적 준거틀 바로잡기

플라톤이 공자의 도를 들으면 “어떻게 객관화할 수 없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통해 보편에 이를 수 있겠느냐”고 힐난할 것이다. 그러면 공자는 “어떻게 자기 내면에서 절실하게 확인되지 아니한 혀놀림만 가지고 보편에 이를 수 있겠느냐”고 응수할 것이다.

다행스러운 건 오늘날의 우린 플라톤과 공자를 나란히 함께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플라톤에게서 다변의 치밀한 논증을, 공자에게서 침묵의 언어와 덕이 내뱉는 언어를 함께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두 사유세계를 함께 즐기기 위해서는, “플라톤은 그럴듯한 철인이지만 공자는 고리타분한 영감”이라 받아들이는 거꾸로 선 지적 준거틀의 균형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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