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을 덕쟁으로 전환하는 내면의 송사… 덕과 독단에 숨겨져 있는 양면성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고대 그리스의 철인들이 자기 주장이 옳음을 인정받기 위해 의지한 방법은 논박(elenchus)이었다. 그들은 더이상 논박의 여지가 없는 주장만이 참된 지식이라고 여겼다.
“이름에 값하는 덕을 갖추라”
고대 중국의 철인들도 서로 논박했고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들은 논쟁을 논쟁으로 종식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논박에 논박을 거듭하면서 ‘형식 논리학’을 얻었다면, 고대 중국인들은 대논쟁의 시대를 통해 ‘덕쟁’(德爭)의 논리를 얻었다.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먼저 ‘덕쟁’의 논리를 만들어나간 철인은 바로 공자였다. 그는 사상투쟁의 방법으로 “이름을 바로잡는” 정명론을 제시했다. 그의 정명론은 “A는 A다워야 A이다”는 형식을 취한다. ‘A다움’은 A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A가 생성해가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덕을 쌓아가야 이를 수 있다. 가령 ‘군자’(君子)라는 개념을 예로 들어보자. 이 말은 공자 이전에는 한낱 지배계급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공자는 이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에게 합당한 내면의 덕을 요구했다.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군자에게 합당한 덕’이란 어떤 구체적 상황에 처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우러나오는 무정형의 행동양식이다. 공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군자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만 부화뇌동하지 아니하고, 소인배는 부화뇌동할 뿐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릴 줄 모른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子路> 23) “군자는 사람들과 두루 함께하지만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지 아니하고, 소인배는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할 뿐 사람들과 두루 함께할 줄은 모른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爲政> 14) “군자는 태연자약하되 교만하지 아니하고, 소인배는 교만할 뿐 태연자약하지 못한다.”(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자로> 26) “군자는 늠름하되 다투지 아니하며, 뭇사람들과 함께하되 파당을 짓는 짓은 하지 아니한다.”(君子矜而不爭, 群而不黨. <衛靈公> 21) 공자는 중용의 정신을 표현할 때 즐겨 “…은 A이나 a는 아니다”(A而不a)란 어법을 사용했다. A와 a는 겉보기엔 매우 비슷하다. 예를 들어 군자가 사람들과 두루 함께하는 것이나 소인배가 이 사람 저 사람 ‘다리’ 놓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겉보기엔 닮아보인다. 땡추의 파계행과 원효 같은 고승대덕의 파계행 또한 겉보기엔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소인배의 이합집산과 땡추의 파계행 따위는 보통사람의 눈에도 어딘가 거슬리게 마련이다. 하물며 그 분야에서 깊은 내공을 쌓은 사람의 눈이라면 피해갈 길이 없는 법이다. 공자가 군자에게 요구하는 바는 지식이 아니라 덕이다.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중용의 덕이다. 그렇다면 이런 중용의 덕은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의 무지함을 알라”고 말했지만, 공자는 “너 자신과 송사를 벌이라”(自訟)고 말한다. 공자의 온전한 발언은 다음과 같다. “끝장이다! 내가 이제 능히 잘못된 일을 보면 안으로 자신과 쟁송을 벌이는 사람을 더는 보지 못하겠구나!”(已矣乎! 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 <公冶長> 26) 이 구절을 유학자들은 흔히 이렇게 옮긴다.: “나는 아직 자신의 허물을 보고서 내심으로 자책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성백효 역주본) ‘자기 허물을 발견했을 때 자책하는 사람’이 공자가 찾는 ‘흔히 볼 수 없는 사람’이란 풀이다. 그런 얘기라면 공자의 표현은 지나치게 과장된 감이 없지 않다. 아무리 척박한 난세라 할지라도 자기가 잘못한 걸 느꼈을 때 자책하는 사람이 과연 그렇게 드물까? 일자무식의 무지렁이라 할지라도 자기 잘못을 느끼면 누구나 자책을 하지 않는가? 자책에 그칠 뿐 허물을 고치는 데 이르는 사람이 드물다면 그건 얘기가 된다. 그러나 자기 허물을 보고 자책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얘기를 하면서 공자가 “끝장이다!”고 소리치며 격한 표현을 동원한 것은 어딘지 어색하다. 자송은 ‘내 마음의 법정투쟁’을 의미 이 구절은 다음의 구절과 대비해 읽어볼 필요가 있다. “어진 사람을 보거든 그와 같아질 것을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거든 안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見賢思濟焉, 見不賢而內自省也. <里仁> 17) “어질지 못한 이를 보거든 안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말은, 남의 눈에 낀 티끌을 비웃기 전에 자기 눈에 낀 들보를 돌아보라는 얘기다. “잘못된 일을 보면 안으로 자신과 송사를 벌이는 사람을 보지 못하겠구나”란 말 또한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두 구절을 종합하면, 어질지 못한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을 허물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볼 일이며, 어떤 잘못된 일을 보거든 그 잘못을 허물하기 전에 자신과 법정투쟁을 벌이라는 얘기다. 그런 사람은 정말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까? 공자가 “끝장이다!”라며 탄식할 만도 하지 않은가? “자송”(自訟)을 “내심으로 자책한다”고 푸는 것도 이 말의 뜻빛깔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주석이다. 역대 주석가들은 ‘송’(訟)을 ‘책망하다’(責)로 푼 한나라 포함(包咸)의 설을 답습해왔다. 다산 정약용은 <논어고금주>에서 ‘송’을 ‘책망하다’로 푼 포함의 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를 글자의 본래 뜻대로 “법정에서의 쟁송”(公庭之對辯)이라 풀고 있다. 그는 “천명과 인욕이 마음에서 싸울 때 자신을 이기는 일은 마치 법정투쟁에서 이기는 것과 같다”며 <주역>의 송괘(訟卦)를 들어 포함의 설을 논박하고 있다. 이렇게 읽을 때 ‘송’(訟)이라는 글자의 뜻빛깔이 잘 살아난다. 세상의 허물을 보거든, 그 문제의 시비득실을 두고 법정에서 쌍방의 논리가 치열하게 맞부딪치듯 자기 내면에서 치열한 사상투쟁을 벌이라는 얘기와, ‘너 잘못한 거 있으면 파지남근하고 자책해라’는 얘기는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얘기다. ‘자송’을 ‘자책’으로 풀었기 때문에 송나라 유학자들은 “자책한 뒤에 마음속에 후회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느니, “어떻게 해야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느니 하는, 선가(禪家) 흉내내는 얘기로 이 구절의 주석을 메우고 있다. 정약용의 설은 명말청초의 대유(大儒) 왕부지(王夫之)의 설을 따른 듯하다. 왕부지는 <주역내전>(周易內傳)과 <주역대상해>(周易大象解)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과 내가 어긋나면 남과 송사를 벌이지만, 도와 욕망이 어긋나면 스스로와 송사를 벌인다. 군자가 송사의 도를 쓸 때는 다른 사람과 송사를 벌이는 게 아니라 자신과 송사를 벌인다. 그게 송사의 도를 잘 쓰는 일이다.”(人與己違則訟人, 道與欲違則自訟. 君子之用訟也, 不以訟人而以自訟, 善於訟矣. <周易大象解>) 남과 송사를 벌이는 것보다 자신과 송사를 벌이는 것이야말로 송사의 도를 아는 사람이다. 군자는 어떤 사태와 만나더라도 자신과 쟁송을 벌이지 남과 쟁송을 벌이지 않는다. 그래서 공자는 “군자는 자기에게서 무엇을 구하지만, 소인배는 남으로부터 무엇을 구하려 든다”(<위령공> 20)고 말한다. 공자는 “송사를 듣고 판단을 내리는 일은 나도 남만큼 하겠으나, 나는 반드시 사람들로 하여금 송사함이 없도록 할 것이다”(<顔淵> 13)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세상사람들이 남과 다툼을 벌이기 전에 자신과 치열하게 쟁송을 벌인다면, 송사는 근원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공자의 황금률은 어디서 나왔나 ‘자송’의 논리는 논쟁을 덕쟁으로 전환시키는 원리이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아니하”고, “내가 서고자 하면 남을 먼저 세워주고 내가 이르고자 하면 남을 먼저 이르게 한다”는 공자의 황금률은 바로 이 자송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자송은 사실은 동서고금의 모든 철인들이 벌이는 필수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자신과 먼저 사상투쟁을 벌이지 아니하고 어떤 새로운 사유가 나올 수 있겠는가. 플라톤도 대화편을 쓰면서 자신과 먼저 치열한 쟁송을 벌였다고 봐야 한다. (그가 벌인 자송의 수준에는 불만이 많지만) 플라톤이 자송을 벌인 목적은 논변술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치열한 자송을 통해 논리를 가다듬은 자라야 남과의 논쟁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자는 자기 내면의 덕을 쌓기 위해 자송을 벌이라고 말하고 있다. 공자의 자송은 빛나는 덕쟁의 논리이다. 그러나 자송을 통해 함양되는 덕 안에는 ‘독단주의’라고 하는 매우 치명적인 독이 함께 발효할 위험이 있다. 그것이 덕쟁의 매력과 한계이다. leess@hani.co.kr

“군자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만 부화뇌동하지 아니하고, 소인배는 부화뇌동할 뿐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릴 줄 모른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子路> 23) “군자는 사람들과 두루 함께하지만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지 아니하고, 소인배는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할 뿐 사람들과 두루 함께할 줄은 모른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爲政> 14) “군자는 태연자약하되 교만하지 아니하고, 소인배는 교만할 뿐 태연자약하지 못한다.”(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자로> 26) “군자는 늠름하되 다투지 아니하며, 뭇사람들과 함께하되 파당을 짓는 짓은 하지 아니한다.”(君子矜而不爭, 群而不黨. <衛靈公> 21) 공자는 중용의 정신을 표현할 때 즐겨 “…은 A이나 a는 아니다”(A而不a)란 어법을 사용했다. A와 a는 겉보기엔 매우 비슷하다. 예를 들어 군자가 사람들과 두루 함께하는 것이나 소인배가 이 사람 저 사람 ‘다리’ 놓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겉보기엔 닮아보인다. 땡추의 파계행과 원효 같은 고승대덕의 파계행 또한 겉보기엔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소인배의 이합집산과 땡추의 파계행 따위는 보통사람의 눈에도 어딘가 거슬리게 마련이다. 하물며 그 분야에서 깊은 내공을 쌓은 사람의 눈이라면 피해갈 길이 없는 법이다. 공자가 군자에게 요구하는 바는 지식이 아니라 덕이다.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중용의 덕이다. 그렇다면 이런 중용의 덕은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의 무지함을 알라”고 말했지만, 공자는 “너 자신과 송사를 벌이라”(自訟)고 말한다. 공자의 온전한 발언은 다음과 같다. “끝장이다! 내가 이제 능히 잘못된 일을 보면 안으로 자신과 쟁송을 벌이는 사람을 더는 보지 못하겠구나!”(已矣乎! 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 <公冶長> 26) 이 구절을 유학자들은 흔히 이렇게 옮긴다.: “나는 아직 자신의 허물을 보고서 내심으로 자책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성백효 역주본) ‘자기 허물을 발견했을 때 자책하는 사람’이 공자가 찾는 ‘흔히 볼 수 없는 사람’이란 풀이다. 그런 얘기라면 공자의 표현은 지나치게 과장된 감이 없지 않다. 아무리 척박한 난세라 할지라도 자기가 잘못한 걸 느꼈을 때 자책하는 사람이 과연 그렇게 드물까? 일자무식의 무지렁이라 할지라도 자기 잘못을 느끼면 누구나 자책을 하지 않는가? 자책에 그칠 뿐 허물을 고치는 데 이르는 사람이 드물다면 그건 얘기가 된다. 그러나 자기 허물을 보고 자책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얘기를 하면서 공자가 “끝장이다!”고 소리치며 격한 표현을 동원한 것은 어딘지 어색하다. 자송은 ‘내 마음의 법정투쟁’을 의미 이 구절은 다음의 구절과 대비해 읽어볼 필요가 있다. “어진 사람을 보거든 그와 같아질 것을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거든 안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見賢思濟焉, 見不賢而內自省也. <里仁> 17) “어질지 못한 이를 보거든 안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말은, 남의 눈에 낀 티끌을 비웃기 전에 자기 눈에 낀 들보를 돌아보라는 얘기다. “잘못된 일을 보면 안으로 자신과 송사를 벌이는 사람을 보지 못하겠구나”란 말 또한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두 구절을 종합하면, 어질지 못한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을 허물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볼 일이며, 어떤 잘못된 일을 보거든 그 잘못을 허물하기 전에 자신과 법정투쟁을 벌이라는 얘기다. 그런 사람은 정말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까? 공자가 “끝장이다!”라며 탄식할 만도 하지 않은가? “자송”(自訟)을 “내심으로 자책한다”고 푸는 것도 이 말의 뜻빛깔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주석이다. 역대 주석가들은 ‘송’(訟)을 ‘책망하다’(責)로 푼 한나라 포함(包咸)의 설을 답습해왔다. 다산 정약용은 <논어고금주>에서 ‘송’을 ‘책망하다’로 푼 포함의 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를 글자의 본래 뜻대로 “법정에서의 쟁송”(公庭之對辯)이라 풀고 있다. 그는 “천명과 인욕이 마음에서 싸울 때 자신을 이기는 일은 마치 법정투쟁에서 이기는 것과 같다”며 <주역>의 송괘(訟卦)를 들어 포함의 설을 논박하고 있다. 이렇게 읽을 때 ‘송’(訟)이라는 글자의 뜻빛깔이 잘 살아난다. 세상의 허물을 보거든, 그 문제의 시비득실을 두고 법정에서 쌍방의 논리가 치열하게 맞부딪치듯 자기 내면에서 치열한 사상투쟁을 벌이라는 얘기와, ‘너 잘못한 거 있으면 파지남근하고 자책해라’는 얘기는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얘기다. ‘자송’을 ‘자책’으로 풀었기 때문에 송나라 유학자들은 “자책한 뒤에 마음속에 후회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느니, “어떻게 해야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느니 하는, 선가(禪家) 흉내내는 얘기로 이 구절의 주석을 메우고 있다. 정약용의 설은 명말청초의 대유(大儒) 왕부지(王夫之)의 설을 따른 듯하다. 왕부지는 <주역내전>(周易內傳)과 <주역대상해>(周易大象解)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과 내가 어긋나면 남과 송사를 벌이지만, 도와 욕망이 어긋나면 스스로와 송사를 벌인다. 군자가 송사의 도를 쓸 때는 다른 사람과 송사를 벌이는 게 아니라 자신과 송사를 벌인다. 그게 송사의 도를 잘 쓰는 일이다.”(人與己違則訟人, 道與欲違則自訟. 君子之用訟也, 不以訟人而以自訟, 善於訟矣. <周易大象解>) 남과 송사를 벌이는 것보다 자신과 송사를 벌이는 것이야말로 송사의 도를 아는 사람이다. 군자는 어떤 사태와 만나더라도 자신과 쟁송을 벌이지 남과 쟁송을 벌이지 않는다. 그래서 공자는 “군자는 자기에게서 무엇을 구하지만, 소인배는 남으로부터 무엇을 구하려 든다”(<위령공> 20)고 말한다. 공자는 “송사를 듣고 판단을 내리는 일은 나도 남만큼 하겠으나, 나는 반드시 사람들로 하여금 송사함이 없도록 할 것이다”(<顔淵> 13)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세상사람들이 남과 다툼을 벌이기 전에 자신과 치열하게 쟁송을 벌인다면, 송사는 근원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공자의 황금률은 어디서 나왔나 ‘자송’의 논리는 논쟁을 덕쟁으로 전환시키는 원리이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아니하”고, “내가 서고자 하면 남을 먼저 세워주고 내가 이르고자 하면 남을 먼저 이르게 한다”는 공자의 황금률은 바로 이 자송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자송은 사실은 동서고금의 모든 철인들이 벌이는 필수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자신과 먼저 사상투쟁을 벌이지 아니하고 어떤 새로운 사유가 나올 수 있겠는가. 플라톤도 대화편을 쓰면서 자신과 먼저 치열한 쟁송을 벌였다고 봐야 한다. (그가 벌인 자송의 수준에는 불만이 많지만) 플라톤이 자송을 벌인 목적은 논변술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치열한 자송을 통해 논리를 가다듬은 자라야 남과의 논쟁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자는 자기 내면의 덕을 쌓기 위해 자송을 벌이라고 말하고 있다. 공자의 자송은 빛나는 덕쟁의 논리이다. 그러나 자송을 통해 함양되는 덕 안에는 ‘독단주의’라고 하는 매우 치명적인 독이 함께 발효할 위험이 있다. 그것이 덕쟁의 매력과 한계이다. leess@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