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통치공학을 부정한 공자와 사회공학으로 발전시킨 순자
공자의 ‘소정묘 주살사건’에 대해서는 좀더 심리를 진행해두는 편이 좋겠다. <순자·유좌>편은 공자가 “노나라의 사구였다”는 사실과 “취임 이레 만에 소정묘라는 달변가를 잡아죽였다”는 두 가지 사실을 전하고 있다. 사실은 둘 다 해묵은 논란거리이다.
먼저 첫 번째 문제. <사기·공자세가>는 공자가 56살 때(서기 전 496년) 노나라의 사구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공자의 이력서는 끈질기게 허위기재의 혐의를 받아왔다. 공자와 관련해 가장 오래된 믿을 만한 문헌인 <논어>에 그의 ‘사구 취임사건’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중국철학 연구자 크릴(H.G.Creel)은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이 인정받는 것을 열망하였기 때문에, 만약 공자가 실제로 그런 자리를 얻었다면 그들은 <논어>에 이 성공을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논어>에는 공자가 무언가 높은 자리를 지냈다는 시사조차 없다”고 지적한다. 공자가 사구라는 높은 직책을 지냈다는 사실은 일단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공자는 사상적 불관용의 화신인가
두 번째 문제는 첫 번째 문제 이상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만약 공자가 현실정치에 뛰어든 지 이레 만에 손에 피를 묻혀가며 ‘소정묘 주살사건’이라는 빅 이벤트를 연출했다면, 이 놀라운 사건이 어떤 형태로든 <논어>에 편린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건 사실 매우 심각하고 치명적인 사건이다. 공자가 소정묘를 주살했다면 그건 이루 말할 수 없는 ‘앵똘레랑스’(불관용)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악한 논변을 일삼았다”는 이유로 사람의 목숨을 영구히 빼앗는다는 건 “말 잘하면 공산당”이라는 파시스트의 무식한 공포정치 아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공자는 과연 사상적 불관용의 화신이었는가? 유가에서는 전통적으로 ‘주살(誅)’이라는 것을 성인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인정한다. 가령, 유가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서경>에는 유가가 떠받드는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순임금이 (비록 가능하면 형벌을 완화하고 사면했지만) “끝까지 악행을 저지르는 자는 잡아죽이는 형벌에 처했다”(호終賊刑. <舜典> 11)는 기록이 나온다. 이렇게 유가가 정당화하고 있는 주살에는 ‘혁명적 폭력으로서의 주살’과 ‘통치공학적 수단으로서의 주살’이 뒤섞여 있다. 가령 상나라의 탕왕이 하나라의 폭군 걸왕을 주살한 일이나, 주나라의 무왕이 상나라의 폭군 주왕을 주살한 일은 무력통치수단을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폭군을 대항무력으로 제거한 ‘혁명적 폭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무장 민간인으로서 오로지 세치 혀만 믿고 까부는 존재일 뿐이던 변론가 등석이나 소정묘를 잡아죽인 일은 ‘통치공학으로서의 주살(=학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말 잘하는 인간이라고 다 잡아죽이는 세상은 어떤 파시스트의 치하보다도 더 살벌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가에서 성인으로 추앙하는 성인들은 혁명적 폭력으로 폭군을 제거한 영웅(탕왕과 무왕)이기도 하지만, 일단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통치공학의 도구로서 주살을 병행해 사용한 통치계급이었다. 지난호에서 소정묘 주살사건이 “유가 사상의 발전 맥락을 볼 때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이라고 한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그러나 공자란 인물이 과연 그런 통치공학적 폭력을 휘둘렀겠느냐 하는 의문은 또다른 문제다. 앞서 인용한 바 있듯, 그는 형벌과 명령이라는 통치공학 수단에 의존하는 대신 인민의 내면의 덕을 계발할 것을 권면한 인물이다. 그는 또 “정치를 하는 데 어찌 죽임을 쓰겠는가”(<안연> 19)라고 하여 통치수단으로서 주살을 부정하는 발언도 남겼다. 제나라의 뛰어난 재상 관중을 평가하면서 그가 가장 높이 산 건 관중이 제환공으로 하여금 “제후들을 규합하도록 하면서 무력에 의존하지 않도록 보필했다”(<헌문> 17)는 점이었다. 그런 그가 “말 잘하는 공산당” 소정묘를 단칼에 때려잡았다는 건 아무래도 <논어>에 그려진 공자의 이미지와 잘 맞지 않는다. 공자란 인물의 위대함은 어찌보면 요임금 이래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형벌과 명령, 사면과 완화의 기계적 자의적 통치공학을 인간 내면 성숙의 덕치주의로 대신하려 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가 말 잘하는 인간을 불신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려고 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말 잘하는 인간치고 어진 놈 없다”는 말과, “말 잘하는 공산당은 모두 잡아죽여라”라는 말은 하늘과 땅만큼 다른 말이다. “소인배의 간웅을 주살하라!” 소정묘 주살사건의 미스터리는 <순자>를 읽어보면 풀린다. 순자는 공자의 사상을 비롯해 제자백가의 사상을 집대성할 것을 꾀한 매우 야심찬 학자였다. 그는 공자의 학통을 이어받았다고 자처했지만, 공자와는 달리 사회공학적 통치수단으로서의 폭력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논리를 폈다. 그는 공자 시대에 비해 훨씬 시끄러워진 세상에서 활동했다. 그는 공자 시절에 등장했던 등석을 훨씬 능가하는 현란한 논법을 구사하는 공손룡이나 혜시 같은 변론가들과 논쟁을 벌여야 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논변이란 현상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이를 ‘소인배의 논변’, ‘사군자의 논변’, ‘성인의 논변’으로 나누었다. 성인의 논변은 도와 일치한다. 사군자의 논변은 사리에 들어맞는다. 문제는 소인배의 논변이다. “그 말을 들어보면 언변이 유창하지만 중심이 없고 실천에 옮겨보면 온통 거짓투성이일 뿐 실제 이뤄내는 일은 없다. 위로는 군주를 받들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인민의 국론통일을 저해한다. 듣기 좋은 말주변으로 예절바른 것처럼 가장하면서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여겨 거만하게 구는” 부류의 논변이 바로 소인배의 논변이다. 순자에 따르면 이런 논변을 일삼는 이는 ‘간사한 무리의 야심찬 호걸’(奸人之雄)이다. “성인이 일어나면 (이런 소인배의 논변을 일삼는 간웅을) 가장 먼저 잡아죽이며, 도적을 잡는 일은 그 다음이다. 도적은 변화시킬 수 있지만, 이런 인간은 절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非相> 18) 순자가 보기에 등석이나 소정묘, 혜시나 공손룡 같은 무리들은 도적보다 더 위험한 불순분자로 천하통일을 위해서는 즉각 잡아죽여야 할 존재다. 여기서 주살은 이제 단순한 일벌백계의 통치수단이 아니라 사상통제와 국론통일을 위한 사회공학의 수단으로 변하고 있다. 이제 소정묘 주살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릴 때다(물론 최종심급은 아니다). <순자·유좌>편이 기록하고 있는 이 사건은, 공자가 정치를 맡으면 가장 먼저 “이름을 바로잡겠다”고 한 고사를, 공자가 실제 정치에 참여하여 달변가 하나를 학살한 일로 바꾸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공자가 도적을 잡는 일보다 달변가 잡아죽이는 일을 앞세웠다는 <유좌>편의 이야기는, 소인배의 논변을 일삼는 간웅의 처형이 도적 잡는 일보다 급선무라는 <비상>편의 어법과 공교롭게 일치한다. <비상>편은 순자가 지은 글이라고 인정받고 있지만, <유좌>편은 순자의 문인들이 엮은 글이라고 보는 게 정설이다. 공자의 정명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순자는 이를 사회공학의 논리로 변형시켜 “소인배의 논변을 일삼는 간웅은 도적보다 먼저 잡아죽여야 한다”는 논리를 폈고, 순자의 제자들은 이를 드라마틱하게 각색해 공자라는 슈퍼스타급 주연배우를 기용해 ‘소정묘 주살사건’(이제는 ‘학살사건’이라고 불러야 할)을 연출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순자의 문하에서 한비자(韓非子)나 이사(李斯) 같은 법가의 걸출한 지략가들이 나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공포정치의 불길한 전조 이 허구적 사건은 공자의 정명론이 그로부터 200년이 지나면서 어떤 심각한 사상투쟁의 논리로 변해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자, 이 거대한 사상투쟁이 어떻게 막을 내릴지에 대한 불길한 전조와도 같았다. 소정묘 학살사건은 단막극이었지만, 이 허구가 제창한 논쟁인 상대방에 대한 사상적 불관용 정책은 그로부터 1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벌어진 백주대낮의 악몽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확대되어 부메랑처럼 유학자들에게 돌아왔다. 길로틴을 발명한 길로틴이 길로틴에 목이 잘렸던 것처럼. 시위를 떠날 때의 작은 차이는 화살이 과녁에 도달할 때 엄청난 차이로 돌변한다. 공자의 정명론은 순자의 정명론으로 이어지면서 정교한 사회공학적 논리로 변신했다. 순자의 정명론은 법가로 이어졌고, 법가는 빛나는 제자백가 시대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카오스 이론처럼 예측불허의 방향으로 발전해간 백가쟁명의 진원 가운데 한 사람이던 공자의 정명론은 그렇다면 과연 어떤 논리를 담고 있었을까. leess@hani.co.kr

두 번째 문제는 첫 번째 문제 이상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만약 공자가 현실정치에 뛰어든 지 이레 만에 손에 피를 묻혀가며 ‘소정묘 주살사건’이라는 빅 이벤트를 연출했다면, 이 놀라운 사건이 어떤 형태로든 <논어>에 편린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건 사실 매우 심각하고 치명적인 사건이다. 공자가 소정묘를 주살했다면 그건 이루 말할 수 없는 ‘앵똘레랑스’(불관용)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악한 논변을 일삼았다”는 이유로 사람의 목숨을 영구히 빼앗는다는 건 “말 잘하면 공산당”이라는 파시스트의 무식한 공포정치 아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공자는 과연 사상적 불관용의 화신이었는가? 유가에서는 전통적으로 ‘주살(誅)’이라는 것을 성인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인정한다. 가령, 유가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서경>에는 유가가 떠받드는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순임금이 (비록 가능하면 형벌을 완화하고 사면했지만) “끝까지 악행을 저지르는 자는 잡아죽이는 형벌에 처했다”(호終賊刑. <舜典> 11)는 기록이 나온다. 이렇게 유가가 정당화하고 있는 주살에는 ‘혁명적 폭력으로서의 주살’과 ‘통치공학적 수단으로서의 주살’이 뒤섞여 있다. 가령 상나라의 탕왕이 하나라의 폭군 걸왕을 주살한 일이나, 주나라의 무왕이 상나라의 폭군 주왕을 주살한 일은 무력통치수단을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폭군을 대항무력으로 제거한 ‘혁명적 폭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무장 민간인으로서 오로지 세치 혀만 믿고 까부는 존재일 뿐이던 변론가 등석이나 소정묘를 잡아죽인 일은 ‘통치공학으로서의 주살(=학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말 잘하는 인간이라고 다 잡아죽이는 세상은 어떤 파시스트의 치하보다도 더 살벌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가에서 성인으로 추앙하는 성인들은 혁명적 폭력으로 폭군을 제거한 영웅(탕왕과 무왕)이기도 하지만, 일단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통치공학의 도구로서 주살을 병행해 사용한 통치계급이었다. 지난호에서 소정묘 주살사건이 “유가 사상의 발전 맥락을 볼 때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이라고 한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그러나 공자란 인물이 과연 그런 통치공학적 폭력을 휘둘렀겠느냐 하는 의문은 또다른 문제다. 앞서 인용한 바 있듯, 그는 형벌과 명령이라는 통치공학 수단에 의존하는 대신 인민의 내면의 덕을 계발할 것을 권면한 인물이다. 그는 또 “정치를 하는 데 어찌 죽임을 쓰겠는가”(<안연> 19)라고 하여 통치수단으로서 주살을 부정하는 발언도 남겼다. 제나라의 뛰어난 재상 관중을 평가하면서 그가 가장 높이 산 건 관중이 제환공으로 하여금 “제후들을 규합하도록 하면서 무력에 의존하지 않도록 보필했다”(<헌문> 17)는 점이었다. 그런 그가 “말 잘하는 공산당” 소정묘를 단칼에 때려잡았다는 건 아무래도 <논어>에 그려진 공자의 이미지와 잘 맞지 않는다. 공자란 인물의 위대함은 어찌보면 요임금 이래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형벌과 명령, 사면과 완화의 기계적 자의적 통치공학을 인간 내면 성숙의 덕치주의로 대신하려 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가 말 잘하는 인간을 불신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려고 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말 잘하는 인간치고 어진 놈 없다”는 말과, “말 잘하는 공산당은 모두 잡아죽여라”라는 말은 하늘과 땅만큼 다른 말이다. “소인배의 간웅을 주살하라!” 소정묘 주살사건의 미스터리는 <순자>를 읽어보면 풀린다. 순자는 공자의 사상을 비롯해 제자백가의 사상을 집대성할 것을 꾀한 매우 야심찬 학자였다. 그는 공자의 학통을 이어받았다고 자처했지만, 공자와는 달리 사회공학적 통치수단으로서의 폭력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논리를 폈다. 그는 공자 시대에 비해 훨씬 시끄러워진 세상에서 활동했다. 그는 공자 시절에 등장했던 등석을 훨씬 능가하는 현란한 논법을 구사하는 공손룡이나 혜시 같은 변론가들과 논쟁을 벌여야 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논변이란 현상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이를 ‘소인배의 논변’, ‘사군자의 논변’, ‘성인의 논변’으로 나누었다. 성인의 논변은 도와 일치한다. 사군자의 논변은 사리에 들어맞는다. 문제는 소인배의 논변이다. “그 말을 들어보면 언변이 유창하지만 중심이 없고 실천에 옮겨보면 온통 거짓투성이일 뿐 실제 이뤄내는 일은 없다. 위로는 군주를 받들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인민의 국론통일을 저해한다. 듣기 좋은 말주변으로 예절바른 것처럼 가장하면서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여겨 거만하게 구는” 부류의 논변이 바로 소인배의 논변이다. 순자에 따르면 이런 논변을 일삼는 이는 ‘간사한 무리의 야심찬 호걸’(奸人之雄)이다. “성인이 일어나면 (이런 소인배의 논변을 일삼는 간웅을) 가장 먼저 잡아죽이며, 도적을 잡는 일은 그 다음이다. 도적은 변화시킬 수 있지만, 이런 인간은 절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非相> 18) 순자가 보기에 등석이나 소정묘, 혜시나 공손룡 같은 무리들은 도적보다 더 위험한 불순분자로 천하통일을 위해서는 즉각 잡아죽여야 할 존재다. 여기서 주살은 이제 단순한 일벌백계의 통치수단이 아니라 사상통제와 국론통일을 위한 사회공학의 수단으로 변하고 있다. 이제 소정묘 주살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릴 때다(물론 최종심급은 아니다). <순자·유좌>편이 기록하고 있는 이 사건은, 공자가 정치를 맡으면 가장 먼저 “이름을 바로잡겠다”고 한 고사를, 공자가 실제 정치에 참여하여 달변가 하나를 학살한 일로 바꾸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공자가 도적을 잡는 일보다 달변가 잡아죽이는 일을 앞세웠다는 <유좌>편의 이야기는, 소인배의 논변을 일삼는 간웅의 처형이 도적 잡는 일보다 급선무라는 <비상>편의 어법과 공교롭게 일치한다. <비상>편은 순자가 지은 글이라고 인정받고 있지만, <유좌>편은 순자의 문인들이 엮은 글이라고 보는 게 정설이다. 공자의 정명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순자는 이를 사회공학의 논리로 변형시켜 “소인배의 논변을 일삼는 간웅은 도적보다 먼저 잡아죽여야 한다”는 논리를 폈고, 순자의 제자들은 이를 드라마틱하게 각색해 공자라는 슈퍼스타급 주연배우를 기용해 ‘소정묘 주살사건’(이제는 ‘학살사건’이라고 불러야 할)을 연출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순자의 문하에서 한비자(韓非子)나 이사(李斯) 같은 법가의 걸출한 지략가들이 나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공포정치의 불길한 전조 이 허구적 사건은 공자의 정명론이 그로부터 200년이 지나면서 어떤 심각한 사상투쟁의 논리로 변해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자, 이 거대한 사상투쟁이 어떻게 막을 내릴지에 대한 불길한 전조와도 같았다. 소정묘 학살사건은 단막극이었지만, 이 허구가 제창한 논쟁인 상대방에 대한 사상적 불관용 정책은 그로부터 1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벌어진 백주대낮의 악몽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확대되어 부메랑처럼 유학자들에게 돌아왔다. 길로틴을 발명한 길로틴이 길로틴에 목이 잘렸던 것처럼. 시위를 떠날 때의 작은 차이는 화살이 과녁에 도달할 때 엄청난 차이로 돌변한다. 공자의 정명론은 순자의 정명론으로 이어지면서 정교한 사회공학적 논리로 변신했다. 순자의 정명론은 법가로 이어졌고, 법가는 빛나는 제자백가 시대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카오스 이론처럼 예측불허의 방향으로 발전해간 백가쟁명의 진원 가운데 한 사람이던 공자의 정명론은 그렇다면 과연 어떤 논리를 담고 있었을까. leess@hani.co.kr









