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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세상의 탁류를 알몸으로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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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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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불통 수구파와 양가론자를 동시에 비판하는 중용의 논리

공자가 도대체 양가론자와 뭐가 다른가 하는 문제에서 다시 시작하자. 공자를 ‘고리타분한 인간의 최고봉’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들에겐 다소 뜻밖이겠지만, <논어>의 기록을 차분히 검토할 때 우리가 거기서 만나는 인간상은 적어도 그렇게 고리타분한 모습은 아니다. 지난호에서 인용한 “나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한 어떤 선입견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無可, 無不可. <微子> 8)는 구절도 그런 예의 하나다. 몇 가지 더 살펴보자. <논어·자한>편에 남아 있는 기록은 공자를 이렇게 평한다: “스승께선 네 가지를 끊었다. 멋대로 억측하지 않았고, 뭘 절대적으로 긍정하지 않았으며, 뭘 외통수로 고집하지 않았고, 홀로 옳다고 내세우지 않았다.”(子絶四―毋意, 毋必, 毋固, 毋我. <子罕> 4) <금강경>에서 “아상(我相)도 없었고, 인상(人相)도 없었고, 중생상(衆生相)도 없었고, 수자상(壽者相)도 없었느니라” 하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상(자기중심주의)이 없는 사람이라야 이 네 가지를 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보면 공자란 인물이 매우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고집불통에 관한 네 가지 법칙

그는 고집불통인 인간을 매우 미워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은자(隱者)들과 만나 대화를 나눈 단편들이 몇 조각 실려 있다. 그 가운데 은자로 알려진 미생무(微生畝)란 인물과는 이런 대화를 나눴다.


미생무: “구(丘, 공자의 이름), 그대는 어찌하여 이렇게 분주하게 돌아다니는가? 말재주나 부리고 다니는 건 아닌가?”

공자: “감히 말재주나 부리려는 게 아니라, 고집불통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非敢爲녕也, 疾固也. <憲問> 34)

세상에는 낡은 예법에 목숨 거는 고집불통 수구파 바보들이 너무나 많다. 공자의 시대나 우리 시대나 다를 건 없다.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고집불통들이 존재한다. 이것이 고집불통에 관한 제1법칙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고집불통들이 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이 고집불통에 관한 제2법칙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신의 가까이에 고집불통이 존재한다. 이것이 고집불통에 관한 제3법칙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고집불통임을 모르고 살고 있다. 이것이 고집불통에 관한 제4법칙이다.

공자의 답변은 그가 투쟁 대상으로 생각했던 두 집단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변론가들의 말재주(녕)도 싫어했지만, 수구파의 고집불통(固) 또한 혐오했다. 세상이 이렇게 고집불통의 수구파와 말재주만 믿는 변론가들에 의해 들썩거려지는 사태를 미워했기 때문에 공자는 손이 발이 되도록 세상을 주유하는 인간이 되었다는 얘기다.

공자는 세상의 파도에 몸을 맡긴 사람이다. 그는 어떤 고정관념의 철학체계를 미리 만들어놓고 세상을 재단하려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고집불통을 누구보다 미워했다. 우리는 이미 그런 고집불통 수구파들을 골탕먹이던 철인들을 몇 검토했다. 등석이나 혜시 같은 양가론자들이 그들이다. 공자는 고집불통들을 혐오하면서도 양가론자들과는 또 족보를 달리했다. 그는 말한다: “된사람(군자)은 하늘 아래 일을 하면서 죽어도 이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법이 없고, 또 죽어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법도 없다. 다만 마땅함을 따를 뿐이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里人> 10)

이 발언을 잘 뜯어보면 공자가 어떻게 수구파와 양가론자를 동시에 비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죽어도 이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법이 없고, 또 죽어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법도 없다”는 말은 수구파 고집불통을 겨냥한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 못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도 좋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는 탁류처럼 도도히 흐르는 세상 한가운데 서서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세상을 재단하는 대신 그때그때마다 “마땅함”(義)을 찾아 그것을 따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양쯔강을 알몸으로 건넌 마오

마오쩌둥의 전기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이었던 대목은 정강산 투쟁도 장정도 문화대혁명도 아니었다.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그가 칠순의 늘그막에 양쯔강을 맨몸으로 헤엄쳐 건넌 일이다. 양쯔강은 팔다리의 힘으로 헤엄쳐 건널 수 있는 너비의 강이 아니다. 도도한 탁류에 몸을 맡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개인적으로 그 일화가 <모순론>이나 <실천론>보다 더 생생한 철학의 언어라고 느낀 적이 있다. 이런 비유는 좌파도 우파도 거부감을 느끼겠지만, 공자의 위 발언은 양쯔강의 탁류에 몸을 맡긴 마오쩌둥의 면모를 연상케 하는 점이 있다.

그렇다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태 한가운데서 “마땅함”을 도대체 어떻게 알 것인가.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다. 만약 어떤 촌뜨기 아저씨가 나에게 무엇을 물어봤는데, 그것에 대해 내가 아는 게 전혀 없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나는 그 물어본 내용의 양쪽 측면을 두드려 밑바닥까지 살핀 뒤 그에게 모두 알려준다.”(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子罕> 7)

이게 바로 “마땅함”을 찾아내는 공자의 방법론이다. 이는 “중용(中庸)”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공자와 양가론자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양가론은 서로 대립하는 논리의 양쪽이 다 ‘말이 됨’을 보여주려 했다. 그건 고집불통들과 투쟁하는 방편이기도 했지만, 상식에 부합하지 않아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공자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대립하는 논리의 양쪽 측면을 다 두드려서”(叩其兩端) 밑바닥까지 살펴본다.

이 방법론과 일맥상통하는 또다른 발언이 <논어>에 나온다. 그러나 그 발언은 매우 오랫동안 오독(誤讀)당해왔다. “攻乎異端, 其害也已”(<爲政> 16)란 발언이 그것이다. 정통 유학자들은 2천여년 동안 이 구절을 “이단을 전공하면 해가 될 뿐이다”(성백효 역주)라는 뜻으로 새겨왔다. ‘노씨’(老氏, 노자)나 ‘불씨’(佛氏, 고타마 싯다르타) 같은 이단들의 사상을 공부하면 득될 게 하나도 없다는 얘기란 거다. 그러나 허심하게 생각해보라. 공자 당대에 무슨 ‘이단’이니 ‘정통’이니 하는 구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단을 경계하는 논리는 어떤 사상이 이른바 ‘정통’의 권좌에 올라 맹목적으로 도그마를 굳게 지키기만 해도 호의호식할 수 있는 떨거지들이 생겨난 뒤에 나올 수 있는 멍청한 논리다. 춘추시기의 공자는 그 자신이 오히려 정통에 대한 이단아였다. 그의 학설은 당연히 정설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바람부는 들판에서 외치는 숱한 유세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공자가 “이단공부 하지 마라, 신세 조진다”는 발언을 남겼다는 건 지극히 어색한 난센스다.

이단공부하면 신세 조진다?

현대의 중국철학사 연구가 자오지빈에 따르면 전국시기에 자기 학설과는 다른 ‘그릇된 학설’이나 ‘불온 사상’을 ‘이단’이라고 부른 예는 없다. 맹자는 ‘사설’(邪說)이라 칭했고, 순자 또한 각 학파를 비판하면서 그들의 폐단을 지적했을 뿐이지 ‘이단’이라 규정하지는 않았다. 초순의 <논어보소>에 따르면 동한 이후에야 점차 ‘이단’이란 말이 ‘사설’이란 말과 동의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오지빈에 따르면 춘추전국시기에 ‘이’(異)는 ‘양’(兩)과 동의어로 쓰였다. 다시 말해 “이단”이란 “서로 다른 (두) 실마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대의 유학자 대진은 이렇게 주장했다. “‘단’은 실마리라는 뜻이다. 사태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실마리가 있는데, 그것을 ‘이단’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공호이단”(攻乎異端)이란 말의 뜻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고기양단”(叩其兩端)이란 말과 같은 뜻이 된다. “공호이단, 기해야이”란 말의 뜻은 결국 “사태의 두 가지 서로 다른 실마리를 밑바닥까지 살펴보면 해로움이 그친다”는 뜻이다.

공자는 세상의 어떤 사태에 내던져지든 이렇게 그 사태의 ‘양단’(모순하는 두 측면)을 두드림으로써 그 사태에 “마땅한” 행동 원칙을 찾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바로 공자가 말하는 중용이다. 그가 말하는 중용이란 단순한 ‘중간 지점’이나 ‘산술적인 평균’이 아니라 매우 변증법적인 과정에 놓여 있다. 그가 말하는 중용이란 파도 위에 몸을 맡긴 사람이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사태의 변화 속에서 ‘동적 균형’(dynamic equilibrium)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무 도구없이 맨몸으로 양쯔강의 탁류를 건너는 일이다.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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