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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임금답지 않은 임금은 임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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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1-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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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걸맞은 덕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다움의 철학’

노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부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정치란 바로잡는 일입니다. 그대가 솔선해서 바로잡는다면 누가 감히 자신을 바르게 하지 않겠습니까?”(政者, 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 <論語·顔淵> 17)

공자에게 정치란 “바로잡는 일”

공자는 정치를 “바로잡는 일”로 이해한 사람이다. 그걸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그는 이름을 바로잡는 일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정치를 맡게 되면 가장 먼저 “이름을 바로잡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가 생각하는 ‘정치 참여’라는 게 교육부 장관 어문정책실장이 되는 걸 뜻하는 건 아닐 텐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는 ‘이름을 바로잡는’ 일을 통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이름’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잘 드러내주는 문답이 <논어·안연>편에 실려 있다.


이번엔 제나라의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경공에게 이렇게 답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안연> 11)

<사기·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가 제경공을 만난 것은 35살 즈음의 일이다. 매우 젊은 시절부터 공자는 이미 자신의 문제의식을 분명히 하고 있는 셈이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한다”는 말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평범한 말이다. 우리는 이런 어법에 매우 익숙한 문화에서 살아왔다. 가령, “사람이라고 다 사람인가?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따위의 말은 누구나 숱하게 들어왔을 것이다. 이런 어법에 우리는 쉽게 동의한다. 그러나 이 명제를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면 문제가 단순하지는 않다. 가령 “사람다워야 사람이다”라고 한다면, (‘사람다움’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도 쉽게 결판날 문제는 결코 아니지만 이 문제는 접어두기로 하더라도) 그럼 ‘사람답지 않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사람답지 않은 사람을 ‘사람 취급’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국시기에서 이미 심각한 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 그 흔적을 우리는 <묵경>(墨經)이라는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묵자(墨子)·소취(小取)>편에는 “도적을 죽이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殺盜非殺人也)라는 기묘한 명제가 나온다. “사람답지 않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란 명제를 형법에 적용하면 이런 논법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순자는 묵경의 이 명제를 ‘이름의 쓰임에 현혹되어 이름을 어지럽히는 일’의 대표적 사례로 꼽고 있다. 이 문제는 묵자의 논리학을 다룰 때 검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위의 대화에서 공자가 한 말의 원어는 “君君, 臣臣, 父父, 子子.”이다. “군군(君君)”에서 앞의 ‘군’자와 뒤의 ‘군’자는 쓰임이 다르다. 앞의 ‘군’자는 ‘임금’이라는 뜻의 주어이고, 뒤의 ‘군’자는 ‘임금답다’는 술어이다. 고대 중국어에서 명사가 동사 등의 술어로 쓰이거나 동사가 명사로 쓰이는 일은 흔히 있는 현상이다. 임금이 임금다워야 한다는 말은, 임금이라는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그가 임금 자격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걸맞은 덕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덕의 요구’이다. 어떤 이름을 가진 존재에 대해 그 이름에 합당한 덕을 요구하는 공자의 방법은 매우 역동적인 개념규정의 방법일 수 있다. <논어>에서는 공자의 이런 어투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노나라 임금이던 정공과의 대화를 들어보자.

정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임금은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섬겨야 하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임금은 신하를 예에 맞게 부려야 하고, 신하는 임금을 진실한 마음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八佾> 19) 정공은 해병전우회처럼 “한번 임금은 영원한 임금, 그러니 임금은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까라면 까는 거 아닙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공자는 이렇게 “A는 무조건 A이고, B는 무조건 B이다”라는 식의 어법을 믿지 않는다. 은근히 임금의 자리에서 찍어누르는 듯한 정공의 발언에 대해 그는 “A(임금)는 A다워야 A이고, B(신하)는 B다워야 B이다”라는 논리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팔각술잔에 팔각형이 없다면…

“A가 A답지 않다면 A라 할 수 없다”는 논리를 보여주는 공자의 가장 유명한 명제 가운데 하나는 팔각술잔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앞뒤 맥락없이 단편으로만 <논어>에 실려 있다. “팔각술잔이 팔각나지 않았다면 그게 어디 팔각술잔이겠는가? 팔각술잔이겠는가?”(고, 不고, 고哉? 고哉? <雍也> 23) 다산 정약용은 <논어고금주>에서 이 구절에 대해 “공자가 어떤 사람과 명실(名實)에 대해 논의하다 마침 앞에 있는 팔각술잔을 보고 그것을 가리키면서 비유를 들어 말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마도 그런 정황에서 나온 발언일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위의 번역 문장처럼 ‘고’(고)를 ‘팔각술잔’(육각술잔이라는 설도 있다)으로 보는 것이다. 본디 제사지낼 때 쓰는 이 술잔의 윗부분은 하늘을 본떠 둥글게 만들고, 아랫부분은 땅을 본떠 각지게 만들었다. 이런 심오한 모양을 갖춘 술잔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간 많은 정성을 쏟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기·혹리열전>에는 과거의 복잡하고 정교한 문물제도를 단순화한다는 의미로 “팔각술잔을 둥글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공자 시대에 이미 팔각술잔인 ‘고’를 건성으로 둥글둥글하게 만든 제품이 등장했던 모양이다. 각이 졌기 때문에 팔각술잔이라 불리는데, 거기 팔각모양이 없다면 그게 어디 팔각술잔이냐는 게 공자의 말이다. 각설탕이 각지지 않고 둥글게 뭉쳐 있다면 그걸 각설탕이라고 부를 수 있겠느냔 얘기다.

또다른 해석은 ‘고’를 두되들이 술잔이라 푸는 것이다(두되짜리면 이미 술병이라 해야지 그걸 어찌 술잔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일 수 있겠다. 현대의 고증학자 양붜준(楊伯峻)에 따르면 공자 당대에는 주정의 농도가 짙지 않아 오늘날만큼 술의 알콜 돗수가 높지 않았으며, 한 되의 크기 또한 오늘날보다 작았다. 그래서 <사기·골계열전>에 나오는 순우곤 같은 사람은 최고 한 가마의 술까지 마셨다고 한다). 한영의 <시설>에 따르면 한되들이 술잔은 ‘작’(爵)이라 하고, 세되들이는 ‘치’(치), 네되들이는 ‘각’(角), 다섯되들이는 ‘산’(散)이라 한다. 술잔이 세되들이면 적당하고, 다섯되들이면 너무 많은 것이다. 두되들이인 고를 사용하는 건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셔서 칠렐레팔렐레 주사를 늘어놓지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자 시대의 사람들은 이미 두되들이 잔에 감질나 두되가 훨씬 넘는(거의 세숫대야만한) 술잔을 만들어 마구 퍼마시면서 그걸 여전히 ‘고’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이름을 바로잡겠다는 공자의 눈에 이건 “이름과 실질이 서로 원망하는” 세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비쳤을 것이다.

‘고’를 어떻게 해석하든 공자는 여기서 매우 인상적으로 “A가 A답지 않으면 그걸 A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 있다. 이건 이를테면 ‘다움’의 논리학이다.

참된 왕자는 어떤 사람인가

공자는 ‘다움’의 철학자이다. 그의 중심 테마인 ‘어짊’(仁)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사람다움’을 말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임금이고, 사람은 사람다워야 사람이다. 공자는 어떤 것이 그것됨에 대해 말할 때 ‘그것다움’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서양철학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공자는 존재의 동일성을 그 존재의 존재다움에서 찾고 있다. 이런 방식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그리스 철인들과는 분명 다른 접근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A는 A이다”(동일률), “A는 비(非)A가 아니다”(모순율), “A도 아니고 비A도 아닌 것은 없다”(배중률)는 세 가지 철칙으로 어떤 존재의 동일성을 규정한다면, 공자는 “A답지 않은 것은 A가 아니다”, “A가 A이기 위해서는 A다워야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도 그의 대화편에서 A다움을 찾아 논의를 전개한다. 가령 <정치가> 같은 대화편은 참된 통치자를 어떻게 개념 규정할 것인가에 관한 대화편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개념의 수직성(유와 형상)을 문제삼고 있다면, 공자는 개념의 수평성(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 따위)을 문제삼고 있다(이 문제 또한 플라톤의 ‘정명론’을 검토하면서 비교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플라톤이 찾는 참된 왕자(true king)는 올바른 통치술(kingship)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공자가 찾는 참된 왕자는 임금다운 ‘덕’을 갖춘 사람이다. 여기서도 그리스 전통과 중국 전통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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