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론의 쌍생아, 맹자의 혁명론과 통치계급의 명분론
공자는 “임금이란 모름지기 임금다워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물이 그 이름에 걸맞은 덕을 갖추지 못했을 때, 이름에 걸맞은 덕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공자의 정명(正名)이다.
임금이 만약 임금답지 않다면 어찌할 것인가. 아쉽게도 공자는 이에 대한 분명한 답을 주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학문을 이어받았다고 자부하는 맹자가 그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삭제당한 맹자의 불온사상
제나라의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물었다. “탕왕이 걸왕을 잡아가두고 무왕이 주왕을 쳤다 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심드렁하게 답한다. “전해오는 책에 나옵니다.” 제선왕이 이제 따져 묻는다. “신하가 자기 임금을 시해하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이 대목에서 맹자는 매섭게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사람다움을 해치는 자를 도적놈이라 하고, 올바른 일을 해치는 자를 무뢰배라 합니다. 무뢰배 도적놈을 일컬어 민심 잃은 독재자(一夫)라 하죠. 저는 무뢰배 도적놈 주(紂)를 잡아죽였다는 얘긴 들어봤어도 임금을 시해했단 얘긴 못 들어봤습니다.”(<맹자·양혜왕 하> 8) 무서운 논리다. 아무리 제왕의 자리에 앉아 있다 해도 임금답지 않으면 일부(一夫)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상나라의 폭군 주(紂)를 토벌한 것은 “임금을 시해”(弑君)한 게 아니라 “일부를 잡아죽인”(誅一夫)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일부’라는 표현은, 주희에 따르면, “민중이 등을 돌리고 친지들조차 떠나버려 임금 취급을 하지 않는 사내”를 뜻한다. 그냥 ‘한명의 보통 사내’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과 홀로 맞장뜨려는 포악무도한 사람’이란 얘기다. 오늘날 말로 하자면 ‘민심 잃은 독재자’다. 공자의 정명론은 양면적이다. 맹자의 논법처럼 “임금이 임금답지 않은 폭군이라면 마땅히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는 역성혁명론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사물이나 사태의 ‘격’에 따라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언어의 카스트, 봉건적 명분론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역대 통치자들이 전자의 논리를 억압하고 후자만을 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령 명나라의 태조는 <맹자> 가운데서 왕조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불온한 사상을 담고 있는 87개 조항을 삭제하여 <맹자절문>(孟子節文)이라는 누더기를 만들도록 하기도 했다. 위에서 인용한 제선왕과의 대화가 불온한 발언의 대표 사례로 꼽혔음은 물론이다. ‘다움’의 논리학에서 역성혁명론을 삭제해버리면 남는 것은 봉건적인 명분론뿐이다. 봉건적 명분론이란, 가령 천자가 죽으면 ‘붕’(崩)이라 하고, 자기 나라의 제후나 제후의 부인이 죽으면 ‘훙’(薨)이라 하고, 다른 제후국의 제후가 죽으면 ‘졸’(卒)이라 적는 따위의 번거롭기 짝이 없는 호칭의 카스트를 말한다. 번문욕례, 호칭의 카스트 공자가 정명론을 통해 의도했던 게 이런 봉건적 명분론이었을까? 그가 어떤 사태와 만났을 때 자신의 판단을 형성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가 그런 형식적인 명분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그는 말한다. “말끝마다 예법, 예법 떠드는데 그게 어디 옥과 비단을 말하는 것이겠느냐? 말끝마다 음악, 음악 떠드는데 그게 어디 종 두드리고 북 때리는 걸 말하는 것이겠느냐?”(<논어·양화> 11) 이 말을 이해하려면 공자 시대까지 전해 내려오던 주나라의 예법이 얼마나 번거롭고 복잡한가를 슬쩍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나라의 예법에 따르면 천자·제후·대부·사는 각각 입는 옷과 장신구, 공물, 심지어는 전속 댄서(舞姬)의 숫자조차 엄격한 하이어라키를 지켜야 했다. 이를 규정하는 것이 ‘문(文)·물(物)·도(度)·수(數)’이다. 여기서 문(文)이란 글월이 아니라 무늬를 말한다. 천자는 불꽃 모양의 반원 무늬를 옷에 장식할 수 있고, 제후는 용 모양의 무늬를 장식할 수 있으며, 대부는 검은색과 흰색 실로 도끼머리 무늬를, 사는 검은색과 청색 실로 두개의 활 무늬를 장식할 수 있다. ‘물’(物)이란 옷에 매다는 장식에 산, 용, 꽃, 짐승의 그림을 그려넣어 차등을 두도록 한 걸 말한다. 면류관을 고정시키는 비녀에도 차등을 두어 천자는 진짜 옥으로, 제후 이하는 옥 비슷한 돌로 만들도록 하고, 갓끈과 면류관 덮개의 모양과 재료까지 차등을 두도록 한 것이 ‘도’(度)이다. ‘수’(數)란 허리띠, 버클의 장식, 깃발 꼭대기에 꽂아 바람에 나부끼도록 하는 표대(飄帶)의 숫자에 차등을 두도록 한 것을 말한다.(이상 <좌전> 환공 2년조 참조) 지면이 아까우니 여기서 줄이기로 하되, “번문욕례”(繁文縟禮)란 말에 조금도 과장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공자가 “예라고 떠들어대는 게 어디 옥이나 비단을 말하는 것이겠느냐”라고 할 때, 그는 이런 문·물·도·수의 번문욕례를 지키는 데 목숨 걸고 있는 형식주의자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옥이나 비단을 문·물·도·수에 맞게 하는 것보다 예법의 근본정신을 이해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는 또 “예법은 호사스럽게 그것을 지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게 낫고, 장사지내는 일은 형식적으로 잘 치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마음으로 슬퍼하는 게 더 낫다”(禮, 與其奢也, 寧儉; 喪, 與其易也, 寧戚. <八佾> 4)고 하는가 하면, “사람이 사람답지(어질지) 않으면 예법이란 걸 어디다 써먹겠느냐? 사람이 사람답지 않으면 음악이란 걸 어디다 써먹겠느냐?”(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팔일> 3)고 일갈하기도 했다. 예악이란 당시 지배자의 두 가지 통치수단이다. <예기·악기>편은 “음악은 사람들을 어울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예법이란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울리도록 하면 서로 친해지고, 구별하도록 하면 서로 공경한다. 음악이 승하면 방탕에 흐를 수 있고, 예법이 승하면 서먹서먹해질 수 있다.” 예법으로 고삐를 당기고 음악으로 고삐를 풀어주란 얘기다. 공자는 분명한 어조로 예악이라는 전래의 통치수단보다 ‘사람됨’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공자가 형식을 무시한 소박한 내용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실용주의자인 자공(子貢)이 사당에 희생양을 바치는 일을 생략하려고 하자, 공자는 “사(賜: 자공의 이름)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를 아낀다”(<팔일> 17)고 말한다. 이런 기록을 보면 공자가 형식적인 예법을 아예 무시한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공자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발언을 달리했던 사람이다. 가령 46살 연하의 제자인 번지란 청년이 공자에게 ‘어짊’이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처음엔 “일상생활에서 공손히 하고, 일을 맡아 할 때는 경건히 하며 사람을 대할 때는 마음을 다해야 한다. 비록 오랑캐의 소굴에 떨어지더라도 이걸 버려서는 안 된다”(<자로> 19)고 답한다. 번지가 공자에게 ‘어짊’에 대해 물은 것은 <논어>에 세번 나온다. 두 번째 물었을 때 공자는 “어진 사람은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을 뒤에 한다”(<옹야> 20)고 말한다. 번지가 세 번째로 ‘어짊’에 대해 묻자 이번엔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 <안연> 22)이라고 답한다. 반면에 제자 중궁이 어짊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안연> 2)고 답했고, 사마우가 어짊에 대해 물었을 때는 “어진 사람은 그 말이 지둔하다”(<안연> 3)고 답한다. 비단 어짊에 대해서만 이렇게 다양한 답을 준 게 아니다. “군자란 어떤 사람이냐”는 자로·자공·사마우의 물음에 대해서도 공자는 각각 다른 답을 주고 있고, 자로·자공·자장·자하·중궁·계강자·제경공이 정치에 대해 물었을 때도 공자는 그때마다 각각 다른 답을 주고 있다. 공자의 ‘눈높이’ 대기설법 물어온 상대방에 따라서 답을 달리한 공자의 설법은 어찌보면 고타마 싯다르타의 ‘대기설법’(對機說法)을 닮았다. 대기설법이란 상대방의 근기(根機: 중생 각자가 갖추고 난 바탕)에 따라 그 수준에 맞게 설법을 달리 들려줌을 말한다. 공자란 사람은 이처럼 어떤 고정관념이나 완성된 체계를 가지고 가르침을 베푼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강의노트도 교안도 없었다. 그는 스스로 “나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한 어떤 선입견도 없다”(無可, 無不可. <微子> 8)고 선언하기도 했다. 가(可)함도 없고, 불가(不可)함도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공자는 양가론자들과 뭐가 다른가. 소크라테스도 사실은 소피스트의 한명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자 또한 또 한명의 양가론자였던 건 아닐까? leess@hani.co.kr

제나라의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물었다. “탕왕이 걸왕을 잡아가두고 무왕이 주왕을 쳤다 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심드렁하게 답한다. “전해오는 책에 나옵니다.” 제선왕이 이제 따져 묻는다. “신하가 자기 임금을 시해하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이 대목에서 맹자는 매섭게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사람다움을 해치는 자를 도적놈이라 하고, 올바른 일을 해치는 자를 무뢰배라 합니다. 무뢰배 도적놈을 일컬어 민심 잃은 독재자(一夫)라 하죠. 저는 무뢰배 도적놈 주(紂)를 잡아죽였다는 얘긴 들어봤어도 임금을 시해했단 얘긴 못 들어봤습니다.”(<맹자·양혜왕 하> 8) 무서운 논리다. 아무리 제왕의 자리에 앉아 있다 해도 임금답지 않으면 일부(一夫)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상나라의 폭군 주(紂)를 토벌한 것은 “임금을 시해”(弑君)한 게 아니라 “일부를 잡아죽인”(誅一夫)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일부’라는 표현은, 주희에 따르면, “민중이 등을 돌리고 친지들조차 떠나버려 임금 취급을 하지 않는 사내”를 뜻한다. 그냥 ‘한명의 보통 사내’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과 홀로 맞장뜨려는 포악무도한 사람’이란 얘기다. 오늘날 말로 하자면 ‘민심 잃은 독재자’다. 공자의 정명론은 양면적이다. 맹자의 논법처럼 “임금이 임금답지 않은 폭군이라면 마땅히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는 역성혁명론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사물이나 사태의 ‘격’에 따라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언어의 카스트, 봉건적 명분론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역대 통치자들이 전자의 논리를 억압하고 후자만을 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령 명나라의 태조는 <맹자> 가운데서 왕조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불온한 사상을 담고 있는 87개 조항을 삭제하여 <맹자절문>(孟子節文)이라는 누더기를 만들도록 하기도 했다. 위에서 인용한 제선왕과의 대화가 불온한 발언의 대표 사례로 꼽혔음은 물론이다. ‘다움’의 논리학에서 역성혁명론을 삭제해버리면 남는 것은 봉건적인 명분론뿐이다. 봉건적 명분론이란, 가령 천자가 죽으면 ‘붕’(崩)이라 하고, 자기 나라의 제후나 제후의 부인이 죽으면 ‘훙’(薨)이라 하고, 다른 제후국의 제후가 죽으면 ‘졸’(卒)이라 적는 따위의 번거롭기 짝이 없는 호칭의 카스트를 말한다. 번문욕례, 호칭의 카스트 공자가 정명론을 통해 의도했던 게 이런 봉건적 명분론이었을까? 그가 어떤 사태와 만났을 때 자신의 판단을 형성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가 그런 형식적인 명분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그는 말한다. “말끝마다 예법, 예법 떠드는데 그게 어디 옥과 비단을 말하는 것이겠느냐? 말끝마다 음악, 음악 떠드는데 그게 어디 종 두드리고 북 때리는 걸 말하는 것이겠느냐?”(<논어·양화> 11) 이 말을 이해하려면 공자 시대까지 전해 내려오던 주나라의 예법이 얼마나 번거롭고 복잡한가를 슬쩍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나라의 예법에 따르면 천자·제후·대부·사는 각각 입는 옷과 장신구, 공물, 심지어는 전속 댄서(舞姬)의 숫자조차 엄격한 하이어라키를 지켜야 했다. 이를 규정하는 것이 ‘문(文)·물(物)·도(度)·수(數)’이다. 여기서 문(文)이란 글월이 아니라 무늬를 말한다. 천자는 불꽃 모양의 반원 무늬를 옷에 장식할 수 있고, 제후는 용 모양의 무늬를 장식할 수 있으며, 대부는 검은색과 흰색 실로 도끼머리 무늬를, 사는 검은색과 청색 실로 두개의 활 무늬를 장식할 수 있다. ‘물’(物)이란 옷에 매다는 장식에 산, 용, 꽃, 짐승의 그림을 그려넣어 차등을 두도록 한 걸 말한다. 면류관을 고정시키는 비녀에도 차등을 두어 천자는 진짜 옥으로, 제후 이하는 옥 비슷한 돌로 만들도록 하고, 갓끈과 면류관 덮개의 모양과 재료까지 차등을 두도록 한 것이 ‘도’(度)이다. ‘수’(數)란 허리띠, 버클의 장식, 깃발 꼭대기에 꽂아 바람에 나부끼도록 하는 표대(飄帶)의 숫자에 차등을 두도록 한 것을 말한다.(이상 <좌전> 환공 2년조 참조) 지면이 아까우니 여기서 줄이기로 하되, “번문욕례”(繁文縟禮)란 말에 조금도 과장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공자가 “예라고 떠들어대는 게 어디 옥이나 비단을 말하는 것이겠느냐”라고 할 때, 그는 이런 문·물·도·수의 번문욕례를 지키는 데 목숨 걸고 있는 형식주의자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옥이나 비단을 문·물·도·수에 맞게 하는 것보다 예법의 근본정신을 이해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는 또 “예법은 호사스럽게 그것을 지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게 낫고, 장사지내는 일은 형식적으로 잘 치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마음으로 슬퍼하는 게 더 낫다”(禮, 與其奢也, 寧儉; 喪, 與其易也, 寧戚. <八佾> 4)고 하는가 하면, “사람이 사람답지(어질지) 않으면 예법이란 걸 어디다 써먹겠느냐? 사람이 사람답지 않으면 음악이란 걸 어디다 써먹겠느냐?”(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팔일> 3)고 일갈하기도 했다. 예악이란 당시 지배자의 두 가지 통치수단이다. <예기·악기>편은 “음악은 사람들을 어울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예법이란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울리도록 하면 서로 친해지고, 구별하도록 하면 서로 공경한다. 음악이 승하면 방탕에 흐를 수 있고, 예법이 승하면 서먹서먹해질 수 있다.” 예법으로 고삐를 당기고 음악으로 고삐를 풀어주란 얘기다. 공자는 분명한 어조로 예악이라는 전래의 통치수단보다 ‘사람됨’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공자가 형식을 무시한 소박한 내용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실용주의자인 자공(子貢)이 사당에 희생양을 바치는 일을 생략하려고 하자, 공자는 “사(賜: 자공의 이름)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를 아낀다”(<팔일> 17)고 말한다. 이런 기록을 보면 공자가 형식적인 예법을 아예 무시한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공자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발언을 달리했던 사람이다. 가령 46살 연하의 제자인 번지란 청년이 공자에게 ‘어짊’이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처음엔 “일상생활에서 공손히 하고, 일을 맡아 할 때는 경건히 하며 사람을 대할 때는 마음을 다해야 한다. 비록 오랑캐의 소굴에 떨어지더라도 이걸 버려서는 안 된다”(<자로> 19)고 답한다. 번지가 공자에게 ‘어짊’에 대해 물은 것은 <논어>에 세번 나온다. 두 번째 물었을 때 공자는 “어진 사람은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을 뒤에 한다”(<옹야> 20)고 말한다. 번지가 세 번째로 ‘어짊’에 대해 묻자 이번엔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 <안연> 22)이라고 답한다. 반면에 제자 중궁이 어짊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안연> 2)고 답했고, 사마우가 어짊에 대해 물었을 때는 “어진 사람은 그 말이 지둔하다”(<안연> 3)고 답한다. 비단 어짊에 대해서만 이렇게 다양한 답을 준 게 아니다. “군자란 어떤 사람이냐”는 자로·자공·사마우의 물음에 대해서도 공자는 각각 다른 답을 주고 있고, 자로·자공·자장·자하·중궁·계강자·제경공이 정치에 대해 물었을 때도 공자는 그때마다 각각 다른 답을 주고 있다. 공자의 ‘눈높이’ 대기설법 물어온 상대방에 따라서 답을 달리한 공자의 설법은 어찌보면 고타마 싯다르타의 ‘대기설법’(對機說法)을 닮았다. 대기설법이란 상대방의 근기(根機: 중생 각자가 갖추고 난 바탕)에 따라 그 수준에 맞게 설법을 달리 들려줌을 말한다. 공자란 사람은 이처럼 어떤 고정관념이나 완성된 체계를 가지고 가르침을 베푼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강의노트도 교안도 없었다. 그는 스스로 “나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한 어떤 선입견도 없다”(無可, 無不可. <微子> 8)고 선언하기도 했다. 가(可)함도 없고, 불가(不可)함도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공자는 양가론자들과 뭐가 다른가. 소크라테스도 사실은 소피스트의 한명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자 또한 또 한명의 양가론자였던 건 아닐까? leess@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